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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5)화 (5/167)

5.

시간은 무성히도 흘러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신수들의 정성스럽고 극진한 보호 아래에서 점차 자라고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몸을 기우뚱거리는 것도 손쉽게 가능해졌다. 예전의 약한 내가 아니라, 이 말이지.

물론, 아직 더럽게 약해빠진 건 맞다.

“아리 님, 조금만 더 힘내셔요!”

이름도 모를 새로운 시녀가 외쳤다.

오늘은 여노가 늦장을 부리는 모양인지, 처음 보는 시녀가 내 뒤집기를 도와주고 있었다. 말이 도와주는 거지, 그냥 열심히 노력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며 응원 중이었다.

여긴 대체 시녀가 얼마나 많길래, 아직도 매주 바뀌는 거냐구!

처음엔 시녀의 이름을 외울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너무나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끄응…….”

“조, 조금만 더!”

응차, 응차.

한 1.5초간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더 이상 몸이 기울 생각을 하지 않자,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다시 바로 뉘었다.

“푸우…….”

“아앗, 아리 님! 또 실패하셨군요…….”

이번 시녀는 좀 맘에 안 든다. 네가 뭔데 성패 여부를 판단해! 어제보다 더 열심히 했구만.

난 일부러 실패한 거야. 그럼, 그럼.

내 첫 뒤집기를 너한테 보여줄 순 없다, 이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요즈음 백령을 본 적이 없다. 내 뒤집기도 보러 오지 않다니, 이런 무심한 녀석.

시녀와 일방적인 실랑이를 벌인 후, 얼마 안 가 여노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여노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지친 기색이 가득한 게, 한바탕 싸움이라도 하고 온 것만 같았다.

“아, 여노 님……. 무사하셨군요.”

“다행히. 그런데 곧 아루 님이 오실 것 같아.”

“네, 네? 아루 님이요?”

시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당혹함으로 물들었다. 여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내게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황급히 방을 나갔다.

아루? 아루라 함은 전에 수행 떠난 자하를 잡으러 갔다는 그 신수 아닌가?

근데 여기로 온다고?

갑작스러운 만남이라니, 이 무슨 말인가.

“아리 님은 저 아이가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럴 리가, 여노야. 그건 정말 크나큰 착각이란다.

“아루 님이 싫어하시거든요.”

응? 뭐를?

여노가 다행히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낯을 참 많이 가리시는 분이라서요.”

그녀가 나간 문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이내 이쪽으로 다가오는 무언의 기운이 느껴졌다. 또한 자하의 기운도 함께 섞여 느껴졌다.

기운의 주인공을 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기운을 느낀 지 얼마 되지 않아 문 앞에 나타났으니까.

“오셨습니까, 아루 님.”

아루라는 자는 백령과 매우 흡사한 모양의 귀를 가지고 있었으며, 붉은빛이 감도는 연한 주황빛의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의 머리칼은 황혼을 연상시켰다. 서기 어린 흑색 눈은 그의 인상을 날카롭게 만들어 주었다.

“여노, 고생이 많아.”

“……아루 님이야말로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여노가 아루의 밑 쪽을 흘기더니 조심스레 답했다.

아쉽게도 여노가 흘긴 방향을 보기에 아기인 나의 시야는 매우 좁았다.

나도 볼래, 나도!

그렇게 시야를 넓히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을 때 즈음, 너무나도 오랜만이지만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루, 너 이 자식! 이거 안 놔?”

……아.

순식간에 몸에 힘이 쭈욱, 하고 빠졌다. 아루가 뭔가를 손에 질질 끌고 왔다 했더니, ……그게 자하였나보다.

“아악! 너, 아리 님 앞에서 이런 망신을 주다니, 얼른 안 놔?”

걱정하지 마, 자하야. 내 좁은 시야는 널 향해 있지 않단다. 굳이 너를 보기 위해 내 시야를 넓힐 필요성을 못 느끼겠어.

밑을 내려다보는 아루의 표정에는 짜증이 역력했다.

“그러게 좀 곱게 쳐 오지, 너 때문에 얼마나 시간을 낭비했는지 알아? 여노도 난리 치는 너 때문에 피곤해하잖아.”

여노가 오늘따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것은 자하의 공이었구나. 쯔쯧, 불쌍한 여노.

“그럼 그냥 날 내버려 두지, 왜 끌고 오냐고! 너도 막 싸돌아다니면서!”

