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뭐? 바랑님이 ‘우리’ 아리 님을 데려가려고 하셨다고?”
자하가 일부러 우리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을 했다. 어쭈, 요 녀석 봐라?
자하와 아루, 여노가 내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의회 얘기하며 열띤 토론, 아니, 바랑 뒷담을 까고 있었다.
“그렇다니까. 백령 님 무릎에 어여쁘게 앉아 계신 아리 님을 갑자기 안으시더니 빙빙 도시더라.”
아루의 말에 자하가 뭐라 할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길이 날뛰었다.
“나도 그거 아직 못 해봤는데!”
……넌 평생 할 일없어!
내가 한 번은 방심해서 당해도 두 번은 안 당한다! 꿈도 꾸지 마라.
자하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아리 니임!”
“뿌우…….”
자하를 노려보며 다가오지 말라며 볼을 크게 부풀리자, 그가 주춤했다.
이내 자하의 귀가 축 처졌다.
저게 어떻게 스라소니야? 귀여운 고양이지.
저게 진정 맹수란 말인가……. 난 생각하기를 그만두련다.
그렇게 자하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아리 님이 바랑 님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아루가 큭큭대며 자하에게 말했다. 그러자 자하는 안 그래도 짧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아루를 바라보았다.
“뭔데, 뭔데?”
“풉.”
“푸하하.”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한 여노가 짧게 웃자, 아루도 신나게 웃었다. 자하의 호기심이 극에 다른 듯해 보였다.
“아, 뭔데! 왜 너희들만 아는 얘기 하냐? 어?”
자하의 호통에도 여노와 아루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이내 자하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그의 귀가 다시 한번 축 처졌다.
“너희 너무해, 나쁜 놈들!”
자하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자, 아루가 다급히 그를 말렸다.
“아, 알았어, 알았어.”
아루의 대답에 금세 자하가 다시 얌전하게 자리에 앉았다.
“똥개라고 했어, 똥개!”
“뭐, 늑대도 갯과니까요. 맞는 말이긴 한데…….”
“뭐? 진짜? 내가 그 역사적인 순간을 봤어야 했는데!”
그게 대체 왜 역사적인 순간인 건데?
그렇게 그들은 몇십 분 동안 똥개에 대해서 또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의회에서 돌아온 후로 내 방에 여노말고 다른 시녀는 들어오지 않았다.
뭐, 난 여노랑 자하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다.
자하가 이내, 곰곰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았다. 그리곤 아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근데 미호 님 궁이라면…… 그, 너 닮아서 재수 없는 마루 녀석도 있을 거 아니야?”
자하의 말에 아루가 톡 쏘아 보았다.
마루 욕을 들으니, 아루 마음이 좋지 않은 건가?
하지만 이내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그가 친절히 알려주었다.
“어딜 봐서 날 닮아? 하나도 안 닮았어. 난 그런 까칠한 녀석 동생으로 둔 적 없다. 재수 없는 건 인정하마.”
어제랑 말이 다른데, 아루야?
그리고 아루와 하나도 안 닮았다고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나도 닮은 표범 쌍둥이 형제였다.
어쨌든 처음으로 아루와 자하가 한마음 한뜻으로 바랑과 마루의 뒷담을 이어나갔다.
너네 이렇게까지 죽이 척척 맞는 단짝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야.
그것보다 저 셋이 내 방에 자리를 차지하고 떠드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푸우…….”
아직도 열띤 토론 중인 그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뒤집기를 한 후, 팔에 힘을 주고 무릎을 꿇었다.
에고, 요새 무리해서 그런가? 몸이 예전 같지 않네.
그렇게 나는 내 보금자리인 이부자리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살금, 살금.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곧이어 문 앞까지 당도한 나는 다행히 살짝 열려 있는 문틈을 비집어 들어갔다.
“뿌우…….”
내가 나올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얘기하느라 바쁜 셋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맞다. 쟤들이 나랑 안 놀아줘서 삐진 거.
