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아주 미치도록 멋진 곳이지. (2)
튜리안 왕국은 클로드가 있었던 세이론 왕국 너머에 있는 나라다. 그곳도 세이론만큼 작은 왕국이긴 했지만 ‘기사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기사들이 많았다.
기사들만 뛰어난 게 아니라, 왕국의 사람들 모두가 강인하고 무예를 중시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왕국을 가로지르는 ‘그림자 산맥’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르디움이 야만인들과 오랜 시간 싸워온 것처럼, 튜리안 왕국 역시 오랜 시간 몬스터와 끝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산맥에서 내려오는 수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몬스터와 싸우면 싸울수록 왕국의 자원과 인력도 더 많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튜리안 왕국은 다른 방법을 꾀했다.
[누구든 자유롭게 이곳에 와서 몬스터를 사냥해라. 신분의 고하와 정체도 따지지 않겠다. 범죄자든, 모험가든, 용병이든 상관없다. 몬스터를 잡으면 거기서 나온 부산물의 권리를 전부 주겠다.]
왕령이 공표되자 대륙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약간의 세금만 낸다면 큰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국은 피해를 줄이고 다른 이들은 돈을 벌 수 있는, 양쪽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전략이었다.
그렇게 ‘그림자 산맥’에서 몬스터들만 전문적으로 잡는 사람들을 ‘몬스터 헌터’라 불렀다.
지셀도 이제 그곳으로 가 몬스터를 잡고 가죽을 구할 생각이었다.
클로드도 지셀이 생각한 방법이 최선이라는 데는 동의했다. 하지만 영주가 너무 자리를 자주 비워서 좋을 건 없었다.
“얼마나 가 계시려고요? 지금 데스몬드 백작이 본격적으로 군대를 소집하고 전력을 점검하고 있다던데요. 그쪽도 이제 힘으로 해결하려는 모양입니다.”
“아멜리아 쪽은?”
“아직 발루아 남작과 공성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해를 아끼려는 건지 계속 대치만 하고 공격에는 소극적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지셀은 픽 웃었다.
아멜리아는 한번 몰아칠 때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몰아치는 스타일이다. 노리는 게 있어서 소극적으로 나오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녀가 뭘 노리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일단은 양쪽 다 계속 감시하고 있어. 나는 잠깐만 갔다 금방 올 거야.”
“가죽은 지속적으로 공급해야 하는데 잠깐 갔다 와서 소용이 있겠습니까? 야만인들처럼 한 번에 많은 가죽을 줄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곳에 있는 헌터들 가죽을 다 뺏어 오시게요?”
“처음에만 내가 좀 지도해 주고, 그 뒤로는 다른 사람한테 맡겨야지. 기사도 한 50명 정도 데리고 갈 거야. 실력이 제일 떨어지는 친구들로 말이지.”
“누구한테 맡기시려고요?”
클로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영주를 대신해서 기사들을 맡을 만한 사람은 길리언밖에 없다.
그런데 길리언은 의외로 굉장히 바쁘다. 기사들은 물론이고 병사들의 군사 훈련까지 도맡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게 할 수는 없다. 영주가 대신 훈련할 수는 있지만, 영주는 길리언보다 더 바쁘다.
그렇다고 아직 애송이인 기사들에게 그런 위험한 일의 책임자 자리를 맡길 수도 없었다.
고민하던 클로드는 의외로 빨리 적임자를 생각해 냈다.
“아하! 싸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고, 당장 영지 개발에는 큰 쓸모가 없는 놈! 그놈한테 맡기면 되겠군요.”
클로드의 평가에 지셀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놈한테 맡길 생각이다.”
* * *
“에이, 싯팔! 진짜 짜증 나네.”
카오르는 발로 돌을 걷어차며 짜증만 부렸다. 요새는 계속 짜증만 났다.
“아, 야만인들과 싸울 때는 재미있었는데. 뭐 또 싸우러 안 가나?”
몇 번 중얼거린 그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사실 카오르는 요즘 꽤나 초조한 상태였다.
영혼의 라이벌이라 믿었던 길리언은 날이 갈수록 더 강해지는 거 같았다. 야만인들과 싸울 때 보니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솔직히 지금 길리언과 싸우면 질 거 같았다.
길리언뿐인가? 벨린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전쟁 때처럼 뒤에서 칼침을 놓으면 그냥 당할 것만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불안한데, 거기에 자신보다 약했던 놈들도 실력이 쑥쑥 늘고 있었다. 특히 루카스란 놈은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하, 이러다가 내가 제일 약해지는 거 아냐? 그러면 안 되는데?”
분명 자신도 지셀이 도와준 덕분에 예전보다 강해졌다. 그리고 지금도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빠르게 실력이 늘지 않자 불안감이 앞섰다. 이러다 나중에는 알포이한테도 질 거 같았다.
“쩝, 난 싸움 말고는 잘하는 게 없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유일한 장점이 그거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것마저 따라잡히면 기분이 정말 더러울 거 같았다.
