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이 정도 숫자면 충분하겠어. (2)
따르는 헌터들이 너무 많아지자 카오르가 지셀에게 물었다.
“부하들이 많아져서 좋긴 한데, 괜찮겠습니까? 하나같이 거친 놈들이라 다루기가 힘들 텐데.”
“너 또 쫄았어?”
“안 쫄았거든!”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래야 가죽도 빨리 수급될 거고, 나중에 다른 데 써먹기도 좋으니까. 내가 돌아가면 네가 잘 다뤄야 해.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만약 다른 일이었다면 지셀도 절대 카오르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오르도 작지만 용병단을 이끌어 보았으니, 그 경험을 믿었다.
헌터들은 용병들과 비슷하다. 오히려 용병들보다도 강자에게 더 잘 복종하는 편이다.
성질 더러운 카오르라면 헌터 수백 명 정도는 충분히 이끌 수 있을 것이다. 돈카드를 이기며 단번에 명성도 높였고, 실력도 보여 줬으니까.
과연 카오르는 콧방귀를 뀌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쇼. 내가 매일 같이 패서라도 확실하게 잡아 놓을 테니까.”
“그래, 저런 놈들은 작은 공포에는 저항하지만 거대한 공포 앞에서는 복종한다. 그걸 잊지 마라.”
그 말에 카오르는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뜻을 조금 알 거 같았다.
자신도 지금 영주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쩔쩔매며 끌려다니고 있지 않은가.
‘아오! 자존심 상해! 내가 언젠가는 꼭 복수전을 하고 만다.’
카오르는 괜히 또 씩씩거리며 의욕을 불태웠다. 길리언뿐만이 아니라 지셀도 언젠가는 꼭 뛰어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사나이의 길이 아니겠는가.
카오르가 의욕을 불태우거나 말거나 지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몬스터 웨이브가 오기 전에 처리해 둬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요새를 관리하는 튜리안의 기사를 찾아갔다.
“곧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니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시작되려면 아직 6개월 이상은 남았습니다만?”
튜리안의 기사는 삐딱한 태도를 감추지 않았다.
몬스터 웨이브의 주기는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 온 지 얼마 안 된 지셀이 저런 말을 하는 게 웃기기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셀은 자기 할 말만 전하고 돌아갔다.
“후회하지 말고 준비나 잘해. 내 말 안 듣고 후회한 사람들 많거든.”
지셀이 돌아간 뒤, 튜리안의 기사는 고민에 빠졌다.
만약 기사가 다른 왕국 사람이었다면 지셀의 말을 무시했을 것이다. ‘또 어디서 미친놈이 와서 헛소리를 하는구나.’ 하는 선에서 끝날 게 뻔했다.
하지만 튜리안의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요새까지 지어 놓고 몬스터를 막을 정도로 경계심이 많았다.
튜리안의 기사이자 요새 지휘관인 그랜트는 고민에 빠졌다.
‘온 지도 얼마 안 된 놈이다. 어디서 대충 주워듣고 헛소리를 하는 걸 거야.’
‘하지만 그간의 활약이 범상치 않아. 이곳에서 오래 있던 헌터들보다 훨씬 더 전문적이다.’
‘뭔가를 알고 있는 건가?’
몬스터 웨이브에 대비한다는 건 단순히 경계 태세만을 올리는 게 아니다. 요새는 봉쇄되고 모든 물류의 이동이 차단된다.
요새에서는 몬스터들의 부산물을 미끼로 외부의 상단을 불러들여서 경제 활동이 이루어진다. 물류 이동이 차단되면 오래 버티기가 힘들어진다.
두 번째로 왕실과 인근의 요새에 전시 체제로 들어간다고 알려야 한다. 그래야 요새가 뚫렸을 때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까지 모두 전시 체제를 준비하기 시작된다.
이런 철저한 시스템 덕분에 튜리안 왕국은 그림자 산맥의 어마어마한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헛소리였다면 엄청난 재정 손실이 발생할 거야.’
몬스터 웨이브의 주기는 거의 일정했다. 그렇기에 각 요새는 그 주기에 맞춰 계획을 짜고 준비해 왔다.
지금처럼 갑작스럽게 전시 체제로 들어가는 경우는 요새들이 지어진 뒤로는 한 번도 없었다.
미친놈 말을 듣고 혼자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부담이 컸다.
밤새 뜬눈으로 고심하던 그랜트는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휘하 기사들에게 말했다.
“……몬스터 웨이브에 대비해라.”
지셀의 말을 온전히 믿어서가 아니다. 그의 강박적인 조심성이 헛소리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게 했다.
“또한 펜리스 백작에 대한 감시도 동시에 들어가라. 만약 한 달 내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손해를 물을 것이다.”
돈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그 손해를 메꾸려면 평생 여기서 몬스터를 사냥해야 할 것이다.
그랜트가 명령을 내린 즉시 요새는 강력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요새의 입구가 봉쇄되고 헌터들의 사냥이 금지되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바쁘게 움직이며 몬스터들과 싸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옮겨라!”
