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을 열고 들어온 자하의 생김새는 생소했다.
얼핏 보면 고양이와 비슷한 뾰족한 귀가 솟아 있었고, 짙은 노란 눈망울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탁한 녹황색의 머리칼이 그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백령보다 약간 작은 키를 가진, 외모로만 보면 정말 아름다운 남자였다.
“자하 님, 오셨습니까.”
여노가 고개를 살짝 숙여 정중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여노가 고개를 숙이자 옆에 있던 시녀도 함께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여어, 여노 오랜만이다.”
“의회에 참석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의회란 단어에 자하의 귀가 축 늘어지더니 그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렸다.
여노는 더 이상 의회에 관해 묻지 않았고, 옆에 있던 시녀가 준비해둔 비단 손수건을 자하한테 건넸다.
한동안 조용히 우느라 아무 말도 않던 자하는 갖다 준 10장의 손수건을 다 쓴 후에야 입이 열렸다.
“훌쩍, 손수건, 더 없냐?”
또다시 훌쩍거리느라 찾아온 잠깐의 침묵을 깬 건 나를 흘끗 바라보더니 충격받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연 자하였다.
“나…… 백령 님한테 아이가 있는 줄 몰랐어.”
“그야 백령 님 명으로 바로 의회에 참석하셨으니깐요.”
“어떻게…… 백령 님이…… 나한테 한마디 언질도 없이…….”
“북쪽 영토에 한 판 하러 가셨을 때도 모르고 푹 주무셨던 분한테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여노의 말에 축 처져 있던 자하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럴 수가…… 하지만 백령 님이 그때도 나한테 한마디 언질도 주지 않으시고…….”
“그 정도인가 보죠.”
“뭐, 뭐가?”
“백령 님과 자하 님의 관계요.”
여노의 직언에 자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내 자하의 귀가 또다시 축 처졌다.
“백령 님!!! 흐엉.”
갑자기 백령을 찾으며 울어 재끼는 자하 탓에 여노가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여노가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여노야. 내 귀는?
자하의 울음소리에 짜증이 난 나는 안 그래도 자지 못해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씨, 너만 울 줄 아냐? 나도 울 거다.
힘껏 눈살을 찡그리고 눈물을 끌어모았다. 다들 자하의 흐느낌에 정신이 없어 내 쪽으로 시선을 두는 이는 없었다.
결국 내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우…… 으아아앙!!!”
언제 들어도 우렁찬 내 울음소리에 자하의 흐느낌이 뚝 그쳤다. 여노가 황급히 달려와 나를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여노, 너는 괘씸죄야.
여노가 달랬지만 나는 일부러 더욱 세게 울었다. 안 그래도 졸려 죽겠는데 자꾸 짜증 나게 한 건 아무리 봐주려야 봐줄 수 없었다.
자하도 어느샌가 와서 발만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너도 괘씸죄야, 인마.
“아기님, 제가 잘못했어요. 그만 울음을 그쳐요, 네?”
여노가 내게 재빨리 애원했지만 그래도 이미 늦었다. 쌓일 대로 쌓인 내 짜증은 나도 이미 말릴 수가 없다.
얼마나 울었을까, 이제 나도 목 아파서 더 이상 울기 싫은데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 부산하게 움직이던 주위가 조용해졌다.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에 눈물이 범벅된 눈을 떴다.
“배, 백령 님!”
나를 안고 있는 여노를 포함한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많이 시끄럽더군.”
“제 불찰입니다.”
백령의 말에 여노가 급히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백령은 아무 대답 없이 여노가 안고 있던 내 몸을 자신에게로 옮겼다.
이상하게 백령의 손길이 닿자 울음이 저절로 멈췄고, 백령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아름답고 고귀한 푸른 눈은 여전했다. 한동안 그렇게 나는 백령을 바라보았다.
여노가 예전에 다른 시녀에게 ‘본래 모습의 백령 님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모습이 아닌, 완전한 호랑이의 모습이 백령의 원래 모습인 것 같았다.