자신은 영지 개발에는 도움이 거의 되지 않는다.
지금도 다른 사람들은 훈련이니 개발이니 하면서 바쁘지만, 자신은 그냥 ‘노동 돌격대’ 애들이나 갈구면서 일이나 시키고 있었다. 그 외에는 가끔 치안대 일을 돕는 정도.
뭔가 다들 바쁘게 자리를 잡아 가는데 자신만 길을 못 찾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이 계속될수록 소외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심심한데 나도 뭐 다른 걸로 영지에 도움 될 게 없나……. 나도 도움이 좀 되고 싶…….”
카오르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내뱉다가 깜짝 놀라 입을 닫았다.
북부의 ‘미친개’로 명성을 날리던, 멋진 풍운아인 자신이 그딴 순하고 착한 발언을 하다니!
‘나쁜 남자가 멋있다’라는 말을 좌우명 삼아 살아왔기에 그런 성실한 사람이 되는 건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아오!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가야겠다.”
카오르는 벌떡 일어나 노동 돌격대의 대원들을 갈구기 시작했다.
“야! 빨리 안 해? 왜 이렇게 느려? 특히 너희 셋! 몸은 좋은데 일은 왜 그렇게 더럽게 못 하냐고! 이 등신 새끼들아!”
큰 바위를 치우던 데스몬드의 첩자 세 사람은 눈치를 보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카오르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카오르는 번개처럼 빠르게 다가가 세 사람을 패기 시작했다.
퍼억! 퍼억! 퍼억!
“아악! 또 왜 그러십니까!”
“뭐가 또 마음에 안 드시는데요!”
“미친놈아! 갑자기 이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세 사람의 외침에 카오르는 씩씩대며 말했다.
“이상하게 네놈 새끼들은 마음에 안 들어! 느낌이 존나게 안 좋다고! 너희들 첩자지? 그렇지? 맞아, 그럴 거야. 눈빛도 마음에 안 들고 아무튼 다 마음에 안 들어. 그러니까 오늘부터 네놈 새끼들은 무조건 첩자다. 알겠냐?”
카오르는 그냥 화풀이하려고 억지를 부렸을 뿐이다. 그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조금 찔끔하면서도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며 억울함을 강조했다.
“우리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성실하게 일만 하고 살아온 사람이라고요!”
“미친놈아! 이거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카오르는 못 들은 척을 했다.
“아, 닥쳐!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이렇듯 그의 짜증은 날이 갈수록 커지기만 했다. 생각만큼 실력이 빠르게 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실력 경쟁에서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스트레스와 영지 개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자격지심 등, 여러 가지 이유가 한데 섞여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등신 같은 알포이 새끼도 일을 엄청나게 많이 하고 있는데!’
사실 다른 영지였다면 이 정도까지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른 영지에서 기사는 그저 매일 훈련하고 수련만 하는, 돈만 잡아먹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펜리스 영지는 능력 있는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곳이다.
다른 기사들은 별생각이 없었지만, 카오르는 자신이 영지의 주요 인사라 생각했다. 그러니 벨린다나 길리언, 바네사, 클로드 등과 자꾸 자신을 비교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에이씨, 영주한테 가서 뭐 좀 더 알려 달라고 할까?’
세 사람을 실컷 팬 카오르는 다시 혼자 생각에 잠겼다.
이미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 그런데 또 뭔가를 달라고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길리언과 비슷한 시기에 들어왔는데 그에게는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놈들도 거슬렸다.
결국 카오르는 건들거리며 지셀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시위하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
“왜?”
“…….”
“말을 하라고.”
“…….”
“오랜만에 특별 훈련을 좀 해야겠네.”
지셀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카오르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뭐 없습니까?”
“뭐가?”
“뭐, 그냥 좋은 거…….”
기세 좋게 지셀을 찾아오긴 했지만, 막상 이유를 말하려니 입이 안 떨어졌다.
북부에서 독기와 자존심만으로 버티며 살아온 카오르다. 좋은 거 달라고 부탁하기에는 뭔가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저번처럼 알아서 주면 참 좋을 거 같은데.’
하지만 지셀은 야속하게 답했다.
“몸이 허하면 클로드한테 가서 만드라고라 뿌리나 좀 달라고 하든가. 아니면 피오테한테 신성력으로 치료해 달라고 부탁해. 그런데 굳이 받을 필요 있어? 딱 봐도 건강해 보이는데.”
‘에이씨…….’
카오르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짜증 난다. 부탁하기는 싫은데 속은 답답해서 미칠 거 같았다.
카오르가 그렇게 나가지도 않고 말도 안 하고 애새끼처럼 입술만 씰룩거리고 있자, 지셀이 피식 웃었다.
“왜? 답답해?”
“……?”
“실력이 생각만큼 빨리 안 늘어서 답답하냐고. 그런데 말하기는 자존심 상하고?”
“헐.”