“야, 그건 내 일인 거고. 너도 백령 님한테 말해서 정찰하는 일 하던가. 나도 아리 님 호위하는 일 하고 싶다.”

아루의 말에 여노가 맞장구쳤다.

“아루 님이라면 이쪽 일도 잘하실 거 같아요.”

여노의 말을 들은 자하의 귀가 빳빳하게 올라갔다.

“뭐? 이건 내 일이야! 어디서 수작질이야! 넘볼 걸 넘봐야지. 그리고 여노 너, 섭섭하게 왜 그러냐.”

자하가 난리를 치며 항의하자, 아루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왜 아리 님 곁을 지키지 않고 싸돌아다녀?”

아루의 물음에 자하가 코웃음을 쳤다.

“허, 무슨 소리! 난 원래 수행하고 이맘때 즈음 슬슬 돌아오려고 했거든?”

“그래, 그럼 이제부터 궁에 잘 붙어 있으면 되겠네.”

“당연하지. 원래 오늘부터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을 예정이었어.”

뭐? 뭐처럼 붙어 있어?

앞으로 자하가 내 곁에 붙어 있는다고? 이건 악몽인가?

자하가 말을 마치고는 팔짱을 끼며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난 이 좁은 시야로 봤다. 여노가 아루에게 엄지를 척, 하고 세우는 광경을.

너희들, 다 짜고 친 거구나. 딱 걸렸어.

걸렸다 한들, 말도 못 하는 나는 잔혹하게도 자하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를 수행 보낼 수 없었다.

원통하다, 원통해! 진짜 말도 못 하고 서러워 죽겠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노와 아루는 흡족해하는 듯 보였다.

문 앞에 팔짱을 끼고 영역표시를 하는 자하를 제쳐두고, 아루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요놈……. 참 잘생겼다.

물론, 백령만큼은 아니지만.

“아리 님, 이제야 인사를 드리는 저를 용서하세요.”

아니, 용서 못 해. 돌아가.

너 때문에 자하가 이제 내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겠다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아리 님의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

“이해하세요, 아루 님. 곧 현실을 받아들일 겁니다.”

아루가 여노의 말을 이해 못 한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노, 너는 내가 자하 귀찮아하는 거 알면서! 또 괘씸죄야, 여노!

“아, 미리 말씀드립니다. 아리 님.”

나의 좋지 못한 표정에도 아루는 싱긋 웃었다.

“전 백령 님 같은 호랑이가 아니고, 아무르 표범이에요.”

……응? 어쩐지, 백령과는 뭔가 좀 다르다 했더니. 표범이었구나.

“아리 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니, 돌아가. 잘 부탁드리고 싶거든 자하 놈 다시 데려가라고!

점점 험악해지는 내 표정에 여노가 할 수 없다는 듯 아루에게 무언가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종이를 읽은 아루는 아, 하는 탄식을 내뱉더니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다시 한번 날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

“자하가 괴롭히면 말해요. 혼내줄게요.”

아니, 뭐…… 괴롭히진 않는데 내 심기를 거스르긴 하지. 너무 날 피곤하게 만들어.

뭐, 그래도 말이라도 저렇게 하니 그만 인상을 풀었다.

“백령 님의 아이라 그런가, 아리 님은 아기인데도 말을 곧잘 알아듣네요. 신기하다.”

“설마요. 아리 님이 눈치가 좀 빠르긴 하시지만 아마 저희의 어감이나 행동을 보고 예측하시는 거겠지요.”

흠흠. 그렇지, 우리 여노. 말 잘한다.

순간 내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점점 강하게 다가오는 이 기운은, 틀림없는 백령의 기운이기에.

내가 기운을 느끼자마자 낮고 위엄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루, 돌아왔군.”

백령을 본 모두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밖에서 헛짓을 하던 자하도 예외는 없다는 듯 모두의 근처로 왔다.

“죄송합니다, 백령 님. 자하를 데리고 아리 님 곁에 가져다 놓느라……. 백령 님께 먼저 인사를 올렸어야 했는데…….”

“그럴 필요 없다.”

아루가 자하를 물건 취급을 했지만, 백령 앞이라 그런지 자하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자하.”

백령이 자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자하는 입을 꾹 닫고 그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땅만 바라보았다.

“본분을 잊은 거냐? 아니면 내 명이 명 같지 않은 것이냐. 아리 곁을 떠나지 말라 했을 텐데.”

