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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9)화 (9/167)

9.

“바랑 님 덕분에 여러모로 제 일이 늘었군요. 너무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어느새 돌아온 아루의 말에 바랑이 머쓱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아루는 오랫동안 이랑을 찾느라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리 아루, 내가 언젠가 꼭 복수해줄게.

“마루, 넌 대체 왜 나한테 이랑 님 행방에 대해서 안 말해준 거야?”

아루가 마루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뭐? 저 착해 보이는 마루가…… 그랬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루를 바라보았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그리고 문 앞에다 적어놨잖아. 이랑 님 여기 있다고.”

꽤나 까탈스러운 대답이었다.

뭐지……? 내가 알던 마루가 아닌 것 같은데? 애가 싸가지가 사라졌는데……?

“그걸 궁 세 바퀴는 돌고 봤잖아! 와, 진짜 섭섭하다. 백령 님이나 바랑 님이 찾고 계셨으면 바로 알려줬을 거면서.”

“당연하지.”

“너, 너…… 진짜 그렇게 살다가 등 뒤에 칼 맞고 죽을 거야.”

“그 정도 배짱 있는 녀석이 있으면 내가 먼저 죽이지 않을까?”

자신과 친분이 있는 모든 만물에 다정한 아루와는 달리, 마루는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아닌 존재들에겐 매우 까칠해 보였다.

쟤도 정상인은 아니구나.

그래, 백령네 집안애들은 비교적 정상적인 편이었던 거야.

“아, 정신이 없어서 말하는 시기를 놓쳤었네요.”

아루와 옥신각신하던 마루가 다른 신수들을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의회가 끝났으니, 백령 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돌아가셔도 좋다고 하십니다.”

그 말에 나래가 가장 먼저 일어섰다. 아무래도 어리광을 부려도 씨알도 안 먹히니, 계속 이 자리에 있기 거북한 것 같기도 하다.

나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정자를 나갔다. 그녀의 앞에 있던 찻잔은 한 번도 입을 대지 않은 것인지 가득 채워진 채 그대로였다.

바랑이 정자 밖으로 나간 나래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쟤도 참 딱하네.”

바랑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네가 그 소리를 한다고?

“몇 백 년 만에 나온 봉황이라 다들 기대가 컸었는데 말이야. 선대 주인이 바로 끌려 내려올 만큼.”

“남쪽 땅의 혼란은 자업자득이죠, 뭐. 미호 님과 저도 그때 나래 님이 어느 정도 성장하시고 자리에 앉을 줄 알았는데.”

마루가 무심하게 답했다. 그러자 바랑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웃기지 않아? 자기들이 젖도 안 뗀 애를 주인이랍시고 앉혀놓고 지금 저 어린아이에게 이를 갈고 있는 게.”

정자 안의 분위기가 일순간 가라앉았다. 그러자 바랑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어린아이 놀리는 건 너무 재밌단 말이야.”

네가 제일 나쁜 놈이야, 이놈아!

“뿌우…….”

볼을 한껏 부풀리고 바랑을 또 노려보자, 바랑이 내 표정을 보곤 박장대소를 했다.

“푸하하, 진짜 너무 귀엽다. 너, 서쪽 땅으로 안 올래?”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미쳤냐? 백령 놔두고 똥개 따라 서쪽 땅으로 가게?

그의 손을 가만히 보다, 고개를 빼고 입안에 있는 침을 힘껏 끌어모았다.

“퉷.”

나의 침이 그대로 바랑의 손에 적중했다.

정자 안은 다시 적막감이 흘렀다. 멍하니 있던 바랑의 정신이 돌아왔는지 길길이 날뛰었다.

“으악! 뭐야! 왜 나한테 침 뱉어? 너 일부러 그랬지!”

그럴 리가. 난 아기인걸?

“그럴 리가요, 아리 님은 아직 아기인걸요?”

역시 내 마음을 아는 건 여노 뿐이야, 궁으로 돌아가면 둥개둥개 많이 해 줘. 여노야!

“그…… 그렇겠지? 나한테 악감정이라던가, 악감정이라던가…… 그런 게 있는 건 아니겠지? 하핫.”

바랑이 머쓱하게 웃었다. 아, 난 쟤가 왜 웃는 게 맘에 안 들지?

나는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도옹……깨!”

나의 옹알이에 모두가 시선을 멈췄다.

“아, 아리 님……?”

여노와 아루가 황당한 표정으로 날 불렀다. 흥, 뭐 어쩌라고!

