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하는 고개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고양잇과라 그런가, 이놈이 왜 귀여워 보이지?
아아, 아니야, 아리야. 정신 차리자. 저 모습에 홀리면 안 돼.
자하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제 본 모습이에요, 아리 님. 다음에 볼 땐 놀라지 마셔요.”
그럼 네가 없는 척하지 말던가. 모든 것이 다 너의 죄다.
내가 노려보거나 말거나 자하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리 님도 크시면서 차차 알게 되시겠지만 신수는 본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요.”
그래서 여노와 시녀들의 본모습을 난 본 적이 없는 거구나.
자하의 말을 듣고 기억을 곰곰이 살펴보았지만, 백령의 호랑이 모습과 자하의 현재 모습 빼고는 신수들의 본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백령 님같이 초월적으로 강한 신수들은 본모습이 더 강하고 위엄 있어요. 그래서 대개 초월적인 신수들은 본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많죠. 백령 님은 절대 보여주지 않으시지만.”
확실히 완전한 호랑이 모습을 한 백령은 훨씬 크고 무서웠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하의 말대로 위엄있는 자태로 보이기도 한다.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신수 또한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여노와 같은 신수들은 본모습이 많이 약하거든요. 물론 저는 둘 다 세요!”
본인이 어느 정도 위치가 있는 신수라는 걸 강조하는 자하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너한테 요만큼의 관심도 없어, 자하야.
반은 유익하고 반은 쓸데없는 정보를 들었다. 대체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그래도 대부분의 신수는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죠. 저도 아리 님에게 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시녀들을 물렸는걸요.”
자하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반대로 내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아아, 그러니까 이게 다 네 짓이라는 거지?
여노를 포함한 시녀들이 없는 게 네 짓이라는 거지?
네가 네 죄를 알렸다.
내가 눈 떴을 때 여노한테 둥개둥개를 못 받은 것도, 지금까지 맘마를 못 먹고 있는 것도, 아무도 없어서 벌벌 떨게 만든 것도 다 자하 네가 한 짓이라는 거지?
백령 오면 넌 죽었어. 백령이 내 울음소리를 얼마나 싫어하는데.
……일단 지금은 눈물이 말라서 안 되지만 두고 보자.
“백령 님의 아이라는 것만으로 제가 아리 님을 섬길 이유는 충분해요. 그렇기에 이 모습을 아리 님에게 보여드려요.”
자하가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래, 뭐 결과가 어찌 되었든 의도는 좋은 행동이었던 거구나. 오늘만은 특별히 봐주마.
그런데 이 녀석이 얼마 안 가 스라소니의 모습으로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한다.
“백령 님이…… 훌쩍, 저한테 아무런 언질도 없이…….”
이 말을 시작으로 자하는 하루종일 언질 타령을 하기 시작했다.
아, 백령……. 언제 와……. 너 진짜 백령 오면 죽었어.
자하의 훌쩍임은 신기하게도 내 눈물샘 장전에 큰 공을 기여했다. 이제 백령만 오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 백령아, 제발 좀 와 줘.
“저랑. 흑, 백령 님은…… 겨우 그 정도…… 흑, 평생을 백령 님께 이 한 몸 바치겠다 맹세했는데…….”
그걸 왜 나한테 와서 말하냐고! 제발 백령한테 가서 하라고! 아니면 네 방 가서 처박혀서 울던가!
내 짜증이 극에 치달을 때였다.
흠칫.
구슬의 힘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어느 정도 느껴진다. 백령의 기운이. 나는 모인 눈물샘을 터트릴 준비를 했다.
하나.
둘.
셋.
드르륵.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내 울음보도 아주 정확히 터져 주었다.
“으아아앙!!!”
“아, 아리 님……?”
자하가 갑작스러운 내 울음에 백령과 나를 번갈아 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나를 달래려 하고 있었다.
흥, 소용없어. 이미 넌 끝났다.
“자하.”
백령이 특유의 무미건조한 눈으로 자하를 노려보았다. 스라소니의 모습을 한 자하의 눈과 꼬리가 쳐지며 억울한 표정이 지어 졌지만 백령에게 먹힐 리 만무했다.
