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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2)화 (2/167)

2.

미호의 말에 백령의 심기가 매우 불편해진 듯했다.

“헛소리가 늘었군, 미호.”

“아니, 아기는 무슨, 어린 아이도 돌본 적 없는 네가 아기 울음을 바로 멈추는 게 말이 돼?”

“…….”

살벌한 백령의 눈초리에 미호가 웃음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미호는 몇 초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의 시선에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지금 보니까 알겠는데,”

미호가 나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내 동생, 시호랑 너무 닮았어.”

미호의 시선이 나에게서 백령에게로 옮겨갔다.

“그래서 데려온 거야?”

백령이 미호의 시선을 피했다. 당황하거나, 곤란한 표정은 일절 없는 무미건조한 표정이었지만 왜인지 그가 측은해보였다.

“억측은 그만두지. 중앙 숲에 버려져 있길래 데려왔을 뿐이니까.”

거참, 말이 심하네. 버려져 있었다니! 근데 사실이라 뭐라 반박도 못하겠다.

미호의 눈이 가늘어지며 이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왜?”

“왜냐니?”

“죽을까 싶어서? 백령이? 인간을? 아니, 정확히는 타인을?”

“……그래. 이제 깨어났으니 인간에게 맡길 생각이다.”

미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백령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다시 나를 향했다. 한동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미호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긴, 신수도 아닌 애가 이 신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 없지.”

백령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마 미호의 혼잣말이라 여긴 듯하다.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열려 있는 창밖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근데 난 이 아이가 참 맘에 든단 말이지.”

미호의 칭찬 아닌 칭찬에 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 나쁘지 않아.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아, 아니, 여우인 것 같네.

미호가 들고 있던 부채를 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미호의 자색 눈이 이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백령이 창밖으로 향해 있던 시선을 미호에게로 옮겼다.

“뭐하는 거지, 미호?”

“별 거 아니야.”

아무리 봐도 별 거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기이한 광경에 손이 부르르 떨렸다. 어느 샌가 백령의 손은 다시 내 머리 위에 놓여져 있었다.

미호에게서 환한 붉은 빛이 새어나왔다. 한동안 빛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눈이 아파와, 찡그리자 백령이 손으로 시야를 차단해 주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갔다.

미호의 눈이 본래의 자색으로 돌아오고, 그녀의 손에 모여든 희미한 빛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빛은 사그라들었다. 미호가 천천히 손을 펴자, 푸른 빛깔의 구슬이 생겨났다.

“미호, 설마…….”

백령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 미호는 구슬을 내 쪽으로 가져다 대었다.

따뜻한 빛이 내 작은 몸을 감싸고, 이내 구슬의 형태가 사라졌다. 하지만 이 작은 몸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내 몸 어딘가가 아주 많이 달라져 이질감이 든다는 것을.

구슬이……내 안에 있어.

구슬이라는 형태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힘의 응어리가 느껴지기에 어림짐작할 뿐.

그런데 많은 감각이 좀 더 예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밖의 새소리라던가, 물소리라던가. 옆에 잔뜩 화가 난 백령의 푸른 기운 또한 잘 느껴지고, 보이기 시작했다.

“미호, 오래 살아서 생을 마감하고 싶나보군.”

잔뜩 화가 난 백령의 낮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럼에도 미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여유로웠다.

“네가 화난 이유는 알겠는데, 어쨌든 이 아이가 용케 안 죽고 구슬의 힘을 버텼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살 거란 확신이 없었단 소리로 들리는군.”

“당연하지. 보통 인간이었다면 죽는 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보이는 대로 살아 있고. 결과가 중요한 거 아니겠어?”

미호의 태연한 반응에 백령이 혀를 찼다.

“그 구슬은 시호의 구슬인가.”

“그래. 시호의 두 개의 구슬 중 하나. 왠지 이 아이에게 줘야 할 거 같았어.”

“웃기는군.”

여전히 그의 화는 사그라지지 않았고, 난 여전히 둘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눈만 끔뻑 끔뻑 거렸다.