“화살과 돌의 수량을 확인해!”
“오늘부터는 경계 인원을 두 배로 늘린다!”
대형 발리스타와 투석기의 점검이 이루어지고, 전략 물자들이 성벽 주변에 빼곡하게 쌓였다.
덕분에 요새 안의 도로와 여러 곳이 통제되기 시작했다. 경제 활동이 쪼그라들어 생활이 빡빡해지고 사람들의 긴장감이 올라갔다.
예상치도 못한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연히 일부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몬스터 웨이브는 아직 멀었잖아?”
“그 지셀인지 뭔지 새로 온 놈이 곧 몰려온다고 하던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놈이 그걸 어떻게 아는데?”
사냥을 못 나가게 되니 돈을 벌 수가 없다. 당연히 헌터들은 그 불만을 지셀에게 돌렸다.
하지만 지셀에게 따질 준비를 하던 그들은 그에게 찾아가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정말로 며칠 뒤 몬스터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크오오오오!
수많은 몬스터들이 종을 가리지 않고 뭉쳐서 요새로 달려왔다. 평소에는 서로 잡아먹던 놈들이 어떻게 짠 것처럼 요새 쪽으로 내려오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튜리안의 기사와 병사들이 모두 요새의 성벽으로 몰려들었다.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과 요새는 운명공동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된 이상 도망갈 수도 없었다.
몬스터들의 수는 언뜻 보이는 것만 해도 일만은 넘어 보였다. 헌터들은 그 모습을 보며 넋이 나가 버렸다.
“뭐, 뭐지? 왜 진짜 갑자기 오는 거지?”
“몇 년 동안 주기는 틀린 적이 거의 없어. 오차 범위라고 해 봤자 한두 달 정도였다고.”
“그놈은 이걸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헌터들뿐만이 아니라 지휘관인 그랜트도 똑같이 넋이 나갔다. 혹시나 해서 준비는 했는데 정말 일이 벌어질 줄이야.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전투 준비! 헌터들도 전투 준비를 하시오!”
끼이이익!
잽싸게 정신을 차린 그랜트가 외치자 병사들이 대형 발리스타와 투석기를 장전하기 시작했다. 헌터들도 모두 무기를 들었다.
하늘을 나는 몬스터들도 있기에 지상전뿐만 아니라 공중전도 대비해야 했다.
지셀도 성벽 위에 서서,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는 펜리스의 기사들과 이번에 영입한 300여 명의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헌터들은 전투 준비를 하면서도 지셀 쪽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저쪽에 카오르가 있어.”
“돈카드를 이긴 놈이잖아? 저쪽에 있어야 살 확률이 더 높을 거야.”
“저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가자.”
헌터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지셀 쪽으로 옮겼다. 요새 지휘관인 그랜트는 그걸 보며 소리 질렀다.
“자리를 지켜! 이 멍청한 새끼들아! 자리를 지키라고!”
몬스터들이 사다리를 쓰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성벽 정도는 쉽게 오르는 몬스터들도 수없이 존재한다.
운동 신경이 뛰어난 놈들은 시체들이 조금만 쌓여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다. 그렇기에 헌터들도 자리를 지켜야 했다.
하지만 헌터들은 그랜트의 말을 무시하고 지셀 일행 쪽으로 움직였다. 일단 강한 자 옆에 붙는 게 우선이었다.
예전에는 돈카드가 이곳에서 가장 강했다. 대인전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몬스터 사냥은 그가 최고였고, 언제나 가장 뛰어난 활약을 했다.
그런 돈카드를 이긴 카오르다. 그 옆에 최대한 가까이 있어야 살 확률이 높아졌다.
카오르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하, 새끼들. 누가 최강인지는 알아서. 곤란하네, 정말.”
몬스터가 몰려오는데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지금처럼 우러름만 받고 싶었다.
이미 지셀과 계약한 헌터들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부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이래서 사람은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거지!’
‘부럽지? 그러게, 누가 자존심 세우랬냐!’
지셀은 근처에 다가온 헌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이, 너희들도 우리랑 같이 싸우고 싶어?”
헌터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서 대충 몸 사리면서 싸우고 싶었다.
지셀은 흔쾌하게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좋아, 바쁘니까 일단은 구두 계약으로 하자. 모두 우리와 함께 열심히 싸우면 돼. 여기 돈카드를 이긴 카오르도 있으니까 다들 걱정하지 말라고.”
“와아아아!”
헌터들의 사기가 바짝 올라갔다.
예전에는 돈카드 옆에 가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몬스터의 사체를 독식하려고 하던 돈카드 파티는 은근슬쩍 발을 들이미는 걸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온 놈들은 너그러운 건지, 멍청한 건지 받아 달라고 하면 전부 받아 주었다. 헌터들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지셀이 헌터들을 받아 주는 모습을 보고 그랜트는 그들을 통제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헌터들은 군인이 아니다. 여기서 강제로 자리를 옮기라고 말해 봤자 반발심만 커지지, 통하지도 않는다.
