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아주 미치도록 멋진 곳이지. (1)
믿을 수 없는 무게에 병사들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갑옷 색도 기사들이 입는 것처럼 광택 나는 은빛이 아니었다.
무광에 가까운 은빛이라 조금 더 고급스럽고 차분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더욱더 의심이 갔다.
엉터리 재료로 만든 게 분명했다. 누가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한 병사들은 갑옷을 들고 장난을 쳤다.
“야야, 이거 한번 쳐 봐!”
한 병사의 외침에 다른 병사가 검을 뽑아 내리쳤다. 혹여나 상관에게 걸려도 지급된 걸 시험해 봤다고 하면 되니까.
애초에 갑옷을 보낸 것 자체가 누군가의 장난이라면 장난을 치든 말든 그냥 넘어갈 것이다.
카앙!
“……?”
갑옷을 들고 있던 병사도, 검으로 내리쳤던 병사도, 구경하고 있던 병사들도 눈만 껌뻑거렸다.
갑옷이 엉터리였다면 검에 맞은 곳이 패거나 뚫렸어야 한다. 그런데 갑옷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특히 검을 휘둘렀던 병사는 제 손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진짜 갑옷을 때릴 때하고 거의 비슷한 충격이었는데?”
장난으로 공격했기에 별생각이 없이 강하게 휘둘렀다. 그 충격은 고스란히 손에 전달되었다.
손이 저릿저릿할 정도의 아픔. 이건 분명 단단한 판급 갑옷을 내리칠 때와 같았다.
그렇게 다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경보병 백인장이 땀을 흘리며 달려왔다.
“헉헉, 미안하다. 똥 싸느라 늦었다. 다들 갑옷 지급받았지?”
“이거…… 정말 저희 주는 겁니까?”
“그래, 앞으로 모든 병사들의 무장을 이걸로 바꾸라는 영주님의 지시다. 앞으로 허접한 갑옷은 입지 말래.”
“……와우.”
영주님이 돈을 쓸 때는 어마어마하게 쓴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영지에 있는 병사들은 3천 명이나 된다. 그런 병사들의 무장을 전부 바꾸겠다고?
이런 배포는 왕실에서도 보여 주지 못했다.
한 병사가 손을 들고 물었다.
“그런데 이 갑옷은 왜 이렇게 가볍습니까?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건가요?”
“아냐, 아냐. 이번에 드워프들이 개발한 신소재래. 그래서 기존 갑옷과 방어력은 비슷한데도 무게는 절반도 안 된다는 거지.”
“와…….”
병사들은 그제야 함박웃음을 지었다.
판금 갑옷은 야금술의 절정이라고 한다. 둔기로 갑옷 자체를 뭉개거나 관절의 틈을 공격하지 않으면 판금 갑옷을 입은 자를 죽이기는 힘들다.
기사들을 상대할 때야 상대방의 실력 여하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겠지만, 일반 병사들을 상대로는 압도적인 방어력을 자랑하는 게 판금 갑옷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장갑을 가죽 갑옷 수준으로 무게를 줄여 버렸다. 이건 놀랍다는 정도를 떠나 그냥 기적이었다.
“이야야야야야!”
다들 기쁜 함성을 내질렀다.
전장에 선 병사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죽음이다. 그런데 전신에 판금 갑옷을 두르고 싸운다면? 혼자서도 상대 병사 몇 명은 죽일 수 있었다.
훈련을 받고 있는 기마병과 궁병들도 기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옷의 무게가 가벼울수록 말은 덜 지치게 된다.
갑옷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새로운 갑옷을 입은 병사들도 점점 더 많아졌다. 외관만 봐서는 누가 기사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차분한 은빛의 갑옷과 왼쪽 가슴에 새겨진 붉은 늑대의 문장.
이것은 이제 펜리스 병사들의 상징이었다.
무기 또한 갈바니움으로 만든 창과 방패, 검 등이 각 병종에 맞게 지급되었다.