방 안에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덕분에 작은 머리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그러니까, 결론은 미호의 동생이라는 분의 구슬이 나한테 있다는 거지?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생각을 다 정리하기도 전에 미호가 다시 부채를 턱에 가져다대고 눈웃음을 지었다.

“원래 이 구슬을 두고 논쟁이 많았어. 그래서 이번 의회가 열리는 날, 동서남북 영토의 주인 중 한 명에게 권능을 넘겨주기로 했었지.”

“……뭐?”

“구슬이 동쪽 땅에 발을 내렸으니, 지금 기운을 느낀 다른 영토들은 난리가 났겠군.”

“필요 없다. 다시 도로 가져가라.”

백령이 잔뜩 화가 난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미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절대자의 권능을 포기한다고? 구슬의 힘을 받았다면 인간이라도 신수와 같은 기운을 내고 이 땅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데.”

“그딴 거 필요 없다.”

백령의 굳은 거절에도 불구하고 미호는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이건 내 구슬이 아니라 시호의 구슬이야. 한 번 넘겨준 권능은 본인이 아닌 이상 도로 가져올 수 없어.”

“가져가라. 아니면 갖다 버린다.”

뭐? 나도 버려? 그거 참 좋은 생각이야, 호랑이야. 내게 자유를 줘!

미호가 갑자기 날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미호가 티 나게 무거운 입을 열었다.

“다른 영토 신수들의 손에 이 아이가 넘어간다면…… 이 아이, 무사하지만은 못할 거야. 영혼을 갈라서 억지로라도 구슬을 꺼내고 말겠지. 그래봤자, 구슬을 가질 수 없겠지만.”

……호랑아, 나 버리지 마……. 내가 잘할게.

아무리 버림받은 인생이라고 해도, 벌써부터 다음 생을 기약하고 싶지는 않다.

백령이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이때다 싶어 최대한 불쌍하고 처량한 눈짓을 보냈다. 이게 안 통하면 넌 진짜 사람도 아니…… 아, 아니, 호랑이도 아니다!

백령의 모습을 지켜보던 미호가 팔짱을 끼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억지 부리지 마. 육아에 재능도 있어 보이던데, 이참에 딸내미라도 키우는 심정으로 한번 잘 키워봐.”

맞아, 맞아. 억지 부리지 마, 호랑아. 앞으로 잘 부탁해.

이미 맘속으로 백령이 나를 잡아먹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잡아먹을 거면 진즉에 잡아먹었겠지. 암암, 그렇고말고.

백령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 미호는 재빠르게 방을 나가면서 백령의 화를 돋웠다.

“세간에는 동쪽 영토의 주인, 백령의 아이에게 구슬의 권능을 하사했다 알리지.”

미호가 가고 난 후, 뚜렷하게 기억에 남은 건 백령의 마지막 말 뿐이었다.

“여우가 노망드니 사악함이 이루 말할 수 없군.”

이 말을 할 때의 백령의 얼굴이 참 살벌했던 것도 같다.

그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구슬의 힘 때문인지, 백령은 더 이상 내가 지내고 있는 방에 주술을 걸어놓지 않았다.

즉, 백령의 ‘하인’으로 보이는 ‘아무나’가 이 방을 드나들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 아기님이 배가 고프신 가봐요. 인상이 좋지 않으셔요.”

“백령 님이 준비해놓으신 게 있을 거야. 잘 찾아봐.”

백령이 날 데려온 이곳은 그의 궁인 듯하였다.

내 인상이 좋지 않다며 오해를 하고 있는 이름 모를 시녀에게 지시를 해 저 강아지 귀를 지닌 시녀가 바깥 구경을 한 번 시켜준 적이 있었다.

백령을 닮아 푸르고 아름다운 어마어마한 면적의 궁의 풍경이 펼쳐진 덕에 알 수 있었다.

그때 떡 벌어진 작은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었지…….

내 나름의 영역 표시를 하고 뿌듯해 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며칠 지내보니 이곳의 생활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구슬 탓인지 전보다 감각이 예민하게 느껴지는 것만 제외한다면.

뭐, 그것도 이제 나름 적응된 거 같지만 말이다.