‘젠장, 저놈이 온 뒤로 뭔가 다 꼬인 느낌이야.’
예상을 벗어난 몬스터 웨이브도 그렇고, 헌터들이 한데 모이는 것도 그렇다. 뭔가 요새 전체가 저놈한테 끌려다니는 느낌이었다.
카아아아악!
더 이상 잡생각을 할 수 없었다. 몬스터들은 투석기와 발리스타의 사정거리까지 들어왔다.
“공격하라!”
그랜트의 외침을 신호로 발리스터와 투석기 공격이 먼저 시작됐다.
파아아아앙!
콰앙! 콰앙! 콰앙!
카아아아악!
몬스터들이 터지고 찢겨 나갔다. 특히 발리스타는 대형 몬스터에게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몇 번의 공격으로 저 많은 몬스터를 전부 막아 낼 수 없었다. 그사이 몬스터들은 대형 병기들의 사정거리를 넘어 들어와, 더 이상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궁수! 공격해라!”
공성 병기에 비해 비교적 조절하기 쉬운 궁수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쏴아아아악!
화살 비가 쏟아졌다. 그중 일부는 비행 몬스터들 쪽으로도 향했다.
가죽이 두꺼운 몬스터들에는 큰 효과를 주진 못했지만, 다수의 소형 몬스터들에는 제법 큰 타격을 주었다.
“쏴라! 계속 쏴!”
성벽에 달라붙기 전까지는 계속 화살 공격을 해야 한다. 사연이 있어 이곳까지 흘러들어 온 소수의 마법사들도 최대한 힘을 쥐어짜 장거리 마법을 퍼부었다.
쿠오오오오!
땅이 울리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 갔다. 몬스터들의 괴성은 귀가 터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성벽 위에서 대충 몬스터의 숫자와 놈들과의 거리를 가늠한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이제 슬슬 뛰어내리자. 모두 ‘한쪽 팔만 부서지고 살아남기 낙법’을 준비해라.”
그 말에 주변에 있던 헌터들은 의아한 표정을, 펜리스의 기사들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럼 그렇지, 그냥 정상적으로 싸울 리가 없지.’
‘이제 모르겠다. 생각하기도 싫어.’
몬스터가 몰려오건 말건 기사들은 그냥 이미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다.
그들은 딱히 반발도 안 하고 허리춤에서 밧줄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웃었다.
“이제 알아서 준비 잘하네?”
“네, 네. 그냥 뛰어내리긴 싫어서요. 어깨 아프다고요.”
영혼 없이 대답한 기사들은 주섬주섬 밧줄을 대충 성벽에 건 뒤, 그것을 붙잡고 빠르게 내려갔다. 그들은 모두 등에 거대한 나무 상자들을 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헌터들은 경악에 차서 외쳤다.
“저, 저놈들 뭐 하는 거야?”
“미친 거야? 왜 내려가는 건데?”
“아니, 내려가란다고 진짜 내려가? 정신 모자란 애들 아니야?”
리더가 죽으라고 한다고 진짜 죽는 놈이 어디 있는가? 어차피 내려가서 죽을 거라면 그 명령을 내린 놈을 먼저 죽이는 게 상식 아닌가?
그랜트도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미친놈들아! 뭐 하는 거야! 올라와! 올라오라고! 아군 공격에 죽고 싶지 않으면!”
몬스터가 지근거리에 들어와도 화살 공격은 계속될 것이다. 화살은 바로 아래를 향해 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군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랜트가 발악해도 지셀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단지 옆에서 당황하고 있는, 자신을 따르기로 한 헌터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해? 너희들도 줄 잡고 내려가.”
“……왜 그래야 하는데?”
“무조건 성벽에서 싸우는 게 유리한 게 아니야. 그건 상대가 인간일 때나 유리한 거지.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넓은 곳에서 진형을 갖추고 제대로 싸우는 게 더 낫다. 어차피 성벽이 의미 없는 몬스터들도 많고.”
“그래도 성벽이 안전하지…….”
“처음이니까 상냥하게 다시 설명해 줄게. 지금 저 정도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내려가서 싸우는 게 좋아.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도 있어.”
“그게……. 뭔데?”
“내려가서 많이 잡아야 다 우리 거가 되잖아? 자, 설명은 여기까지. 빨리 내려가.”
“…….”
헌터들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농담으로밖에 안 들리는 말인데, 그 말을 듣고 이미 내려간 놈들이 있었다.
상황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헌터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어리벙벙해하자, 지셀이 밑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얘들 상황 파악 못 하는 거 같아서 그냥 던질 테니까 잘 받아라!”
밑에서도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몬스터들 몰려옵니다! 빨리 던지십쇼!”
“그래, 이제 시작하자.”
그 말을 끝으로 지셀은 바로 옆에 있는 헌터를 붙잡아 밑으로 던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