병사들은 이번에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무기도 엄청 가볍잖아?”
“오래 들고 다녀도 안 피곤하겠는데?”
“이 정도면 종일 휘두를 수도 있겠어!”
강도뿐만 아니라 무게도 중요한 둔기류는 기존보다 아주 약간 가벼워진 정도였지만, 날붙이류는 훨씬 가벼워져서 다루기 쉬워졌다.
가장 기뻐한 건 역시 중보병들이었다. 그들은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크고 두껍고 무거운 방패들을 들고 있어야 해서 가장 힘든 병종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새로운 방패를 지급받은 뒤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달리면서 방패로 공격해라!”
교관들이 외치자 방패병들은 달리면서 한 손으로 방패를 휘둘렀다. 그것도 자신의 몸을 다 가릴 정도로 거대한 방패를 말이다.
이제 펜리스 영지에서는 중보병이라는 개념이 없어졌다. 무기의 종류와 방패의 크기가 다를 뿐, 모두가 중장비를 갖춰 입고 경보병 이상 가는 속도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모두가 말을 타는 훈련도 하고 있으니 기마병의 개념도 없어질 판이었다.
하지만 좋은 장비를 입었다고 병사들이 더 편해진 건 아니었다. 그들이 받는 훈련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강도가 올라갔다.
“더! 더 휘두르고 움직여라! 장비에 의존하려고 하지 마라! 맨몸으로도 적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란 말이다!”
길리언의 외침에도 병사들은 하나둘씩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쓰러졌다.
“우에에엑!”
“주, 죽을 거 같아.”
“엄청나게 좋은 장비를 받았는데 왜 더 힘들어졌지?”
장비는 실제 전투 시에 최고의 효율을 내기 위해 도움을 줄 뿐이다. 결국 쓰는 사람이 약하면 그 힘을 제대로 끌어낼 수 없다.
인간 자체가 강해져야 한다. 그건 지셀의 신조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지셀의 명령을 완벽하게 수행하려는 자가 있다.
“뭐 해! 더 움직여! 더 움직이란 말이다! 이 멍청이들아! 그런 식으로 움직이면 싸우기도 전에 이동하다가 뒈져 버릴 거다!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다리를 부러뜨려 버리겠다!”
누가 용병 출신 아니랄까 봐, 평소에는 과묵하던 길리언도 병사들의 훈련을 맡을 때는 악마나 다름없었다.
잘 먹고 체력이 늘어난 병사들은 매일같이 죽기 직전까지 굴렀다.
‘여긴 지옥이야! 죄다 악마들이라고!’
‘미쳤어. 전부 기사로 만들 작정인가? 진짜 미친 영지가 맞다.’
‘배부르고 돈도 많이 받고 좋은데 뭔가 좆같다! 도망가고 싶다!’
기쁨과 절망이 공존하는 병사들의 속마음과 달리, 영지민들의 마음속에는 순수한 기쁨만이 존재했다.
기존에 쓰던 철제 도구들이 대부분 갈바니움으로 만든 도구로 바뀌었다. 영지민들은 바뀐 도구들을 사용하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내뱉었다.
“농기구가 이렇게 가벼워질 줄이야! 나무로 만든 것보다 단단하고, 철보다 훨씬 가벼워!”
“냄비가 가벼워지니 움직이기가 편하다니까? 큰 걸 쓸 때도 고정하지 않아도 돼.”
“철판도 마찬가지야.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제품이라고!”
물론 망치나 곡괭이처럼 도구 자체의 무게가 도움이 되는 것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무게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도구들은 빠르게 갈바니움제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도구가 무거우면 다루기가 어렵고 힘들다. 한 사람의 도구만 바뀌면 작은 편의에 불과하지만, 그 변화가 영지 전체로 퍼져 나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지민들이 일하는 능률이 오를수록 관련 산업의 생산성도 증대했다. 그 정도로 갈바니움이 영지에 가져온 변화는 대단했다.
