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이 정도 숫자면 충분하겠어. (1)
“어, 설마 그거…….”
지셀의 말을 들은 기사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곳에서 지내지 않아서 바로 생각해 내지 못했을 뿐이지, 튜리안 왕국의 몬스터 웨이브는 타국에서도 유명하다.
몬스터 웨이브는 말 그대로, 갑자기 그림자 산맥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렇게 쏟아져 나온 몬스터들은 튜리안 왕국 곳곳을 헤집는다.
그래서 그 경로 중간에 요새들을 지어 놓은 것이었다.
지셀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 곧 숨어 있는 몬스터들까지 잔뜩 몰려나올 텐데 굳이 먼저 찾아갈 필요 없어. 우리는 정비만 하고 있으면 된다고.”
“으…….”
기사들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지셀을 따라다니면서 정말 많은 몬스터를 잡았다. 그것들도 징그러웠는데, 이제는 아예 떼로 몰려온단다. 생각만 해도 기절할 거 같았다.
하지만 지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알아서 죽으러 오니 편하지 않아? 이때는 많이 잡는 놈이 임자라고.”
“네…….”
듣고 있던 카오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영주님은 곧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날 걸 어떻게 압니까?”
주기적으로 몬스터들이 내려오는 건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주기가 가까워졌다면 요새의 사람들은 준비하느라 분주할 것이다.
그런데 다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마치 몬스터가 몰려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우리 때문에.”
“네?”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잡았으니까. 수백 명의 헌터들이 몇 달 사냥해야 할 양을 우리가 며칠 만에 잡아 버렸잖아?”
“우리가…… 많이 잡았다고 몬스터가 몰려온다고요?”
“그래, 그림자 산맥의 몬스터들은 그런 거야.”
“……그게 말이 됩니까?”
“그렇다더라. 나도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그러니까 준비나 해. 대충 이 정도 잡았으면 오겠다 싶거든.”
카오르는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대는데, 그 헛소리가 매번 다 맞았으니 반박도 하기 힘들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이유를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튜리안 왕국에서도 그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몇 번이나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매번 큰 피해만 보고 돌아오는 탓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튜리안 왕국 출신도 아닌 지셀이 뭔가 아는 것처럼 말하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카오르는 생각했다.
‘음, 머리 아파. 생각하지 말아야지. 난 생각을 안 할 때 더 강하니까.’
그는 클로드와 조금은 다른 의미로 지셀의 말도 안 되는 지시를 그냥 받아들였다.
물론 지셀도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전생에도 이유가 안 밝혀진 걸 자신이 어찌 안단 말인가?
경험적으로 대충 이 정도 잡으면 몬스터들이 몰려온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일단 쉬면서 무장들이나 점검해. 최고의 컨디션으로 싸워야 하니까.”
기사들은 갑자기 얻은 개인 정비 시간을 시무룩해진 채 보냈다.
지금까지 싸운 것보다 더 많은 몬스터와 싸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벌써 피곤이 몰려오는 듯했다.
“창고에 쌓아 둔 물건들 좀 점검하고 오자. 카오르만 따라와.”
지셀은 기사들을 뒤로하고 카오르와 요새를 돌아다녔다.
분명 처음에는 지셀이 무리의 리더로 사람들의 경계와 선망을 받았다. 하지만 돈카드를 쓰러뜨린 뒤로는 카오르가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어이! 붉은 머리! 대단한데!”
“그 돈카드를 이기다니! 이제 네가 이 요새의 최강이야!”
“언제 한번 같이 사냥이나 가자고!”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와 찬사가 줄을 이었다.
처음에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카오르도 곧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후…… 역시 내가 최강자인 건가.”
생각해 보니 역시 자신은 이렇게 모두에게 추앙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이상한 사람들하고 영지에서 지내며 잊고 있었을 뿐이다.
잠깐 열기구 추락 사건이 생각났지만 애써 고개를 털고 잊었다. 갑자기 알포이 얼굴이 떠오른 게 더 기분 나빴다.
지셀은 살짝 뒤로 빠져 카오르가 더 돋보이게 해 주었다.
‘아주 신이 났네. 적응은 잘하겠어.’
앞으로 당분간 카오르는 이곳에 남아서 몬스터를 사냥해 가죽과 여러 부산물을 영지로 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하게 그의 존재를 어필하는 게 좋았다. 그래야 세력을 쉽게 만들고 이곳에서 지내기가 편할 테니까.
그래서 지셀은 일부러 카오르가 돈카드를 상대하게 해서 카오르를 띄워 준 것이다.
카오르는 마음껏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 다들 자신을 대단한 사람 보듯이 바라본다.
‘크, 좋다. 영지에서 지낼 때랑은 완전히 달라. 여기 계속 있고 싶다.’