다만 문제는……, 백령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날 이후로 길다면 긴 일주일 정도가 지난 것 같지만 백령의 털 한 올조차 본 적이 없다. 이러다간 그의 얼굴마저 잊어버릴 듯하다.

진짜 물려오며 정이라도 들어버린 건지, 백령이 없으니 불안했다.

이제 그의 기운이 어느 정도 느껴져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하루종일 칭얼거려서 나도 피곤하고 나를 돌봐주는 강아지 귀를 지닌 시녀, 여노 또한 매우 피곤했을 테니까.

나를 돌보는 시녀들은 일주일마다 바뀌었는데, 유일하게 고정된 시녀가 여노였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유독 내 옆에 철거머리처럼 붙어 있다.

백령은 언제 오려나…….

“뿌우……”

이곳의 아기들이 먹는 것 같은 식사를 들이미는 시녀를 무시하곤 볼을 부풀렸다.

“여노 님, 아기님이 식사를 하시지 않는데요?”

당황한 시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여노를 찾았다. 여노는 익숙하다는 듯 이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답했다.

“그럼 그냥 내버려 둬. 백령 님이 보고 싶으신 거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 백령 님이 숨겨둔 딸이 있었다니. 게다가 미호 님이 구슬까지 하사하시고.”

“입 조심해. 백령 님한테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여노는 눈치가 참 빨랐다. 항상 상냥하지만 시녀들이 선을 넘는 발언을 한다면 가차 없이 눈빛이 돌변해 경고를 했다.

당황한 시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굴렸다. 여노는 특유의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오늘 자하 님이 돌아오시니까, 준비를 철저히 해두는 게 좋을 거야.”

“네? 자하 님이요?”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노에게 되물었다. 여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 백령 님 대리로 의회에 갔다 오셔서. 아마 앞으로 아기님의 곁을 지키지 않을까 싶어.”

자하는 또 어떤 동물일까? 여노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거 같은데, 백령의 하인들 중 한 명임에는 틀림없었다.

여노와 시녀들이 얘기하는 걸 잠깐 엿들은 적이 있었는데, 미호가 돌아가자마자 다른 영토의 신수들이 의회를 앞당겼다고 한다. 구슬의 하사에 대해 항의 하기 위한 의회를.

여노에게 들은 바로는 의회에 참석하라는 미호의 서찰이 도착하자마자 옆에 있던 자하라는 신수에게 명했다고 한다.

“자하, 네가 가라.”

그 말에 자하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의회로 향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번 의회가 대체 왜 열리는지 이유조차 몰랐으며, 아마 나의 존재 자체도 의회에 가서 처음 알았을 것이라고.

여노는 그 이후로 자하 얘기만 나오면 혀를 끌끌 찼다.

얘기만 들어보면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나보다 훨씬 불행한 인생을 사는 자 같았다. 본인을 그렇게 대하는 백령에 대한 충심이 아무리 남다르다고 해도.

여노와 시녀의 자하 얘기가 끝나고 몇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중천에 뜨고 기다리다 지쳐 낮잠 잘 시간이 되어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쯤, 여노가 시녀에게 명령했다.

“자하 님이 오신 거 같아. 준비해.”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는 자하고 나발이고 자고 싶었다. 어차피 내 얼굴 보고 다시 돌아갈 놈인데 나는 좀 자면 안 되겠니?

나 좀 재워줘, 여노야.

내 애절한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 여노는 시녀에게 지시하기 바빴다. 대강 백령바라기인 자하는 돌아오자마자 백령을 보러 갔을 것이고, 곧 여기로 쳐 들어올 테니 준비하라는 말이었다.

“일단 자하 님 오시기 전에 부족해도 비단 손수건부터 10장 챙겨……”

쾅!

여노의 말은 그렇게 끝맺지 못했다. 여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큰 소리를 내며 열린 문으로 나를 포함한 모든 이의 이목이 집중됐다.

“백령 님의 아기님을! 이 자하 님이! 모르고 있었다니!!!!!”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도 못했고, 그에 대한 정보는 주변 평판을 조금 들은 게 고작이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얘가 정상은 아닐 거란 것.

아, 차라리 백령이 너무 너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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