“또옹깨!”

“나, 나?”

바랑이 당황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고는 혼자 ‘에이, 아니겠지…….’하며 애써 자기합리화를 했다.

안 되겠다, 내가 그에게 얼른 현실을 일깨워 줘야지.

“또옹깨!”

바랑이 적잖이 충격받은 표정을 했다. 이내 백령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배, 백령…… 얘가 나보고 똥개라고 하는데?”

“처음이군.”

“응? 뭐가?”

백령이 나에게 시선을 둔 채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연속으로 옹알이를 하는 건 처음이군.”

백령의 엉뚱한 대답에 바랑이 더욱더 당황스럽다는 듯 말했다.

“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아루와 여노도 이미 백령의 말에 아차, 하더니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아리 님 발음도 훨씬 좋아지셨어요.”

“맞아. 게다가 세 번이나 연속으로 말씀하시다니…… 대견하십니다, 아리 님!”

똥개라고 하면 칭찬을 받는다……. 내 머릿속에 주입 완료했다.

“또옹깨, 또옹개!”

이제는 대놓고 바랑을 가리키며 신나게 옹알이를 했다. 여노와 아루가 대단하다며 나를 계속 칭찬해 주자 바랑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야! 너희들이 칭찬해주니까 계속하잖아! 하지 마!”

“삼초온, 똥개야?”

“아니야!”

더 이상은 이 자리에 못 있겠다며 바랑이 이랑을 들쳐메고 서쪽 땅으로 돌아갔다.

큼큼, 내 완벽한 계획이 성공했군. 그럼 그럼!

“백령 님, 저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사화가 얼굴을 붉히며 백령에게 인사했다.

얼른 꺼지거라, 훠이, 훠이.

사화의 말에도 백령이 내게서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그저, 계속 날 바라볼 뿐.

“다음에…… 만남을 청해 백령 님의 궁에서 아리 님과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저, 저……! 내가 너의 시커먼 속을 모를 줄 아느냐!

얼른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사화를 한껏 노려보자, 그녀가 적잖게 당황했다.

“그럴 필요 없다.”

백령의 말에 사화가 고개를 숙이곤 나를 흘겼다.

“아리 님은…… 제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가 보군요.”

앗, 어떻게 알았지? 난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내가 너무 심하게 티 냈나?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그래도…… 나중에 한 번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리 님에게 호감도 살 겸. 그럼, 다시 만날 그날까지 평안하시길.”

그럴 일 없다, 돌아가! 차라리 자하 앞에서 애교를 떨고 말지. 아, 물론 이것도 오지 않을 미래이긴 하다.

백령이 또 거절할까, 인사를 하고 사화가 급히 나갔다. 백령은 사화가 나갈 때마저 나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백령아…… 날 왜 계속 바라보는 거야? 이제 말 좀 해주겠니……?

“백령 님, 아리 님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루의 물음에 백령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백령이 내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뭐지, 이 똥 싸다 말아버린 기분은? 굉장히 찝찝하다.

“배, 빼련!”

이상하다, 똥개는 무척 발음이 잘 됐었는데……. 왜 백령은 발음이 잘 안 되는 것 같지?

이 이상한 발음이라도 알아들은 백령이 다시 뒤를 돌아 나와 눈을 맞췄다.

“전보다 날 부르는 발음이 좋아졌군.”

그렇게 말하곤 다시 뒤를 돌아, 그대로 정자를 나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백령의 눈빛이 평소와는 무언가 오묘하게 달랐다.

백령이 나간 문을 그대로 바라보았다. 뭘까, 이 기분?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마루가 아루와 여노를 보며 말했다.

“뭐해? 너네도 따라가.”

그의 말에 아루가 되물었다.

“어딜?”

“어디긴 어디야, 미호 님이 계시는 곳이지.”

“우리도 가야 해?”

“두 번 말 안 한다.”

마루가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저, 저 까칠한 녀석!

“알았어. 가면 되잖아, 가면!”

“문 나가서 오른쪽 방에 계실 거야. 그리고 너희 두 사람은 절대로 미호 님 눈 마주치지 마. 지금 상당히 심기가 불편하시니까.”

이 녀석, 뭔데 까칠한데 상세하게 알려주는 거야? 생각해보니 말은 항상 까칠하게 해도 행동은 상당히 그렇지 않다. 이 귀여운 표범 녀석, 아직 덜 컸구나?

