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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8)화 (8/167)

8.

늑대의 귀를 가진 남자의 말에 나래를 제외한 모두가 인정하는 듯한 분위기였고, 구슬에 대한 논의가 천천히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바랑, 이 배신자! 너도 구슬이 백령한테 간 게 마음에 안 든다며!”

나래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에 바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에 안 든다고 했지, 반대한단 말은 한 적 없는데?”

바랑이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나래를 깔봤다. 그의 회색 머리칼 또한 밝게 빛났다.

“아, 이…… 나쁜 놈!”

나래가 바랑 옆으로 다가가 쫑알거렸지만, 바랑은 귀를 밑으로 내려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열심히 쫑알쫑알 말하고 있는데 이런 말 하는 건 미안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껏 더 작아 보이는 그녀의 체구는 정말 한 마리의 짹짹거리는 참새 같다…….

처음엔 나래가 참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이제 보니 그냥 투정 부리는 어린애일 뿐이었다. 좀 더 성숙한 내가 이해해줘야지, 뭐 어쩌겠어.

“백령, 무슨 할 말 있어?”

미호가 웃으며 살갑게 물었다. 미호의 물음에 바랑의 옆에서 쫑알거리던 나래를 포함한 모든 신수의 시선이 백령에게로 향했다.

“미호. 흑기들이 사용하는 흑도(黑刀)는 네가 저번에 금기시켰지 않았나.”

“응, 맞아. 그랬었지. 정확히는 흑기들의 신력을 빼앗았던 거 같은데……. 어쨌든 신력이 깃든 검이니까, 그런데 그건 왜 물어…….”

기억을 회상하던 미호의 눈이 붉어졌다.

“흑도를 쓰는 흑기를 보기라도 한 거야, 백령?”

미호의 얼굴에서 아까까지의 웃음기가 싹 가셨다. 백령을 제외한 정자 안의 모든 신수가 미호의 눈치를 봤다.

“보기만 했을까. 누가 신력을 줬는지, 궁에 침입한 흑기의 기척을 나 말곤 아무도 느끼지 못했더군. 아루도 기운을 못 느낄 정도였으니까.”

저번에 내 방에 쳐들어왔던 그놈이 흑기로구나. 감히 내 잠을 방해한 그 나쁜 놈들!

미호의 시선이 곧장 아루에게로 옮겨갔다. 아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루가 기운을 못 느낄 정도로 기운을 감출 수 있는 신력, 신력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흑도를 사용하는 흑기.”

미호가 신수들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을 주고 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야? 너희 셋 중에.”

나래와 사화, 그리고 바랑은 무섭게 노려보는 미호의 시선을 회피했다.

모두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미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하나만 기억해, 너희.”

미호의 말에 셋은 긴장한 탓인지 침을 꿀꺽 삼켰다.

“금기를 어긴 자는 내 친히 너희의 명을 끊어줄 테니.”

미호는 그 말을 남기고 정자를 벗어났다. 미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모두의 긴장이 풀렸다.

“대체 저 여우를 받드는 마루는 어떻게 도망 안 가고 잘 붙어 있는 건지.”

바랑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뭐, 왜?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최대한 눈을 감지 않으려 애썼다. 이내 바랑이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괴성을 질렀다.

“뭐야, 아기가 뭐 이리 눈을 오래 뜨고 있어? 졌잖아!”

……진짜 눈싸움을 하자는 거였냐?

대체 이 인간, 아니, 이 신수는 뭐 하는 족속이지?

내가 인상을 찡그리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환히 웃었다. 얜 진짜다. 진짜 미친놈이야.

순식간이었다. 바랑이 백령의 허벅지 위에 고이 앉아 있는 나를 잡아채 가더니,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빙글빙글 도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그의 몸이 돌아가면서 꼬리도 살랑거렸다. 마치 늑대가 아니고…… 똥개 같았다.

“백령한테서 이런 게 나왔다니, 말도 안 돼. 너무 귀엽잖아!”

당연하지. 난 백령한테서 나온 게 아니니까. 그보다 이것 좀 놔! 어지러워 죽겠다, 이 똥개야!

“바랑.”

백령이 그를 부르자, 그가 돌던 것을 멈추고 백령을 바라보았다.

“응? 왜, 백령?”

“죽고 싶은 건가?”

백령의 살벌한 말투에 바랑이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했다.

“에이, 설마. 난 그냥 아리가 너무 귀여워서 그런 거지.”

그가 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더니 의회 내내 옆에 서 있던 여노에게로 넘겨주었다. 진짜, 절대, 가만 안 둔다. 저 똥개.