그렇게 자하는 백령의 힘에 쫓겨났……아니, 정확히는 날아갔다. 날아가면서 자하는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령 님, 전 억울합니다요오오오!”
흥,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자하.
자하가 없으니 1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느낌에 자동으로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고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을 본 백령이 의아하다는 듯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웃기도 하는군.”
백령을 올려다보았다. 백령의 시선은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백령에게 물려와서 눈을 뜬 순간부터 지금까지 웃은 적이 없었다.
이게 다 자하 때문이야.
“자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그의 말에 잠시간 자하에 대해서 생각했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딱히 대답을 바라고 내게 물은 것 같지는 않았기에. 아마 그의 혼잣말이 아닐까.
자하 놈 덕분에 어느새 시간이 지나 창밖의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달빛에 감싸진 백령의 모습은 가히 아름다웠다.
세상에 저만큼 달빛이 잘 어울리는 생명체가 또 있을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존재할 리 없다. 백령의 보석같이 빛나는 저 푸른 빛을 부정할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을 거야. 그렇고말고.
처음엔 저 눈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꼼짝없이 잡아먹히는 줄로만 알았다. 갑자기 그의 딸내미가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고.
그의 딸이 된 후, 많은 신수들에게 공주 취급을 받게 될 줄 또한 상상도 못 했다.
특히 자하와 여노는 내게 성심성의껏 충심을 다하고 있으니, 뭔가 속이는 기분이라 찝찝한 건 어쩔 수 없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자하나 여노나, 나를 백령 님의 ‘숨겨둔 아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 보면 그들은 내가 정말 백령의 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잠깐, 근데 난 호랑이가 아니잖아.
내게는 호랑이의 귀도 없고, 꼬리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내가 백령의 딸이라고 단정 짓고 충심을 맹세하는 거지?
진짜 내가 말만 할 수 있었어도…….
어디다 묻지도 못하는 이 몸뚱아리는 어디다 갖다 쓰란 말인가. 답답해 죽겠다.
“뿌우…….”
백령의 시선이 창밖에서 떨어지고 드디어 나를 향했다.
“기절해 있었을 땐 악몽도 꾸더니 이제 괜찮은가 보군.”
기절? 악몽?
아, 혹시 내가 이상한 꿈을 꿨던 그때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그때 칭얼거리며 깜짝깜짝 깨기도 했던 것 같다.
그때마다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다. 따뜻하고 청량한, 마음이 놓이는 손길.
그래, 그건 백령의 손이었어.
그래서였을까, 백령의 손길이 익숙하다 느껴지고 싫지 않았던 게.
백령의 손이 나를 향했다. 한쪽 손으로 내 볼을 어루만지는 백령을 보며 기분이 묘했다.
그가 이번엔 나의 작은 손을 어루만졌다.
“아직 많이 작군.”
예? 백령 씨? 저 지금 당연히 한창 작을 때거든요?
‘아직’이라니, 이 호랑이 육아 안 해본 거 티 팍팍 내네.
태어나고 눈 뜬 지 한 달도 안 된 거 같은데 대체 뭘 원하는 거야!
“얼른 크거라.”
그가 내 마음의 소리라도 들은 건지, 원하는 걸 곧장 말했다.
그가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 또한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의 큰 눈은 오롯이 백령만을 담고 있었다. 그의 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의 눈이 참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이내 백령의 푸른 빛이 나와 백령을 감쌌다. 푸른 빛은 아지랑이처럼 흩어져 나와 백령 주위를 맴돌았다. 꼭, 무언가를 공유하는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백령의 푸른 빛이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아까까지 품고 있었던 의문이 서서히 풀렸다. 방금까지 느꼈던 허기진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고, 백령의 기운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게 느껴졌다.
백령의 기(氣)가 내게로 들어온 것이다.
이래서 모두 내가 백령의 아이인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의심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내게서, 다른 누구도 아닌 백령의 기운이 느껴지니까.
백령이 준비해 놓는다던 내게 준 식사, 그것 또한 백령의 기(氣)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나와 백령을 감싼 푸른 빛이 점차 흐려지고, 백령이 아까의 말을 잇듯, 입을 열었다.
“그래야 내 널 보내줄 수 있지 않겠느냐.”