아기한테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데! 저런 괘씸한 놈들!
흥, 하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으로 혼자서 나온 방 밖은 미로처럼 복잡했다.
복도가 이어져 있었고, 나는 발 닿는, 아니, 손 닿는 대로 움직였다.
“따…….”
그렇게 나는, 얼마 안 가 금방 지쳐버리고 말았다.
여노의 품이 벌써 그리웠다. 집 나오면 개고생…… 아니, 방 나오면 개고생이라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그곳엔, 백령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나를 들어 안자 나는 작은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쥐어 잡았다.
“아리니이이임! 어디 계셔요!!!”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괘씸한 삼 남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삼 남매는 백령의 품에 안긴 나를 보고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배, 백령 님…….”
백령이 천천히 삼 남매를 바라보았다.
자하가 조심스레 내게 다가왔다.
“아리 님, 이리 오세요.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뿌우…….”
나도 백령을 흉내 내며 그들을 천천히 노려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홱, 돌렸다.
“뿝!”
나의 행동에 자하가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희 다 괘씸죄야! 그런 표정 하지 마!
“아, 아리 님…….”
여노의 축 처진 눈망울을 보니 마음이 따끔거리지만 어림도 없다!
모든 광경을 지켜본 백령은 나를 안은 채로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에 아루가 주춤거렸다.
“백령 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루의 말에 백령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됐다. 이만 물러가거라.”
백령의 말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난 절대 백령 품이 좋아서 그런 거 아니다. 쟤들의 괘씸죄 때문이다! 그럼, 그럼.
백령이 나를 안고 향한 곳은 궁 안에 있는 작은 음수대였다. 그곳에는 척 보기에도 굉장히 맑아 보이는 투명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백령이 내 손을 조심스레 음수대에 갖다 대었다. 차가운 물이 내 양손을 적셨다.
“손이 많이 더러워졌구나.”
아……. 열심히 기느라 손이 더러워진 지 모르고 있었다. 뭐야, 나 그럼 그 지저분한 손으로 백령의 옷깃을 붙잡은 거야?
급하게 백령의 눈치를 살폈다. 백령은 옷에는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내 손을 깨끗하게 씻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
“다음부턴 그럴 필요 없다.”
백령의 말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그의 머리칼이 바람결을 따라 날렸다.
“내가 갈 테니.”
뭐, 뭐야? 나 너한테 가려던 거 아니었거든?
마음속으로 애써 거짓말을 해봤다.
이내 백령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안고 궁 안으로 들어와 그 중, 가장 호화로워 보이는 방으로 향했다.
굳이 들어가 보지 않아도 그곳이 백령의 방이라는 것쯤은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책상과 쌓인 두루마리들을 보며 백령의 집무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백령이 나를 안고 자리에 앉았다. 백령의 품에 안긴 채로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눈을 감았다. 어제오늘 나름 체력을 소비한 나는 그렇게 백령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
내가 깨어났을 땐, 안타깝게도 익숙한 천장이 날 반겨주고 있었다.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무심한 놈, 내가 잠들었다고 바로 방에다 데려다 놓다니!
어떻게 호랑이란 녀석이 이렇게 정이 없는 거야?
“뿌우…….”
이내 나는 책상에 쌓여 있던 무수한 두루마리들을 떠올렸다. 그래, 이번 건 무죄로 쳐 주자.
“아리 님, 깨셨어요?”
“아리 님 일어나셨어?!”
언제나 익숙한 자하와 여노가 나를 반겨 주었다.
백령이 한 것처럼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자, 자하와 여노가 주춤했다.
“아, 아리 님……. 어째 가면 갈수록 백령 님이랑 닮아가는 거 같지 않아?”
“저 나쁜 눈빛은 대체 누가 가르친 걸까요. 전 가르친 기억이 없는데…….”
뭐? 백령의 눈빛이 나빠? 여노, 너 내가 확 다 일러 버린다?
물론, 난 지금 자유자재로 말도 못하는 몸뚱아리지만.