진작 이랬어야 하는데 인생을 크게 손해 본 것 같았다. 자존감이 팍팍 살아났다. 영지에 있는 놈들이 대단한 거지 자신이 못난 게 아니었다.
지셀은 느긋하게 요새 안을 돌아다녔다. 애초에 창고를 보자는 건 핑계였고 카오르의 얼굴을 더 널리 알리는 게 목적이었다.
‘이 요새에서 제일 유명한 놈이 되게 해야지.’
돈카드와의 싸움을 못 본 사람들도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니 카오르의 얼굴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두 사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거리더니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곧 일단의 무리가 카오르의 앞으로 다가왔다. 복장을 보니 헌터들이었다.
카오르는 그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몇 놈은 얼굴이 눈에 익었다. 분명 자신을 놀리던 돈카드의 수하들이었다.
“이 새끼들 잘 만났다. 저번에 나 놀렸지? 너희 오늘 뒈졌어. 이 꽉 깨물어라.”
키오르가 으르렁거리며 나서자 가장 앞에 있던 헌터가 손을 마구 저었다.
“아니, 아니야! 우린 지금 싸우러 온 게 아니야!”
“나는 지금 싸울 거다. 왜냐하면 날 놀렸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뭔지 알아?”
“뭐, 뭔데?”
“내 기분 상해죄다. 죽어라.”
카오르가 주먹을 날리기 전에 지셀이 그의 팔을 잡았다.
“왜요? 내가 대장이라면서요.”
“일단 얘기나 먼저 들어봐.”
카오르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주먹을 내렸다.
‘이건 영주가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다! 수하의 의견을 잘 들어주는 게 좋은 리더라 그런 거야!’
카오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여 지셀은 혀를 찼다. 생각 없는 그 대신 지셀이 앞으로 나서서 물었다.
“뭔데?”
“저, 그게…….”
헌터는 지셀과 카오르를 번갈아 보며 우물쭈물했다. 솔직히 누가 파티의 리더인지 조금 헷갈렸다.
그래도 처음에 무리를 이끌었던 건 지셀이었다. 헌터는 결심한 듯 지셀에게 말했다.
“우리도 너희들 쪽에 좀 끼워 주면 안 될까?”
“끼워 달라고?”
“그, 그래. 사실 우리끼리 계속 사냥해도 되긴 하는데, 아무래도 구심점이 필요해서…….”
“흐음…….”
지셀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헌터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돈카드가 죽어서 우리 파티가 다들 흩어지고 있어. 차라리 너희가 우리를 흡수하는 게 어때? 여기서는 같은 편이 많아서 나쁠 건 없다고.”
대부분의 헌터들은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한다. 몬스터들이 워낙 많아 소수 인원이 다니기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 다니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요새에는 워낙 많은 헌터들이 모이니 필요할 때만 파티를 구해 사냥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단체를 이루고 고정 파티를 꾸려 대규모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이득이 크다.
돈카드는 이곳에서 가장 큰 단체를 이끌던 자였다. 그가 죽었으니 그를 따르던 헌터들은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듣고 있던 카오르가 다시 나섰다.
“그러니까 내 부하가 되고 싶다 이거지?”
“아, 아니……. 부하가 아니라 같이 사냥하는 동료지…….”
“부하 같던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실제로는 돈카드의 부하들이 맞다. 명목상 그가 리더였고 이곳에 신분의 고하가 없기에 동료라는 겉 포장으로 넘어갈 뿐.
사람 사는 곳에서 서열이 안 갈릴 수는 없었다.
카오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내가 너희들을 내 부하로 받아 주겠…….”
따악!
지셀은 카오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악! 왜 때려! 내가 대장이라며!”
“쯧쯧,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럼 뭘 어떻게 해요?”
“당분간 내가 하는 걸 보고 잘 배워라. 어이, 너희들 그러면 몇 명 남았어?”
헌터는 지셀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인 친구들까지 합하면 100명 정도일 거야. 나머지는 이미 다른 무리에 들어갔거나 아예 파티에 들지 않겠다고 했어.”
“좋아, 그러면 우리 쪽에 붙고 싶은 놈들은 다 데리고 와. 여관에서 기다릴 테니. 다 끼워 줄 테니 소문 잔뜩 내고 다 오라고 해. 오는 놈은 안 막는다.”
가는 놈은 안 잡는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셀에 대해 잘 모르는 헌터는 화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최대한 많이 데리고 올게.”
파티원이 많을수록 사냥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대신 그만큼 한 사람이 먹는 양은 줄어든다.
