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동이 트고 날이 밝자마자, 여노가 날 품에 안았다. 아직 잘 시간이었던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잠에서 깼다. 혹여나 아직 몰려오는 졸음에 울기라도 할까, 여노가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
“여노, 넌 의회에 참석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지?”
아루는 잠도 없는 지, 밤새 궁을 지키느라 피곤할 텐데도 그런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아루의 물음에 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같은 것들이 감히 발 디딜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깐요.”
“너무 긴장하지 마. 그냥 네 땅의 주인들만 토론하는 재미없는 회의일 뿐이니까.”
여노는 걱정이 많았던 것인지 아루의 말에 다물고 있던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아루 님.”
여태까지 아루를 지켜본 바에 의하면, 아루는 자하한테 빼고는 대개 모든 신수와 만물에게 다정했다.
아루를 처음 봤을 때 여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루 님은 낯을 참 많이 가리시는 분이라서요.’
저렇게만 보면 완전 다정하고 상냥하기만 한데……. 물론, 그가 ‘벌레’라 칭했던 것들은 예외인 듯 하지만.
“그러고 보니 여노는 지리에 대해서 잘 모르겠네.”
“아, 그렇네요. 그러고 보니 동쪽 땅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어요.”
“뭐,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아.”
아루가 엄지와 검지를 겹쳐 입에 갖다대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어딘가에서 푸른 말이 날아왔다.
뭐야, 나 저런 거 처음 봐. 말이 하늘도 나네.
“너와 아리 님은 청마를 타고 이동할 테니까.”
뭐? 저걸 탄다고? ……좀 사나워 보이는데요……?
“내가 출발하면 바로 뒤로 따라와. 백령 님은 뒤를 봐주실 테니.”
“알겠습니다, 아루 님.”
여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날 안은 채 청마에 올라탔다. 반사적으로 여노의 옷자락을 꼬옥 쥐었다. 그러자 여노가 등을 토닥였다.
“아리 님, 무서워 마세요. 청마는 순한 신수랍니다.”
여노가 청마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자 청마가 여노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청마는 하급 신수라 언어를 구사하진 못하지만, 분명 아리 님을 태운 것에 자랑스러워하고 있을 거예요.”
뭐야, 생각보다 되게 귀여운 신수였잖아! 앞으로 잘 부탁한다, 청마야. 오늘부터 널 내 애마로 받아주마.
히이잉.
청마에게 배시시, 웃어주자 청마도 기분이 좋은지 울부짖었다.
이내 아루가 먼저 출발하고 그를 따라 나와 여노를 태운 청마도 출발하였다. 출발하기 전, 자하가 울부짖으며 날 부르는 듯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환청으로 넘겼다.
환청 맞겠지, 환청 맞을 거야. 만약 아니더라도 뭐. 그렇다고 하자.
얼마 안 가 처음 보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고, 동그란 눈에 하나하나 담으며 마음에 새겼다. 그렇게 우리는 안전하게 미호가 있는 중앙 땅의 궁에 도착하게 되었다.
중앙 땅은 동쪽 땅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좀 더 따뜻한 느낌이랄까?
“드디어 도착했군.”
여노에게 가려져 안 보였지만, 간발의 차이로 청마보다 좀 더 늦게 도착한 백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백령의 궁은 아름다운 푸른색이었지만 미호의 궁은 황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이, 미호가 확실히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걸 매우 잘 나타내고 있었다.
끼이익.
황금으로 장식된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윽고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런데 어째 생김새가 아루와 매우 흡사하다. 범은 아니지만 범같이 생긴 게, 눈매와 머리색, 눈동자 색이 흑빛인 아루와 달리 연한 하늘빛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다른 모든 점이 아루와 일치했다.
심지어 구슬을 통해 느껴지는 신수의 기운마저 완전 같진 않았지만, 상당히 비슷했다.
그는 이내 우리 앞까지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동쪽 땅의 주인, 백령 님께 인사 올립니다.”
“마루, 오랜만이군.”
그의 인사에 백령이 그를 내려보며 말했다.
