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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6)화 (6/167)

6.

그 후로부터 어연 두어 달의 시간이 흘렀다. 아루가 궁에 머물고 있어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백령은 종종 날 만나러 와 주었다. 가끔은 기를 나누어 주기도 하고, 가끔은 가만히 바라보다 가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시녀들은 일주일마다 바뀌었고, 자하와 여노는 항상 내 곁에 머물렀다. 자하와 여노의 지극한 정성과 보호 아래 뒤집기를 하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천천히 배밀이를 시작했었다.

아직 기어 다니는 연습을 하는 중이지만, 이 정도 속도라면 걸어 다니는 것도 금방 가능하……겠지?

“어머, 아리 님. 오늘따라 유독 열심이시네요.”

여노가 열심히 네발로 기어 다니는 나를 보며 칭찬했다.

그럼, 그럼! 엄청 열심히 하고 있지.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거지 같은 걸음마 떼고 나면 더러워서 내가 백령 보러 기어서라도 가고 만다.

난 언제쯤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을까…….

이미 간단한 옹알이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의 발달은 된 것 같지만, 어차피 저들이 못 알아들으니 괜한 에너지 낭비는 불필요했다.

“그런데 왜 아리 님은 아직까지 옹알이를 하지 않으실까요?”

물론, 여노가 저렇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걱정할 때마다 양심이 따끔거리기는 한다.

“나도 아리 님 옹알이 듣고 싶어!”

자하가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넌 어림도 없어.

다행히 정말 수행이라도 하고 온 걸까, 자하는 요즘 의심스러울 정도로 날 귀찮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그저 관리 대상 중 하나일 뿐.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모든 건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지.

“그보다 백령 님이 정말로 아리 님의 옹알이를 기다리실 텐데 말이죠.”

여노가 갑자기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를 시전했다.

뭐어? 백령이? 내가 아는 그 백령이?

“확실히 백령 님은 기다리고 계시겠지?”

너흰 백령 모르냐?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아기보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꿈인가?

“저번엔 잘 찾아오시지도 않더니, 요즘은 매일 밤 오시는 거 같아요.”

아루가 있어서 그런 거잖아! 그리고 여노. 너 단단히 잘 못 알고 있는 게 하나 있는데, 백령은 어제도 안 오고 일주일 전에도 안 왔어.

처음엔 부정했다. 부정할 수밖에 없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는 척이라도 할 거 아니야? 어디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해대는 거야! 저걸 누가 믿어!

그렇게 2시간 동안 그들의 백령 얘기를 듣다 보니 이제 내가 믿게 되었다.

흠흠, 백령이 그렇단 말이지? 이 귀여운 호랑이 녀석 같으니라고.

그렇게 나는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어버렸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백령의 궁에도 밤이 찾아왔다. 자하가 온 뒤로 저녁이 지나면 물러가는 시녀를 제외하곤 여전한 풍경이었다.

“오늘은 백령 님이 못 오시나 봐요.”

“백령 님도 일이 많으시니까.”

거 봐, 얘들아. 안 오는 날도 심심찮게 있다니까. 너희 기억이 왜곡된 거라고!

하지만 그들의 말에 내심 기대했던 터라, 살짝 실망감이 일긴 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여노가 그런 내게로 다가와 천천히 등을 토닥였다.

“아리 님, 이제 주무실 시간이에요.”

여노의 자장가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여노는 이따금 내게 자장가를 불러주곤 한다. 생각보다 여노는 노래를 잘 불렀고,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주었다.

점점 눈이 감겼다. 완전히 눈이 감기기 전, 자하의 목소리에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여노.”

여노가 부르던 자장가를 멈추고 자하를 바라보았다.

저놈이 아직 정신을 덜 차렸나……, 감히 내 잠을 방해해?

인상을 팍, 찡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왜 그러신가요?”

“아리 님 데리고 구석으로 가 있어.”

“예?”

“빨리!”

자하가 소리치자 정신을 차린 여노는 곧장 나를 안았다. 자하가 허리춤에 있던 칼을 처음으로 꺼내 들었다. 신력이 느껴지는 칼은 자하처럼 노란빛으로 빛났다.