여노의 품에 안긴 내가 발버둥 치자 여노가 나를 붙들었다.

아, 여노, 놔 봐! 저 자식이 보자보자하니까! 간만에 열이 확 오르네. 줄 거면 곱게 원위치로 돌려놓을 것이지, 왜 여노한테 넘겨주냐고!

그래, 다른 것보다 이게 제일 중요한 불만 맞다, 적어도 나에게는.

“진짜 예쁘게 생겼네, 너랑 똑 닮은 푸른 눈에, 구슬의 힘 때문인가? 미호와 같은 자색빛 은발이라니……. 크면 한 미모하겠어.”

그가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인 내가 구슬의 힘으로 머리색이 변한 건 이해가 가는데, 눈이 푸른색이라니? 백령이 주기적으로 기운을 나눠준 탓일까?

아무튼 내가 예쁜 건 나도 알아, 똥개야.

자하가 매일 말해줬는걸? 근데 지금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

“뿌우…….”

볼을 한껏 부풀리고 그를 한껏 째려보았다. 그 모습을 본 바랑을 곧이어 웃음을 터트렸다.

“볼 부풀린 것 봐. 터지겠다, 터지겠어.”

……맹세코 내가 언젠가 이놈 죽이고 만다. 진짜다.

그가 나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려고 손가락을 가져다 대려 하자, 어딘가에서 한기가 들었다.

“바랑, 아무래도 네 아이에게 이제 자리를 넘길 때가 된 것 같군.”

백령의 말에 그가 즉시 손을 거두었다.

“워, 워. 진정하라고, 친구.”

친구는 개뿔. 우리 백령은 너 같은 친구 둔 적 없다, 이 똥개야! 근데 여노 있는데 똥개라는 말 자주 하다 보니까 괜스레 여노한테 미안해지네.

근데 잠깐만, 아이라고 하지 않았어, 방금?

“아, 그러고 보니 이랑 님은 잘 지내고 계신가요?”

아루의 물음에 바랑이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탁자 밑을 살펴보고, 정자 밖을 살펴보기도 하더니 두리번거렸다.

“어? 분명 아까까진 같이 있었는데? 어디 갔지?”

……새삼 많고 많은 미친놈들 사이에서 날 물어온 게 백령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가여운 아루가 이랑을 찾으러 정자 밖으로 나갔다. 대체 왜 바랑의 아이를 바랑이 안 찾고 아루가 찾으러 나간 건지 이해가 안 가긴 한다.

우리 아루 부려먹지 마, 이 똥개야!

“이런, 아루한테 신세를 졌네. 뭐,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뭐.”

그래, 중요한 얘기 어디 들어나 보자.

“실은 나도 흑기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어.”

가만히 듣고 있던 나래가 코웃음을 쳤다.

“허, 흑기면 흑기인 거지, 비슷한 건 또 뭐람?”

나래의 코웃음에 바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말을 잘 들어봐, 아기 새야. 백령한테 아이가 있다는데, 내가 안 가볼 리가 없잖아? 그래서 소식을 듣자마자 동쪽 땅으로 떠나려고 몸을 움직였지.”

“내 궁엔 평생 발붙이지 말라 전에 일렀을 텐데.”

백령의 단호한 궁 방문 거절에 바랑의 눈꼬리가 쳐졌다.

“……그럼 아리 방은 절대 안 들어갈게.”

뭐? 저 미친 똥개가 내 방에 들어올 심보를 가지고 있었던 건가? 악몽 그 자체인데? 절대 안 돼!

“거절하지.”

“그럼 대문 밖에서……”

“아루가 오면 대문 밖도 앞으로 정찰하라 일러야겠군.”

“헉, 대문 밖은 아직 정찰 안 하고 있었어?”

괜히 말했다고 작게 웅얼거리던 바랑이 이내 고개를 졌더니, 제정신을 차린 건지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생각해 봐. 흑기들은 신수가 되지 못하고 타락해 버린 것들이잖아? 그래서인지 욕망만 좇고 있고, 말도 안 통하고.”

“그래서, 무엇을 보기라도 하셨나요, 바랑 님?”

사화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하게 물어봤다.

“근데 이게 또 정확하진 않아.”

……뭐 어쩌라는 거지? 아니, 빨리 말하라고! 이 똥개 녀석아!

이쯤 되니 바랑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전무했다. 백령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지 않았고, 여노마저 다른 곳에다 시선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모두가 그의 말에 집중하지 않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완전히 타락하지 않은 흑기가 있었어. 정신도 멀쩡해 보였어.”