우씨, 내가 말만 했어 봐, 진짜.
“우리가 백령 님 눈빛에 맨날 쫄아서 그래! 앞으로 태연한 척해볼까?”
자하의 말에 여노가 한숨을 쉬었다.
“그게 가능해요, 자하 님?”
“……아니, 불가능하긴 하지.”
자하가 빠르게 본인의 무지함을 인정했다.
날 빤히 바라보던 여노가 나를 안아 들었다.
“근데 아리 님이 왜 화가 나신 걸까요?”
여노, 자하에게 바보력이 옮더니, 눈치도 이제 사라졌구나. 괘씸죄 취소 안 할 거야!
의외로 자하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리 님은, 섭섭했던 거야.”
응? 내가 아는 바보 같고 눈치 없던 자하가 맞나? 자하가 이렇게 눈치 빠를 리 없어!
이내 자하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여노와 나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분명, 내 애정이 필요했던 거야, 아리 님은!”
……결론이 왜 그렇게 되냐, 자하야?
자, 내 눈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똑바로 말해 보지 않으련?
자하를 한껏 노려보았다. 자하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 확실하다, 확실해! 내 애정이 필요했던 거야!”
“그, 그건 아닐 거 같은데…….”
여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하가 여노 품에 안겨 있던 나를 들어 올렸다.
“아니야, 확실해! 이 눈빛을 봐!”
어쭈? 누구 맘대로 내 몸에 손대래!
그리고 확실하긴 뭐가 확실해, 이놈아!
“바…….”
반사적으로 내 입이 열렸다. 자하의 귀가 쫑긋, 솟으며 그가 내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 버!”
“아, 아리 님……?”
자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봤다.
“바, 버, 짜, 하.”
이번엔 그의 이름까지 친히 불러 ‘너, 바보.’라는 표현을 전달했다.
그런데 어째 이상하다. 자하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아닌가?
자하가 나를 곱게 여노의 품에 안겨 놓더니 구석으로 간다.
“자, 자하 님……?”
여노가 당황한 표정으로 자하를 불렀다. 자하가 손을 들어 기다리라는 듯, 눈물을 훔쳤다.
훌쩍, 훌쩍.
그의 우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울렸다.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
잠시 고민해 봤다. 자하에게 바보라는 말이 심한 말인가?
답은 나왔다. 절대 자하에게 바보는 심한 말이 아니다. 그를 표현할 더 심한 말은 충분히 많을 터.
그런데 저리 훌쩍이는 자하를 보니 조금 마음이 따끔거렸다. 내가 너무 심했나, 앞으로 바보라는 말은 자중해야 하는 건가?
“자하 님, 왜 그러세요?”
여노가 천천히 다가갔다.
“여노, 아리 님이…… 아리 님이…….”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자하. 울지마.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자하는 분명 훌쩍이고 있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리 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어. 짜하, 라고…….”
“헉,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뭐? 나는 믿을 수 없는 말에 믿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일단 미안하단 말 취소다.
“허어어어엉.”
여노의 인정에 현실이라는 걸 깨달은 자하는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니, 그게 문제인 거야? 야!
내 의도와는 달리 자하는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세상에 지금 그보다 기분이 좋은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하다. 왠지 모르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몽, 쫑, 이! 짜하!”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바보보다 멍청이가 더 심한 욕이다. 하지만 그에 자하는 더 기뻐하며 울었다.
“아리 님, 흐엉, 평생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아니, 그쪽에 집중하지 말라고! 진짜 말도 못 하고 짜증 나 죽겠네!
몇 번 더 말하다 지친 나는 자하한테 처음으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생각보다 내가 자하의 바보력을 만만히 보고 있었다. 저건 절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전 지금 죽어도 좋아요, 아리 님. 흐엉.”
죽어, 그럼!
제발 이름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내 말뜻을 이해하란 말이야!
백령과는 다른 의미로 내 속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자하는 그렇게 삼 일 밤낮 동안 내리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