“누구냐? 어서 나와.”

자하의 말에 닫혀 있던 방문이 활짝 열렸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어두운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 아루가 말한 ‘벌레’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구슬을, 권능을 내놔.”

“신수도 아닌 하찮은 것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신수가 아니야?

자하의 말에 방안으로 들어온 자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온통 검은 기운이 역력했고, 신성다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용모였다.

저자는 대체 뭐지?

“지금 떠나면 목숨은 건지게 해줄게.”

자하의 말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구슬을 내놔, 구슬을!”

“말귀를 못 알아듣네. 너네 종족 특성인가 봐?”

자하가 검을 바로 잡고 다가갔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자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진해지더니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이내, 자하와 비슷해 보이는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자하가 흠칫했다.

“너희같이 하찮은 것들이 어떻게?”

자하의 말이 마치기도 전에 그가 돌격했다. 당황한 것처럼 보이던 자하도 곧바로 칼을 들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그와 자하가 부딪치기 일보 직전, 검은 기운을 가진 자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검은 기운이 사라진 자리에는, 달빛이 비추어진 백령이 서 있었다.

“배, 백령 님.”

자하가 백령의 등장에 바로 한쪽 무릎을 꿇어, 죄송함과 감사를 표했다.

백령이 검은 형체가 서 있던 바닥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금기를 깼군.”

“하지만 금기를 깼다면…… 분명 미호 님이 노하셨을 텐데…….”

“들키지 않는 유일한 존재들이 있지.”

백령의 답에 자하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 네 땅의 주인 중 한 분이……?”

백령은 여전히 무심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노, 아리는?”

“아, 다행히 아리 님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셨어요.”

백령의 말에 여노가 백령에게 나를 내밀었다. 백령이 여노에게서 나를 받아들었다. 이렇게까지 기분이 안 좋은 백령 품에 안겨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놈 자식, 기분 좀 펴라!

그때, 여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보다 백령 님이 정말로 아리 님의 옹알이를 기다리실 텐데 말이죠.”

……믿어도 되는 거 맞겠지?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입을 여는 건 처음이기에, 살짝 몸이 떨리기도 했다.

왜 내가 옹알이를 하는 것마저 이렇게 머리 굴려서 해야 하는 거야!

“바, 배려!”

……난 분명 백령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말에 익숙지 않은 내 혀는 전혀 다른 단어를 내뱉었다.

여노와 자하가 나를 바라보며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놀랐냐? 놀랐지? 난 이미 옹알이는 뗀 지 오래라구!

여노와 자하는 내 옹알이에 기뻐하는 표정인데, 백령 이 자식은 인상이 찌푸려졌다. 왜지?

“……뭐라고 하는 것인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 내가, 아리 님이 옹알이를 시작했다고! 처음으로!

“아마 ‘백령’이라고 말씀하신 거 아닐까요? 헙, 죄송합니다, 백령 님.”

여노의 말에 백령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했다.

아 씨, 여노 말 괜히 들었어. 기다리긴 개뿔. 너희가 그냥 나 세뇌한 거잖아! 내가 다신 너희 세뇌에 넘어가나 봐라.

“앗, 아리 님!”

뭐, 왜?

“백령 님은 ‘아빠’라고 부르셔야죠!”

응, 싫어.

“뿌우…….”

말랑말랑하고 푸짐한 볼을 잔뜩 부풀리며 인상을 썼다. 난 절대로 백령이라 부를 거야. 거부는 거부한다!

내 반항에 여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리 님이 왜 이러실까요?”

자하가 그때, 손바닥을 탁 치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맨날 백령 님, 백령 님하고 부르니까 아리 님도 이 호칭에 익숙해지신 거 아닐까?”

“그럼 우리부터 이제 백령 님을 ‘아빠’라고 불러 볼까요?”

요새 여노가 자하랑만 놀아서 그런가, 둘이 바보력이 점점 닮아가고 있다.

너네나 열심히 아빠라고 불러보거라.

둘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백령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만하지. 아리가 날 부르는 호칭은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렇대, 얘들아. 나 그냥 백령이라고 불러도 된대.