그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다시 바랑에게로 쏠렸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는 짧은 침묵을 지키다 곧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좀 위험해, 그거. 오늘 백령의 말을 듣고 확신했어. 정말 우리 중에 누군가가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그만둬.”

그가 처음으로 진지한 눈빛을 하고 말했다. 그의 이미지가 좀 변하려는 순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나도 좀 긴가민가한 게, 내가 꾼 꿈이었던 거 같기도 해. 사실 잘 기억이 안 나거든!”

……정말, 이 신수는 뭐 하는 신수일까. 갑자기 궁에서 홀로 있을 자하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미안하다, 자하야. 꽃이 지고 나서야 봄인 줄 알았……. 아니, 미친 똥개를 만나고 나서야 네가 귀여운 고양이였다는 걸 알았어.

아마 모두가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즈음,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을 한 마루가 안으로 들어섰다.

“혹시, 아루가 지금 밖에서 열심히 찾아다니고 계신 분이…… 여기 있는 이랑 님은 아니죠?”

마루의 품에는 곤히 자고 있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회색 머리의 늑대인 걸로 보아, 바랑의 아이인 게 틀림없다.

“어어! 마루, 이랑 어디서 찾았냐?”

바랑이 그래도 아빠는 아빠인지, 곧장 이랑을…… 멱살 잡고 흔들어 깨웠다.

“……대문 앞에서 쭈그리시고 곤히 주무시길래 제 방에서 잠깐 쉬시게 두었습니다.”

“고맙다, 마루. 넌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

바랑의 말에 마루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말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의 최고를 뽑으라면 이 궁의 하인이란 게 말이다.”

마루는 여전히 이해 못 하겠단 표정으로 멀뚱멀뚱 서 있었다.

마루야, 저 똥개 말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어.

“우우웅…….”

바랑이 멱살 잡고 흔들어 깨운 지 좀 된 것 같은데, 이제야 이랑이 일어났다.

“삼초온……?”

“그래. 나다, 이랑아.”

“하암…….”

……삼촌? 삼촌이라고 했어, 방금? 바랑의 아이라며?

“아, 그러고 보니 이랑 님은…….”

여노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에 바랑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형님 아이이지. 돌아가시고 내가 맡게 됐지만.”

이랑이 눈을 뜨자 싱그러운 황금빛 눈이 반짝였다. 신수들은 인간보다 조금 더 빨리 크는 것 같아서 가늠할 순 없었지만, 인간의 나이로 치면 한 4살 정도 돼 보이는 얼굴과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이랑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와아…….”

이랑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게로 달려왔다.

“예쁘다, 그거 내 꺼 할래!”

뭐지? 요즘 내 귀가 많이 안 좋은가? 헛소리가 자꾸 들리네.

“여자 호랑이, 내 꺼 할래, 내 꺼!”

아니야, 난 호랑이 아니다. 귀도 없고, 꼬리도 없다. 그러니까 내 얘기 아니겠지?

나는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이랑이 배시시 웃으며 콩콩 뛰었다.

“고개 흔들흔들하는 것도 귀여워! 내 꺼 할래!”

……이 부자 아닌 부자는 쌍으로 미쳤구나. 정상인이 없네. 집안 내력인가?

“아, 이랑 님. 아리 님은 물건이 아니에요. 가지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여노가 당황하며 이랑을 다독였지만 이랑은 그저 눈을 끔뻑거리며 날 바라볼 뿐이었다.

“웅? 그치만 삼촌이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도 된댔어!”

……똥개야, 이게 다 너의 죄이니라. 자식 교육을 이따위로 하냐, 이 똥개야!

“자식 교육을 다시 시켜야 할 것 같군, 바랑.”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백령이 바랑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리 님은 예외에요, 이랑 님.”

그렇지, 우리 여노 말 잘한다.

“삼촌, 아리는 예외야……?”

바랑의 눈이 흔들렸다. 너, 설마? 아니지? 옆에 백령있다. 말 잘해라, 바랑.

“그게…….”

“웅……?”

바랑이 유독 이랑에게는 약해 보였다. 바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랑.”

백령이 고민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아리는 안 돼, 예외야, 이랑아.”

“히잉…….”

이랑의 귀가 축 처졌다.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듯 바랑이 등을 토닥였다.

“대신에, 아리가 크면 우리가 정중하게 백령 궁에 쳐들어가서 물어보자!”

“정말? 응, 알았어, 그럴게!”

앞으로 늑대 쫓는 부적이라도 사야 하나? 진짜 미치겠네, 이 신수들.

그렇게 그들은 이후, 기어코 백령의 궁에 늑대 출입금지 팻말이 붙도록 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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