그렇게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내가 족히 500년은 넘게 산 표범을 속으로 귀여워하는 사이 여노와 아루가 정자 밖으로 나와 미호와 백령이 있을 것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이는 정도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노한 미호가 백령과 얘기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정해라, 미호.”

미호는 아직 붉은 눈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붉은 눈으로 있는 것마저 아름다웠지만 여노와 아루는 그녀의 기운을 몹시 견뎌내기 힘들어했다.

“용납할 수 없어.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들의 신력을 앗았는데!”

미호는 아까와는 달리 한동안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내 그녀의 화가 가라앉고 백령을 노려보았다.

“왜 따로 말 안 하고 그 자리에서 말한 거야, 백령? 세 명 중에 범인이 있을 거란 걸 너도 모르는 게 아닐 텐데.”

그녀가 톡 쏘며 묻자 백령이 무심히 입을 다물었다.

“너도 그때 많이 분노했잖아. 아직까지 관련된 북쪽 땅 신수들을 찾아내서 무자비하게 죽일 만큼. 대체 왜 그런 거야?”

미호의 물음에 백령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야 한동안 몸 사린다고 잠잠할 테니.”

백령은 말을 마치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우리가 들어온 걸 눈치챈 미호가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이내, 날 보는 미호의 눈이 붉은빛에서 평소의 자색으로 돌아왔다.

“아리…… 때문이구나.”

백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 뭐? 백령이 날 위해서 할 수 있는 거라면 매일 밤 날 보러 와주는 게 단데?

“하긴, 아리가 아직 어리니까. 어쩌면 네 선택이 현명한 걸지도 모르겠어. 확실히 이번에 겁먹었다면 적어도 아리가 다 클 때까지는 움직이지 못할 거야.”

미호가 말을 마치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노, 내게 아리를 넘겨주지 않겠어?”

여노는 백령을 보며 잠시 망설였지만, 마루의 말이 생각이라도 난 건지, 곧장 나를 미호에게 건넸다.

“가면 갈수록 시호를 닮아가네.”

미호가 날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시호란 여자가 누구길래 나랑 그렇게나 닮았다는 걸까? 아, 아니다. 남자일 수도 있어. 함부로 단정하지 말자.

이쯤 되면 한번 보고 싶다. 그녀, 혹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왜 저렇게까지 미호가 슬픈 눈동자를 하고 바라보는지.

“미호.”

벡령이 그녀를 낮은 어조로 불렀다. 그러자 미호가 힘없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아, 백령. ……이제 내 손길에도 울지 않네.”

그야 자하 덕분에 이제 어느 정도 눈물샘 조절이 되니까. 이렇게 보면 자하, 참 내 심신단련에 도움이 됐구나.

쓸데없는 도움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미호가 나를 안고 백령에게 다가가 나를 건넸다.

“다음에 한 번 놀러라도 가야겠어, 너희 궁에.”

아니, 백령 궁이 무슨 약속의 장소야? 개나 여우나 뱀이나 다 놀러 온대!

백령이 나를 받아 안으며 말했다.

“그건 사양하지.”

근데 미호 너, 지금…… 나를 백령한테 준거야?

갑자기 미호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백령이 나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궁으로 돌아가지.”

백령의 말에 아루와 여노가 미호에게 정중히 인사한 후 나와 백령을 따라 방을 나왔다. 그렇게 나는 백령의 품에 안겨 꽤나 길고 긴 의회를 마치고 백령의 궁으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궁에 도착하자마자 반갑지만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좀, 놔 봐! 아직까지 못 오시고 계신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

“자하 님! 안 돼요! 자하 님까지 궁을 비우시면 어떡해요!”

“맞아요! 자하 님, 제발 고정하세요.”

“야, 놔! 안 놔? 나 지금 눈에 뵈는 거 없다! 아, 좀 놓으라고!”

백령의 궁에 들어서고 나서 바로 보이는 풍경은 다름 아닌 하인 10명 정도가 부들부들 떨며 자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그가 가려는 걸 막는 것이었다.

“자하.”

백령의 목소리가 궁에 울렸다. 자하가 이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백령 님!”

그제야 하인들이 자하의 바짓가랑이 놓았다. 하인들이 바짓가랑이를 놓자, 바로 내 쪽으로 자하가 달려왔다.

“아리니이이이이임!”

……분명 의회에서 자하의 소중함을 깨달았는데 벌써부터 잊고 싶은 이 심정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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