마루? 어쩐지 아루랑 이름도 비슷하다.
나는 최대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와 아루를 번갈아 보았다.
“마, 마무?”
그래, 마루라고 말한 것 맞다.
내가 둘을 번갈아 보며 말하자 아루가 활짝 웃었다.
“마루는 제 쌍둥이 동생이에요, 아리 님.”
뭐? 쌍둥이 동생?
애써 당황함을 감췄다. 뭐야, 동생도 있었어? 그것도 쌍둥이? 어쩐지 둘이 너무 똑같이 생겼다고 했어.
마루가 여노 품에 안겨 있는 내게 시선을 옮기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동쪽 땅의 작은 주인 아리 님. 저는 미호 님의 하인, 마루라 합니다.”
마루는 아루를 닮아 그런지, 잘생긴 것도 참 똑같았다. 연한 하늘빛 눈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잘생긴 용모와 예의 바른 말투에 이미 마루에 대한 호감도는 마음 가득 채워진 지 오래였다.
마루 또한 내게 호감의 표시로 환히 웃어주었다. 웃는 모습마저 아루와 매우 닮아 있었다. 아니, 판박이야, 판박이.
“미호 님과 세 땅의 주인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령 님.”
마루의 말에 백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루가 안내하는 대로 미호의 궁 안으로 들어갔다. 미호의 궁은 굉장히 장엄하고 화려했다.
연못에는 황금 잉어들이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고, 정원은 오색의 꽃들로 아름답게 가꿔져 있었다.
마루가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서더니 옆으로 비켜서며 문을 열었다. 문 너머는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여러 기운들이 섞여 있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마루가 말을 마친 후 물러갔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자, 문 너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린 곳은 방이 아니었다.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이 돋보이는 정자였다. 정자 가운데에는 둥근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차가 한 잔씩 놓여 있었다.
미호가 문 맞은편에 앉아 탁자에 한쪽 손을 턱에 괴고 우릴 보며 미소를 지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해 쏠렸다.
부담스러워 죽겠다, 진짜.
신수들이 일제히 날 향해 시선을 두자, 백령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여노.”
“네, 백령 님.”
“아리를 이리 내라.”
백령의 말에 여노가 나를 백령에게 내줬다. 백령은 나를 받아 들더니, 그대로 나를 돌려 안았다. 내 시야가 차단되고, 꽂히던 시선들이 점점 분산되는 것을 느꼈다. 백령의 청아한 향이 느껴졌다.
……나 여기서 잘 수도 있을 것 같아. 편안하다, 편안해.
백령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이내 백령은 나를 안은 채로 탁자 앞에 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미호에게로 향하자, 백령이 나를 다시 돌려 안았다.
난 아까가 좋아, 백령아. ……다시 한번 돌려 안아주겠니?
마음속으로 백령에게 애원했지만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백령은 무심히 미호 쪽으로 눈을 돌릴 뿐이었다.
“다 모였네.”
미호가 괴던 한쪽 손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의회를 시작하지.”
미호가 말을 마치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내 결정에 뭐가 불만인 거야, 너희?”
아니, 정확히는 나와 백령을 제외한 모두를.
미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앉아 있던 여자가 두 손으로 탁자를 쳤다.
“인정할 수 없어요. 약속과 다르잖아요?”
진한 붉은 머리에 황금빛 눈을 가진 제법 앳돼 보이는 여자가 불같이 화를 냈다. 등에는 무지개빛 깃털이 달린 날개가 빛났다.
“약속?”
“분명 네 땅의 주인 중 한 명에게 구슬을 하사하시겠다, 일전에 이르셨잖아요.”
“아아, 그랬던가.”
“분명, 이 의회에서 말이죠.”
그녀의 말에 미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차피 선택은 내 몫 아닌가?”
들려오는 대답에 그녀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내, 전보다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호 님의 구슬은 저희 남쪽 땅에 하사하셔야 마땅합니다.”
“왜?”
미호의 물음에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남쪽땅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입니다.”
미호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게 이유야? 너희 땅 사정을 내가 왜 봐줘야 하지?”