카오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셀을 바라보았다. 아직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너무 티가 난 걸까?
지셀은 몇 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을 이었다.
“원래 그럴 때지. 나도 겪어 봐서 알아.”
‘아니, 저 나이에 뭘 매번 다 겪어 봤다는 거야?’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지만 카오르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러니까 더 좋은 거 알려 주십시오!”
상대가 알고 있다면 말하기가 쉬워진다. 카오르는 용기를 얻고 뻔뻔하게 말했다.
그런데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상태로는 세계 최고의 마나 연공법이나 검술을 알려 줘도 소용없을 거다.”
“뭐야, 알려 주기 싫으면 싫다고 하든가요!”
카오르가 발끈했다.
좋은 걸 배우면 더 강해지는 건 당연하다. 길리언도 지금 엄청 빠르게 강해지고 있지 않은가?
자신은 그보다 안 좋은 걸 배워서 성장이 느린 거다.
지셀은 그런 카오르의 반응을 무시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길리언은 이미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사람이야. 그간 묵묵하게 쌓아 온 실력이 있으니 방향만 잘 잡아 주면 쉽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거지. 하지만 너는 아직 아니야. 너는 너무 가벼워.”
“뭐가 가볍다는 겁니까?”
“제대로 기초를 쌓지 않고 임기응변으로만 살아왔으니까. 그나마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나름대로 재능이 있어 길을 내긴 했다는 뜻이지만, 너에게는 시간을 들여 단단하게 쌓아 올린 게 없다.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렵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지.”
지셀도 전생에 카오르와 비슷한 상태였던 경험이 있었다. 복수심에만 눈이 멀어 실력을 향상하는 데만 매달렸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혼란에 빠져 실력이 퇴보했다. 차근차근 쌓아 올릴 생각을 하지 않고 빠른 길만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빠른 길도 좋은 길이 될 수는 있다. 세상에 딱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조급함은 그 ‘좋은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없게 한다.
지금 카오르도 딱 그런 상태였다.
“정석이란 게 원래 그런 거다. 네가 지금까지 쌓아 온 나쁜 버릇을 버리고 새롭게 쌓아 올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 대신 완성만 된다면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다.”
“저는 지금 당장 강해지고 싶습니다!”
자신이 길리언의 나이가 되면 그보다 더 강해질지 모른다.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그는 나이 따위를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인데 지금 더 강한 게 중요한 것이다.
분명 지셀이 알려 준 걸 처음에 익혔을 때는 빠르게 강해졌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많이 채워 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지루한 반복일 뿐이다. 그러니 실력 향상도 더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작은 벽만을 깨 나가던 그는 결국 거대하고 단단한 벽을 만나고 말았다.
그래서 카오르는 조급한 마음으로 다시 외쳤다.
“더 좋은 게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 건 없어. 설사 있다고 해도 지금 너에게는 소용이 없다. 금세 다시 막히게 될 테니까. 이제는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쌓아 가야 해.”
“젠장! 영주님은 나이도 어린데 엄청나게 강하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강해진 겁니까? 뭐 영주님은 시간을 따로 더 받았답니까?”
예의라고는 내던진 발언에 지셀은 혀를 찼다. 평소였다면 물리 치료에 들어갔을 테지만 이번만은 봐주기로 했다. 지금 카오르가 얼마나 답답한 심정일지 잘 알고 있으니까.
회귀했으니 시간을 따로 더 받은 것도 맞고.
하지만 전생에 그가 대륙 7강에 올랐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정말 피나는 노력과 오랜 시간을 들여 실력을 쌓아 갔었다.
다만 한 가지, 특별한 방법을 쓰긴 했다.
“시간을 빠르게 단축하는 방법이 있긴 하지.”
지셀의 대답에 카오르는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렇죠? 있죠?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저한테도 알려 주십쇼!”
“목숨.”
“네?”
“목숨을 걸고 실전을 쌓으면 돼.”
“그럼……. 전쟁터를 전전하면 됩니까?”
“그래. 하지만 전쟁터를 매번 찾아다니는 것도 생각보단 효과가 크지 않을 거다. 빨리 실력을 늘리려면 하루라도 쉬지 않고 계속 싸워야 하거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몬스터를 많이 잡으면 돼.”
그 말에 카오르는 코웃음을 쳤다.
“저 몬스터 많이 잡아 봤습니다. 전에 마수의 숲에도 같이 가지 않았습니까?”
“살면서 몇 마리나 잡아 봤는데?”
“뭐…… 대충 천 마리는 될 겁니다!”
카오르는 조금 과장해서 얘기했다. 용병 일을 하면서 잡았던 것과 마수의 숲에서 잡았던 걸 다 합치면 몇백 마리 정도는 되는 거 같았다.
지셀은 그런 카오르가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그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지.”
“그럼 얼마나 잡아야 하는데요?”
카오르의 물음에 지셀이 입꼬리에 사악한 웃음을 매달고 답했다.
“한…… 10만 마리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