백령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백령이 남겨놓고 나간 한 마디는 내게 많은 혼란을 줬다.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나고 숲에 버려져 있는 채로 깨어났다. 갑자기 나타나서 날 물어올 땐 언제고, 그는 지금 어찌 보면 날 키워주고 있다.
키워서 먹겠다도 아니고, 키워서 노예로 부리는 것도 아니고, 키워서 고이 보내준다고?
게다가 난 잘 모르지만 미호가 내게 준 구슬은 신수들조차도 매우 탐내는 것. 절대적인 권능이라 하였으니까.
근데 날……그냥 보낸다고?
난 안심을 해야 하는 게 맞았다. 머릿속으로 춤이라도 추고 있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지금의 난 춤은커녕 그에게 너무 섭섭했다.
그가 떠난 곳에는 은은한 달빛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마음이 더욱 복잡해지고, 기분이 이상했다.
두 번 버림당한 더러운 기분이었다.
***
“어머, 여노 님. 아리 님이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게 있나 봐요.”
이번에 또 바뀐 시녀가 내 뾰로통한 얼굴을 보며 기겁하며 물었다. 여노는 저번과 같이 이쪽으로 시선도 두지 않은 채 시녀에게 말했다.
“며칠째 저러고 계셔. 아리 님이 왜 이러시는지 옆에서 쭉 지켜봐 온 나도 영문을 모르겠어.”
“혹 잠자리가 안 좋은 건 아닐까요?”
“밤엔 너무 잘 주무시던걸.”
여노의 말이 맞다. 아무리 심란해도 아기에게 수면은 소중한 법.
자도 자도 오는 것이 잠이니라…….
여노의 단호한 대답에 시녀가 인상을 쓰며 머리를 굴렸다.
“시장하신 건 아니신지…….”
“아까 남김없이 드셨어.”
이번에도 여노의 단호한 대답에, 시녀가 탄식을 내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흠흠, 그게 백령의 기(氣)라는 걸 알게 된 후 아주 잘근잘근 씹어 먹고 싶더라.
시녀는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더니 아차, 하는 표정으로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혹시 자하 님이라도 다녀가신 거 아닐까요? 자하 님이 아리 님한테 엄청 미움받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요.”
여노가 시녀의 물음에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했다.
“그것도 아니야. 근데 너 자하 님 앞에선 절대 아리 님한테 미움받니, 어쩌니 하지 마. 아니, 그냥 아리 님에 대해서 언급 자체를 아예 하지 마.”
시녀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갸우뚱했다.
“왜요?”
“저번에 아리 님을 한바탕 울린 탓에 하늘 구경 좀 하시고 나서 울부짖으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으러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수행을 떠났다고 하더라.”
“……예?”
“그래서 아루 님이 데리러 가셨대.”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면서요……?”
“응. 그런데 아루 님은 아시나 보더라.”
뭐? 이건 처음 듣는 싱싱한 정보다. 이러니 내가 자하한테 좀 너무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에잇, 아니야. 그때를 다시 떠올리면 아주 치가 떨린다, 치가 떨려.
자하의 푸념을 떠올린 내 인상은 험악해졌다.
내 표정을 본 여노와 시녀들은 자하의 얘긴 이만 접어두고 본론으로 다시 돌아왔다.
“아리 님이 왜 이러실까요……?”
“글쎄다. 나도 아리 님 기분이 나아지시면 좋겠는데…….”
여노와 시녀는 나의 언짢은 기분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토론을 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얘기들을 듣다 지친 나는 그동안 계속 복잡한 마음을 곱씹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다.
내가 이 생활에 너무 안락함을 느끼고 있어서 떠나기 싫은 게 틀림없다.
가만히 있으면 여노가 밥도 주고, 시녀들이 수발도 들어 주고 둥개둥개도 해주는데, 떠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나는 분명 여길 떠나기 싫은 게야. 그래서 백령에게 섭섭한 게 틀림없다.
작은 고개를 있는 힘껏, 세차게 끄덕였다. 그래봤자 힘도 없고 세차지도 않지마는.
아무튼, 이런 내게 독립을 권하다니.
난 절대로, 독립하지 않을 것이다, 백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