실력이 좋고 공헌도가 높은 자들이 더 많은 전리품을 챙겨 가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의 파티는 사냥 속도도 어마어마하고, 그러면서도 크게 다치거나 죽는 사람도 없었다. 개개인의 실력이 떨어진다면 절대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이미 눈으로 직접 본 사실이었다. 그러니 거기에 껴서 적당히 사냥만 해도 만족할 만큼은 얻어먹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 섰다.
곧 지셀의 여관에는 소문을 들은 헌터들이 몰려들었다.
“우리도 좀 끼워 줘! 내가 음식을 잘해!”
“난 이곳 지형을 다 알고 있다고!”
“내 실력이면 큰 도움이 될 거야!”
모인 헌터는 무려 200여 명이었다. 자기 어필을 하는 헌터들의 목소리로 여관은 시끌벅적했다.
지셀은 중앙의 테이블에 앉아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받아 줄게. 걱정하지 말고 줄이나 서라고. 계약서부터 바로 쓰자.”
“화끈해서 좋네! 빨리 쓰자고!”
헌터들도 계약서를 자주 쓰긴 한다. 사냥 후 분배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어차피 눈 가리고 아웅인 계약서였다. 무법지대라 불리는 곳에서 누가 계약서 내용을 잘 지키겠는가?
보통은 계약서와 상관없이 마음에 안 들면 힘으로 해결한다.
그래서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힘으로 해결하는 걸 가장 좋아한다는 걸 모른 채 말이다.
“우와, 계약 조건이 너무 좋잖아?”
“역시 사냥 실력만큼 조건도 끝내주네.”
“많이 벌어서 그런가? 아주 통이 커.”
헌터들은 계약서를 받아 보고 기쁜 미소를 지었다.
공헌도에 따른 분배가 없었다. 분배해 주는 양도 다른 파티랑은 비교도 안 되게 많았다.
가죽과 힘줄을 제외한 부산물들은 동등하게 나눈다고 되어 있었다. 옆에서 은근슬쩍 놀아도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이다.
그간 본 사냥 속도를 생각하면 정말 빠르게 이득을 볼 수 있을 거 같았다.
다만 조금 거슬리는 조건이 몇 가지 있었다.
“계약 기간이 30년?”
“요새 밖에서의 전투도 언제든 부르면 참여한다?”
“도망갈 시 즉결 처형? 파기하고 싶으면 지금까지 먹은 것만 뱉으면 되고?”
헌터들끼리의 계약서와는 조금 달랐다. 기간을 명시하는 것도 이상하다. 무슨 강제 징집이라도 당하는 거 같다.
그래서 한 헌터가 물었다.
“기간이 꼭 필요해? 어차피 헌터들은 필요에 따라 뭉치거나 흩어지는데. 이번에도 돈카드가 죽어서 흩어지는 거잖아?”
지셀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래오래 함께하자는 거지. 돈카드처럼 내가 죽으면 그냥 계약 무효가 되는 조건을 추가해 줄게. 아, 그리고 난 며칠 뒤에 여기를 떠날 거야. 내가 떠나면 내 옆에 있는 카오르가 리더니까 잘 따르도록.”
헌터들은 음흉한 눈빛을 지었다. 다르게 말하면, 눈앞에 있는 놈만 죽이면 언제든 계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자리를 비웠을 때 카오르란 놈을 사고로 위장하고 죽여도 될 거 같았다.
이건 기간이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이득만 먹고 빠지고 싶을 때 빠지면 된다.
“좋아! 바로 계약하자고!”
한 헌터가 호기롭게 외치자 다른 이들도 너도나도 앞장서서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펜리스의 기사들은 이를 꽉 물었다.
‘불쌍한 새끼들…….’
‘영주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네.’
‘언젠가는 다 영지로 끌려가겠구나.’
지셀이 떠나도 카오르와 기사들은 남는다. 헌터들은 쉽게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계약이 마무리되자 지셀은 통 크게 선금을 주기 시작했다.
“자, 다들 이걸로 며칠간 푹 쉬라고. 난 돈이 많거든.”
“우와아아아!”
사냥도 하기 전부터 헌터들은 지셀에게 많은 돈을 받았다. 그들은 그대로 요새 안의 유흥가를 찾아 흥청망청 쓰고 놀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용병들과 비슷했다. 헌터들도 언제 죽을지 모르니 노는 데 항상 최선을 다한다.
지셀이 돈을 뿌린다는 소문이 나자 매일같이 헌터들이 찾아와 계약을 원했고, 어느 순간 지셀을 따르는 헌터들은 300명이 넘어갔다.
생각보다 짧은 기간에 많은 헌터들과 계약했다. 매일 자신에게 받은 돈으로 흥청망청 노는 헌터들을 보고 지셀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 정도 숫자면 다 같이 성벽에서 뛰어내리기는 충분하겠어.”
몬스터는 맞붙어서 잡아야 제맛인 법이다.
그게 바로 지셀의 신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