백령의 말에 여노와 자하의 소심한 반대가 있었지만 백령은 개의치 않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백령의 말에 활짝 웃었다. 백령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의 손길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백령이 손길을 멈추고 자하를 바라보았다.

“자하, 아루를 데려와라.”

백령의 명령에 자하가 곧바로 방을 나갔다. 이내 얼마 안 가 아루와 자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백령 님, 부르셨습니까.”

“경비가 뚫렸더군.”

“그럴 리가……. 전 아무런 기운도…….”

“누군가가 관여한 듯하니 네가 눈치 못 챈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아루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백령이 나를 조심스레 이불 위로 내려놓더니 무언가 말하려는 듯 벽에 팔짱을 끼고 기대섰다.

“미호에게서 서찰이 왔더군.”

백령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방안에 있는 모두가 백령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의회가 열린다는군.”

“하긴, 미호 님이 저번에 말했던 조건을 모두 채웠으니까요. 언제 서찰이 와도 이상할 게 없긴 했습니다.”

자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야……. 나 그럼 의회인가 뭔가 거기에 가야 하는 거야? 난 하루에 여노의 둥가둥가만 받아도 피곤해 죽겠는데?

아기의 체력을 뭘로 보는 거야! 당신들의 생각보다 더 바닥이라고!

당연히 나의 외침이 닿을 리 만무했고, 옆에 있던 아루가 입을 열었다.

“언제인지 결정되었습니까?”

“그래.”

백령이 아루의 물음에 수긍했다.

“내일.”

“……예?”

……? 뭐지? 내 귀가 이상해진 건가. 방금 뭔가를 잘 못 들은 거 같은데.

나뿐만 아니라 백령을 제외한 모두가 뇌에 정지라도 온 듯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한 2초쯤 지났을까, 아루가 백령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내일, 말입니까……?”

백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확인을 해주자,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렇게나 빨리요……?”

“아직 궁에 벌레들이 붙어 있을지 모르는데!”

“궁을 이대로 두고 의회에 참석할 순 없어요. 의회는 중앙에 위치한 미호 님의 궁에서 열리잖아요.”

나도 반대야! 너무 빠르잖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고! 미리 예고라도 해야 할 것 아니야!

모두의 반대표에 나도 하나 던져 넣었다.

“그래서 아루와 자하 중 누군가는 궁에 남아야 할 것 같다.”

백령의 말에 자하와 아루가 서로를 번갈아 보았다.

“자하가 궁에 남는답니다.”

“야, 너 죽고 싶어?”

아루의 말에 자하가 반기를 들었다.

“웃기네. 저번에 나한테 끌려온 거 기억 안 나? 넌 나한테 안 돼.”

“가짜 호랑이 주제에.”

“어디서 고양이가 우네.”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 대며 싸웠지만, 전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부분 아루의 말에 열 받은 자하의 패배로 이어졌다.

“그럼 아리 님이 선택하시는 게 어떨까요?

여노의 선견지명에 둘의 시선이 일제히 백령에게로 향했다.

“알아서 해라.”

백령의 흔쾌한 승낙에 둘이 서로 멀리 떨어져 섰다.

여노가 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다 내려놓았다.

사실 나는 이미 결정한 지 오래다. 아니, 난 사실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정한 지 오래지.

“아리 님, 저예요, 저! 자하!”

“아리 님, 여기로 오셔요.”

둘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 못 해 따가워 죽겠다. 나는 천천히 손과 발을 내딛었다.

당연히 나의 몸은 점점 아루를 향해 갔다.

미안, 자하야. 이건 본능이라 어쩔 수 없어.

자하의 귀가 축 처졌다. 꼬리도 축 처져서는 눈망울마저 가여워 보였다.

아, 이러면 흔들리는데……. 어쩔 수 없지.

“아리 님의 선택은…… 아루 님이네요.”

반전은 없었다. 흔들리기는 개뿔.

자하야, 미안한데 너와의 잠시간 이별이 너무나도 반갑다.

“이럴 리 없는데…….”

여노가 자하의 등을 토닥였다. 자하는 그렇게 충격받은 표정으로 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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