대부분의 신수는 인간형을 하고 있었다. 지금 나를 안고 있는 백령도.
호랑이의 모습이 아닌 인간형의 백령을 자세히 보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푸른 빛의 은발은 그의 신비로움을 나타냈고 날카로운 턱선과 눈매는 그의 위엄을 담아냈다.
다른 신수들과는 확실히 태가 달랐다. 여노와 자하도 아름다웠지만 백령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울음이 완전히 멈추고 진정이 되자 백령이 비단 이불 위로 나를 내려놓았다.
잠깐만, 왜 벌써 내려놔!
“뿌우…….”
힘껏 볼을 부풀려 보았지만 백령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여노가 백령의 심기를 살피더니 이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백령 님.”
여노의 말에 백령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 숙이고 있는 자하를 바라볼 뿐.
“자하.”
백령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면목 없습니다, 백령 님. 어린아이는 처음 보는지라…….”
“두 번의 실수는 없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백령 님.”
그제야 방 안에 감돌던 긴장감이 수그러들었다. 그 사이에 여노는 부드러운 재질의 손수건으로 나의 눈가를 살살 닦아주고 있었다.
백령은 내 쪽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자하는 백령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그런데 백령 님.”
백령이 자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자하가 나를 바라보며 백령에게 물었다.
“아기님의 존함이 무엇인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여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백령에게 조심스레 의견을 보냈다.
“계속 아기님이라 칭하는 건 아기님에게도 별로 좋지 않을 듯해요.”
여노의 말에 백령이 다시 시선을 내 쪽으로 고정했다.
한동안 백령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더 이상 백령에게 무어라 묻지 않았고, 시간만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아리.”
“네?”
오랜 침묵을 깬 건 백령의 대답이었다. 백령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아이의 이름은, 아리로 하지.”
아리……, 아리라……. 뭐, 나쁘지만은 않다.
백령이 지어준 이름에 나름 만족했다. 좋아, 앞으로 내 이름은 아리다.
“예쁜 이름이에요.”
여노가 나에게 시선을 둔 채 백령이 지은 이름을 칭찬했다.
백령은 여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식이! 칭찬을 들었으면 고맙단 말을 해야지!
좀 세다고 여노의 칭찬을 무시하다니. 여노는 이미 익숙한 거 같지만.
“아……. 그러고 보니 백령 님, 아까 말하는 걸 잊어버렸었는데…….”
자하가 우물쭈물하자 백령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그게…….”
자하는 뜸 들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조만간 의회가 또 열린다고 합니다.”
“예상대로군.”
백령이 별일 아니라는 듯 넘겼다. 자하가 머리를 긁적이며 한마디를 더 남겼다.
“다음 의회에는, 아기님. 아니, 아리 님도 함께 참석해야 한답니다.”
뭐? 나? 아리면 나 말이야? 나 말고 아리라는 이름을 가진 아기가 또 있는 거지? 그렇다고 해줘.
백령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마 나도 지금 백령과 같은 표정이지 않을까. 백령도 이건 예상 못 한 일인 듯하다. 백령이 팔짱을 끼며 벽에 기대섰다.
“날짜는?”
백령의 말에 자하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동안 우물쭈물하던 자하가 곧 입을 열었다.
“저어……. 저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미호 님이 말하길…….”
자하가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아리 님이 뒤집기를 하고 사족보행을 할 수 있을 때부터. 라고 하셨습니다.”
자하의 말을 알아들은 건 백령과 여노뿐인 듯했다. 여노는 그저 날 바라보며 둥개둥개 해주고 있을 뿐이었고 백령은,
“노망난 여우가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가 없군.”
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백령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에게로 다가왔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군.”
벌써 가다니. 바쁜 척하기는!
“뿌우…….”
최대한 볼을 부풀렸다. 손가락으로 누군가 내 볼을 누른다면, 바로 터져버릴 만큼 크게 부풀려졌다.
모르겠다. 백령이 이제 간다니까 갑자기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백령의 커다란 손이 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백령의 청량한 향이 느껴졌다. 시원하고 또, 따뜻했다.
