11.
읍. 나의 작은 두 손을 모아 숨소리와 기척을 감췄다.
“아리 님, 어디 계세요!”
“아리 님! 어디로 가신 거예요!”
날 찾는 여노와 자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난 너희 때문에 피곤해 죽겠다고!
내가 미쳤지, 쟤네가 안 놀아준다고 삐지다니.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몇 달 전의 나를 떠올리며 자괴감에 빠졌다. 그 날 이후로 자하와 여노는 내게 너무나도 큰 관심을 보였고, 그 시선들은 매우 매우 귀찮고 부담스러웠다.
빨리 여노와 자하를 떼어놔야겠어. 자꾸 여노가 자하의 바보력을 닮아가잖아!
결국, 나는 자하와 여노가 한눈을 팔고 있는 찰나의 순간을 노렸다. 그리고 그들을 따돌리고 방 안에 있는 가구 뒤에 숨는 것에 성공했다.
“어쩌지, 여노? 아리 님 저번처럼 밖으로 나가신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리 님 최근에 기어 다니시는 속도가 아주 빨라지셨거든요.”
역시 여노가 뭘 좀 아는군.
그럼, 그럼. 내가 얼마나 피 빠지게 연습했는데! 바로 이날을 위해서!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피눈물을 삼켰다. 그래, 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안 되겠다, 얼른 가서 찾아봐야겠어, 아리 님!”
“앗, 자하 님 같이 가요!”
그들이 방을 나가자 나는 살금살금 숨어있던 몸을 일으켰다.
후유, 나한테도 드디어 자유가 찾아왔구나.
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복이었다. 이렇게 자하랑 여노를 따돌리는 것도 성공하고.
뿌듯함에 절로 고개가 끄덕거렸다.
자, 이제 백령을 찾으러 한 번 움직여 보실까?
아장아장 네발로 기어갔다. 백령을 보러 갈 생각에 엉덩이가 절로 씰룩거렸다.
아, 잠깐만…….
방문을 나가기 직전, 백령의 말이 떠올랐다.
“다음부턴 그럴 필요 없다, 내가 갈 테니.”
그 말을 한 후 백령은 실제로도 밤마다 날 찾아 주었다.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니면 이제 나 안 만나러 오는 거 아니야?
흐음…….
잠시간 매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만 그저께부터 바쁜 건지 털 한 올조차 보이지 않는걸!
뭐, 백령이 나 안 찾아오면 내가 가지, 뭐. 기다리는 것보다 나도 내가 가는 게 더 좋다!
멈춰있던 손과 발을 바삐 움직였다.
눈을 감고 백령의 기운을 느끼려 집중했다.
어, 어……?
백령의 기운이 느껴졌다. 백령의 집무실에서.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웬 낯선 기운도 함께 느껴진다는 것! 분명 어디선가 느꼈던 기운인데…….
나는 바로 눈을 부릅뜨고 몸을 낮췄다. 그리고 최대한의 속도로 백령의 집무실 앞까지 당도했다.
……그런데 이거 문을 내가 열 수 있나?
백령의 집무실 앞문은 작은 틈조차 없었다. 비집고 열기에도 무리였다.
아, 씨!
일순간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원래 내 계획은 깜짝 등장이었지만 조금 틀어서, 힘껏 문을 두드려 볼까 싶기도 하다.
일단 안에서 백령이 뭐 하는지 조사부터 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문 앞에 내 귀를 밀착시켰다.
“…….”
아무것도 안 들리잖아!
안에 진짜 누가 있는 거 맞아? 아닌데? 정말 어떤 기운이 느껴지기는 하는데? 왜 아무런 말이 없어!
“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백령 님?”
내 말이!
……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 불길한 목소리는 뭐지? 에이, 아닐 거야.
“굳이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 사화.”
사화? 사아화아?
문을 부수는 한이 있어도 들어간다.
그렇게 문이랑 운명의 박치기를 하려는 순간, 낮아진 사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 님이 정말 백령 님의 아이라는 것을, 저보고 믿으라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내 몸이 일시 정지되었다.
뭐, 뭐라고……?
“아리 님! 여기 계셨군요!”
날 발견한 자하가 복도 끝에서 달려왔다. 자하가 내 바로 옆에 올 때까지 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아리 님, 얼른 갑시다!”