백령의 주위에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방안은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되었고, 자하의 짧은 꼬리가 작게나마 떨렸다.

자하가 진심으로 떨고 있었다. 마치 백령의 화난 모습을 처음 본다는 듯이.

백령이 그의 모습을 보더니 뒤돌아 밖으로 향했다.

뭐? 벌써 가?

오랜만에 본 백령을 저렇게 보낼 순 없었다.

허리에 힘을 힘껏 주었다. 오른쪽 어깨를 살짝 들고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끙차!

몸을 힘껏 움직여 몸을 뒤집었다. 나조차도 이 뒤집기가 성공할 줄 몰랐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내가 누워 있는 이 이불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내 몸이 그대로 힘없이 미끄러져 버렸다.

어어……?

뒤집기를 성공한 기쁨도 잠시, 바닥이랑 코 박고 인사하게 생겼다.

눈을 질끈 감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바닥에 콩, 하는 아픔 대신 내가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것만 같았다.

눈을 서서히 뜨자 보이는 백령의 얼굴에 백령의 품에 안겨 있단 걸 알 수 있었다.

백령 덕분에 바닥과 인사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웃음이 환히 지어졌다. 백령은 그저 무심히 날 내려놓았다.

“이불을 바꿔야 할 것 같군, 여노.”

멍하니 있던 여노가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숙였다.

“네, 백령 님. 죄송합니다.”

여노가 당장 나의 몸을 살폈다.

나 다친 데 없어, 여노야.

그런데 나 뒤집기 성공했는데 아무도 칭찬 안 해줘?

여노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리 님, 이불을 좀 더 넓고 빳빳한 거로 바꿔 드려야겠군요. 기특하십니다.”

……역시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여노 뿐이구나. 여노, 괘씸죄 취소해줄게.

백령, 너는 인간적으로, 아니 동물적, 아니, 신수적으로 나 좀 칭찬해줘야 마땅하지만, 바닥이랑 인사하는 거 막아줬으니까 인정.

백령은 다행히 날 빤히 바라볼 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뭐, 그것만으로도 난 만족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백령이 발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려던 백령은 뒤를 돌아 아루와 눈을 맞췄다.

“아루.”

“네, 백령 님.”

아루가 곧장 답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 있는 편이 좋겠군.”

“하지만 아직 정찰이…….”

백령이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가 천천히 걸어 나가면서 입을 열었다.

“잔챙이들이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기웃거리는군.”

백령의 말이 마치자, 아루가 고개를 숙였다.

“백령 님의 명, 받들겠습니다.”

백령이 떠나자 아루가 무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노가 어두운 표정으로 아루를 바라보았다.

“아루 님, 그렇다는 건…….”

“다음 의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아리 님을 노리고 있는 벌레들이 궁에 들어와 있다 봐야지.”

“큰일이네요. 어쩐지 오늘따라 자하 님의 부재에 크게 화를 내시더니.”

“여태껏 백령 님 혼자서 처리하셨겠군.”

그래서 요즈음 백령이 코빼기도 안 보였던 거구나…….

자하는 둘의 대화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축 처져 있었다.

“벌레들이, 박멸이라도 당하고 싶나 보네.”

아루는 그 말을 끝으로 내게 짧은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남은 건 나와 여노, 여전히 저기압인 자하 뿐이었다. 자하는 멍해 보이기도 했고, 누구보다도 심각해 보이기도 했다.

여노가 자하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금이라도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자하 님.”

“난…….”

자하의 공허한 표정에 나마저 침울해졌다. 어쩐 지 자하가 정말로 슬퍼하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군.

허리에 힘을 다시 한번 빡, 줬다. 한 번 해본 뒤집기는 이미 터득한 지 오래라구.

이번엔 다행히 미끄러지진 않았다. 하지만 자하는 혹시나 내가 미끄러질까 싶어 바로 내 몸을 붙잡았다.

흥, 이거 진짜 비싼 건데 특별히 한 번 해준다.

자하를 보며 미소를 짓자, 그제야 자하를 뒤덮던 먹구름이 사라졌다.

“평생을 이 한 몸 바쳐 지켜드리겠습니다. 절대로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게요.”

올렸던 입꼬리를 재빨리 원위치로 이동시켰다.

아니, 그딴 건 필요 없어, 돌아가. 진짜, 정말, 눈곱만큼도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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