쌀쌀맞은 미호의 대답에 일순간 정자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미호의 표정이 날카로웠다. 내가 아는 그녀가 아닌 것만 같았다.
미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희에겐 모두 땅을 다스릴 능력이 있어. 그건 아직 어린 봉황, 나래 너도 마찬가지야. 네 능력이 모자란 걸 구슬로 채우려 하지 마. 그래봤자 변하는 건 없을 테니.”
나래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럼 백령 님께, 아니, 백령 님의 따님에게 구슬을 하사하신 그럴듯한 명분이라도 알려주시면 저희도 순응하지 않을까요?”
또 다른 여자 신수가 말했다. 검은 긴 생머리에, 아름다운 얼굴, 우아하고 긴 자태. 누가 보아도 흠잡을 데 없는 미인이었다.
그녀가 찻잔에 향해 있던 시선을 서서히 위로 올리며 눈을 떴다. 검은 세로 동공을 감싸는 황금빛 눈동자는 아름답다 못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저 눈,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그녀의 움직임, 그녀의 숨결. 모든 곳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이내, 그녀가 뱀 신수라는 것을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화, 너도 구슬을 백령의 딸에게 하사한 것에 불만이 있는 거야?”
미호의 물음에 뱀 신수가 탁자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구슬의 권능을 탐하지 않는 신수가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백령 님의 따님께 하사하신 마땅한 이유가 있다면 수긍하겠다는 것이 저희 북쪽 땅의 의견입니다.”
사화라는 여자가 우아하게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탁, 하고 잔이 탁자에 완전히 내려지자 미호가 입에 미소를 머금었다.
사화, 아름다운 외모에 말하는 것도 어여쁘기 그지없구나. 너 좀 맘에 든다.
“백령이 북쪽 땅의 신수들을 죽여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더니, 백령에 대한 마음이 여전히 각별하구나, 사화.”
“백령 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아마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예요.”
사화가 백령에게 잠시 시선을 두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뭐? 백령이 북쪽 땅을 난장판 만들었는데도 그냥 용인했다고? 그리고 뭐어? 사모오?
마음에 든단 말 철회다. 넌 내 경계대상 1순위야.
자하의 순위가 한 단계 내려갔다. 축하해, 자하야.
마음속으로 자하의 1위 탈출을 축하하고 있을 때, 미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내가 너희들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를 줘야 한다라……. 그래,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지.”
미호가 사화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했다.
사화는 분명 내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준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백령의 딸, 아리에게 권능의 자질이 보였기 때문이야.”
“자질…… 말입니까?”
되돌아오는 사화의 물음에 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호가 내게 본인의 구슬을 준 뒤, 한 번도 반응이 없던 구슬이 반응했으니까. 이 정도 이유면 납득이 가지 않아?”
“확실히, 그런 것이라면 납득이 가네요.”
미호의 말에 사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니, 사화가 백령을 사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사화가 꼴 뵈기 싫어졌다.
왜 난 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마저 얄밉지?
나래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반기를 들었다.
“전 그래도 납득이 안 가요. 자질이라니요? 자질이 있다는 것이 제 눈에는 보이지 않는걸요? 아직 그냥 아기일 뿐이잖아요!”
뭐? 난 그냥 아기 아니거든? 이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기 봤냐? 어?
백령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나래를 향했다. 정자 안에는 가라앉은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너도 참 맘에 안 든다, 나래야.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되지 않았니?
그러거나 말거나 나래는 여전히 미호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미호는 명분을 말해줬음에도 수긍하지 않는 나래를 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고, 그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던 백령이 천천히 나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 아이인데, 굳이 설명을 더 할 필요가 있나?”
백령의 차가운 음성에 정자 안에는 한기가 서렸다. 미호와 사화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백령을 바라보았고, 나래 또한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했다.
또다시 정자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꽤 긴 침묵을 깬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의회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던 늑대의 귀를 지닌 남자 신수가 씨익, 웃으며 나래를 바라보았다.
“이건 새끼 새도 더 이상 반박 못 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