자하가 나를 들어 안자,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싫어, 나 안 가!
“부우!”
나의 발버둥에도 자하가 끄떡 않자, 팔을 뻗어 자하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아야, 아, 아, 아리 님, 왜 그러세요!”
안 갈 거라고! 얼른 날 놓아주라고!
“아리 님, 거기 진짜 아파요! 아야!”
자하의 목소리가 컸던 탓일까, 아니면 자하와 나의 움직임이 컸던 탓일까?
이내 백령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백령이 안에서 얼굴을 비쳤다. 자하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었다.
“배, 백령 님!”
백령이 자하의 품에 안겨 있는, 정확히는 아직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리 님, 진짜 저 아파요.”
자하가 울먹이며 말했다. 백령과 눈이 마주친 나는 스르륵, 자하의 머리끄덩이를 천천히 놓아줬다. 이내 백령의 손이 내게로 향했다.
백령이 자하의 품에 안겨 있던 나를 자신의 품으로 가져가고는, 빠진 머리털을 보며 훌쩍이고 있는 자하를 바라보았다.
“들어와라.”
백령의 말에 훌쩍이던 자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저요?”
백령은 자하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뒤를 돌았다. 이내 백령이 방 안으로 들어가고 자하가 뒤따라 들어왔다.
방 가운데에 놓인 탁자에 앉자, 맞은 편에 있는 사화의 놀란 표정이 잘 보였다.
“아……, 안 그래도 아리 님 뵈러 가야 했는데, 이런 식이라도 아리 님을 뵙게 되어 다행이네요.”
사화가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을 자연스레 늘어놓았다.
난 봤다. 자하랑 나를 보고 일그러진 극악무도한 너의 표정을!
자하 또한 그런 사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그녀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하, 오랜만이구나. 인사가 어째 좀 늦는 것 같은데…….”
사화의 말에 자하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북쪽 땅의 주인, 사화 님. 오랜만에 찾아주셨군요. 아무런 언질도 없으시고, 뵐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뵙게 되어 무척 당황스러워 인사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손한 인사와 사과였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가시 박힌 인사말이었다. 그리고 그걸 사화 또한 모를 리 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방 안에 미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자하와 사화의 묘한 신경전이었다.
물론 위치로 치자면 사화가 훨씬 높은 위치였지만 자하는 백령의 직속 하인 같은 존재였기에 사화가 함부로 대하기에는 껄끄러운 구석이 없잖아 있을 것이다.
이내 사화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언질을 미리 하지 않아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 의회에 참석하지 못했으니깐, 말이야.”
사화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내가 아루를 선택했기에 의회에 참석하지 못한 자하에겐 꽤 직격탄이었다. 괜히 사화 때문에 내가 자하한테 미안해졌다.
자하야, 미안해. 이번 건 진심이야…….
“그럼 이리 찾으신 연유를 감히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자하의 말에 사화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이상하게 굉장히 기분 나쁜 시선이다.
“뿌우…….”
인상을 팍 찡그리자, 사화가 적잖게 당황하며 시선을 다시 옮겼다.
“아리 님에게 인사도 드릴 겸…….”
“사화 님의 시선에, 아리 님의 기분이 지금 매우 좋지 않아 보이는데요?”
자하가 사화의 말을 끊었다. 자하의 속뜻이 너무나도 명확했다.
‘우리 아리 님 지금 기분 안 좋으니까, 그만 가라.’
그에 사화의 표정이 많이 안 좋아졌다. 자신보다 낮은 위치의 신수가 본인의 말을 끊은 것도 상당히 기분 나쁠 텐데, 속뜻까지 그녀의 기분을 망쳐놓기에는 충분했다.
“자하, 전부터 생각했지만 갈수록 버릇이 안 좋아지네. 그러니까 아루한테도 맨날 지는 거지, 한심하게.”
자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놓고 저리 핀잔을 주는 건 나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하긴, 고양이니 어쩔 수 없는 건가 봐?”
네가 뭔데 우리 자하한테 그런 말을 해! 우리 자하 기죽잖아!
물론 아루한테도 맨날 지고, 귀여운 고양이도 맞지만, 우리 자한한테 그럴 수 있는 존재는 나뿐이란 말이야!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자하를 바라보았다.