“아리 님이 백령 님을 정말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여노가 미소를 지으며 백령에게 말했다.
뭐? 내가 백령을 좋아한다고? 날 물어온 저 사악한 놈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과적으로 물려온 건 좋은 일이었긴 했다.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지. 그래, 호랑이한테 물려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니까.
물론, 난 정신 차려보니 딸내미가 돼 있는 거지만.
“밤에 다시 오지.”
다시…… 온다고?
백령의 말에 묘하게 안심이 되며 피로가 몰려왔다. 낮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몸도 멋대로 안 움직여졌다.
아기에게 낮잠은 중요한 거구나…….
백령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면서 눈이 완전히 감기게 되었다.
원래 낮잠을 자면 한두 시간 정도 후에 항상 깼다. 그런데 많이 피곤했던 탓인지 이번에 일어났을 땐 저녁 즈음이었다. 어두워진 방안을 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아까 엄청나게 울어대긴 했지…….
아직도 눈이 뻐근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좀 달랐다.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할 여노가 없었다.
작은 고개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움직이지 못하는 내 시야는 매우 좁았고, 시야 안에는 일단 누군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뿌우…….”
나 배고픈데…….
“으이!”
한 번 더 울어야 여노가 오려나…….
아까 많이 울어서 그런지 눈물이 쉽사리 맺히지 않았다.
난 언제쯤 움직일 수 있으려나…….
아기의 몸은 상당히 불편하다. 거동도 제대로 못 하고, 작고, 힘도 약하고. 나도 내 발로 이 방을 나가보고 싶단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이불을 탕탕 쳤다.
배고파!!!
부스럭.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아무도 없었는데?
가슴이 쿵쿵, 뛰었다.
설마…… 귀신? 에이, 아니겠지.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근데 신수도 있는데……. 귀신도 존재할 수도 있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빳빳하게 돌렸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아까 실종된 것 같던 눈물이 그렁그렁 모이기 시작했다.
질끈 감은 눈을 천천히, 조금만 떠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바람 소리였나 보다.
안심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리 님, 깨셨어요?”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빗나갔다.
히익!
아무리 익숙한 목소리라도 갑자기 들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곧이어 목소리의 정체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웬 맹수 한 마리가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커다란 맹수가 내 방 안에 있어?
“우으…….”
너무 놀라 눈물이 그렁그렁 다시 맺혔다.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았다.
그러자, 그 맹수 녀석이 더 당황해서 다급하게 입을 여는 것이 아닌가.
“아, 아리 님! 저예요, 저! 자하!”
……자하?
자하라는 말에 눈물이 쏙, 하고 들어갔다.
자하? 내가 아는 그 자하? 바보 같고 그 짜증 나던 놈?
다시 맹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고양이보다는 덩치가 훨씬 컸고, 꼬리가 짧고 뭉툭하게 생겼다.
몸에 박힌 검은 점들이 그를 더욱 맹수처럼 보이게 했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노란색을 띄고 있었지만, 목 아래부터 배 쪽의 털은 흰색으로 그를 더욱 멋스럽게 보이게 했다.
고양이는 아닌데……. 분명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동물이지?
그의 독특한 꼬리를 보았다. 뭉툭하고 짧은 꼬리의 끝은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 맞아. 스라소니!
자하의 정체는 스라소니였다. 어쩐지 아까 인간 모습일 때 고양이 귀 비스름한 걸 했던 것도 같다.
“다행히 알아보시는 것 같네요. 아기는 아직 말을 못 알아듣는 데서 혹시나 못 알아보면 어쩌나 했는데.”
그야 나는 보통 아기는 아닌 거 같으니까. 게다가 미호가 준 구슬도 있다고.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두근두근.
느껴진다, 느껴져. 구슬의 기운이! 음음!
근데 이거 지금의 나한테는 참 쓸데없다.
아차,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하 저 녀석 때문에 놀라서 간 떨어질 뻔했잖아!
최대한 눈살을 찌푸리고 자하를 노려보았다. 자하가 나의 뜨거운 눈빛에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