“짜하, 짜하!”
짝, 짝.
나름의 응원이었다. 나 이제 짝짜꿍도 할 수 있다구! 특별히 널 위해 처음으로 쳐 본 거야, 흥.
내 응원이 통한 건지, 자하가 곧장 이쪽을 바라보더니, 놀란 듯이 눈을 빛냈다.
“헉, 아리 님!”
어때? 이제 좀 기운이 나지? 응, 응?
그런데 어째 반응이 이상하다……. 내가 생각했던 반응은 내 응원을 받은 자하가 열심히 사화한테 반론하는 건데, 자하가 갑자기 입을 가리고 감격하기 시작했다.
“아리 님, 처음으로 손뼉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또 이상한 데에 초점 맞추지 말라고!
“그러고 보니 이것 또한 처음이군.”
백령이 나를 신기하다는 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백령, 너마저…….
아니, 이 신수들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리 님 손뼉도 치시다니, 대견합니다, 정말로.”
아니, 자하야. 너 방금까지 사화 말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니? 제발 본론으로 돌아와 줘.
짝, 짝.
갑자기 자하도 나를 따라 손뼉을 치기 시작한다.
그거 아니라고, 이놈아!
“아루랑 여노한테도 알려야겠어요.”
자하가 신나서 나를 바라보며 손뼉 친다. 그거 아니라고, 자하야…….
머리 위에 백령의 큰 손이 닿았다.
“신기하군. 이런 작은 손으로도 소리가 난다는 게.”
아……. 포기한다. 그래, 어쨌든 자하가 좋아하니 된 거야. 사화와의 승패가 뭐가 중요하리, 자하가 저리 환히 웃고 있는데.
근데 왜 이렇게 나는 울고 싶을까.
백령과 자하에게서 사화란 존재는 이미 잊힌 지 오래였다. 둘 다 나를 향해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니…….
얘들아, 사화의 표정을 좀 보지 않으련? 이쯤 되니까 나 좀, 아니, 많이 무섭다.
사화가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탁자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마저 우아하게 느껴졌지만, 그녀는 최대한 화를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백령 님.”
그녀의 말에 백령과 자하가 드디어 그녀를 보았다. 백령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사화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문으로 향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백령의 입이 열렸다.
“사화.”
백령의 목소리에 사화가 발걸음을 멈췄다.
“내 영역을 함부로 넘지 않았으면 좋겠군.”
백령의 말은 세 가지 뜻을 품고 있는 듯했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아무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오지 말라는 경고.
두 번째는 자신의 하인인 자하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
그리고 세 번째는…… 나에 대한 것에 선 넘지 말라는 경고.
내 추측이지만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설마 아기도 알아들은 걸 사화가 못 알아들었을 리는 없겠지?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보니, 나와 같이 알아들은 듯하였다.
사화는 뒤를 돌아 짧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완전히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자하가 혓바닥을 삐죽,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화가 나가고, 두 신수는 다시 내게로 집중했다.
“아리 님, 아리 님! 그럼 안녕하고 손 흔드는 것도 할 수 있으세요?”
……옜다.
내가 자하를 향해 안녕, 하고 손을 흔들자, 자하가 감격에 찬 눈빛을 했다.
“아리 님, 정말 대견하십니다.”
“이제 어느 정도 의사소통도 가능한 것 같군.”
미안하지만 백령아, 난 원래 의사소통 매우 순조롭게 잘하고 있었거든?
진짜 이놈들, 날 뭐로 보는 거야!
“아리 님, 아리 님!”
짝, 짝.
자하가 다시 날 향해 손뼉을 쳤다. 누가 봐도 나한테 손뼉을 쳐달라는 눈빛이었다.
하……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지?
“아리니임!”
자하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게 애원했다.
……옜다.
짝, 짝.
내가 손뼉을 치자 자하가 전율을 일으키며 기뻐했다. 새삼 다시 한번 자하가 참 단순한 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뭐, 그러니까 사화한테 그렇게 대드는 거겠지만.
백령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는 손길이 오늘따라 참 맘에 안 든다.
내 속마음을 제발 이해해달라고! 이 나쁜 놈들아!
진짜 이번 생은 이놈들 때문에 아마 내 복장이 터져 죽지 않을까, 고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