사람들은 모두 기뻐하며, 이런 신소재를 만든 영주와 드워프들을 칭송하기 바빴다.
“역시 우리 영주님이야. 이것도 영주님이 알려 준 기술이라며?”
“드워프들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했을 거래.”
“갈바릭 님을 갈아 넣어서 갈바니움이라나? 누가 그러더라고.”
지셀은 그런 영지의 변화를 확인하며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이걸로도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영지에는 아직도 부족한 자원이 많았다.
말처럼 돈으로도 구하기 힘든 자원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이제는 그걸 구해 올 차례였다.
* * *
클로드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문제가 있습니다.”
“알아.”
“……진짜요?”
지셀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죽 수급이 어려워지고 있지?”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당연한 거지. 갈바니움을 개발한 이후로 모든 물건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으니까 가죽 수요도 그만큼 많아졌겠지.”
“그걸 알면 미리 좀 대비해 놓으셨으면 좋았잖아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생산량을 조금 줄이든가요.”
클로드가 따지듯이 말하자 지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몸이 두 개야? 원래는 말을 구하는 대로 가죽을 구하려고 했어. 갈바니움이 먼저 완성돼서 그쪽을 우선한 거지. 뭐, 생산량을 줄일 생각은 없으니까 더 문제가 커지기 전에 빨리 해결하긴 해야겠네.”
가죽은 가장 많이 쓰이는 자원 중 하나다. 의류나 신발, 장갑 등을 제작하는 데도 쓰이고 물건을 보호하는 용도로도 쓰인다.
무기나 방어구 등의 장비를 만들 때도 가죽 부품이 들어가고, 무언가를 연결할 때는 주로 가죽끈이 쓰였다.
갈바니움을 이용하게 된 뒤로 장비와 도구들도 대량으로 생산되니 그에 따라 가죽의 수요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이미 생각해 둔 게 있다는 듯 말하자 클로드는 호기심이 들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어떻게 구해요? 화장품이나 갈바니움처럼 막 만들어 낼 수 있나요?”
“아니, 내가 신이야? 가죽을 어떻게 만들어.”
“……그러면 말이나 철광석을 구한 것처럼 어디서 뺏어 오나요?”
“아니, 내가 강도야? 필요하다고 다 뺏어 오게.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나 그런 사람 아니라니까?”
‘이 새끼랑 얘기하면 왜 이렇게 빡치지?’
영주는 뭔가 문제가 생길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지식을 새로 꺼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힘으로 누군가를 패고 필요한 물건을 뺏어왔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번에도 그런 지식을 내놓거나, 어디서 뺏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이쪽을 타박하고 나오니 열이 올랐다.
숨을 몇 번 내쉬고 마음을 가라앉힌 클로드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게요? 요새는 가죽도 쉽게 구할 수가 없습니다. 갈수록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어요.”
고기가 부족했던 건 가뭄으로 인해 가축들이 많이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가축이 줄어드니 그를 통해 얻는 가죽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식량이나 고기보다는 수급 상황이 좀 나은 형편이었다. 바로 이 대륙 곳곳에 몬스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지셀은 바로 그 점을 짚어 주었다.
“몬스터들을 때려잡아서 몬스터 가죽이라도 얻어야지. 당장은 구하기도 힘들고 남한테서 뺏어 오기도 힘드니까.”
“……그게 쉽지는 않을 텐데요.”
애초에 루타니아 왕국 안에는 몬스터들의 서식지도 그리 많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인간들이 영역 확장을 위해 끊임없이 몬스터들을 토벌해 왔기 때문이다.
왕국에서 오랫동안 이어 온 정책 덕분에 몬스터의 수는 크게 줄어들었다. 괜히 루타니아 왕국이 강대국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뭄까지 찾아와 몬스터들은 더 줄어들었다. 남아 있던 것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잡히다 보니 점점 보기가 힘들어졌다.
특히 북부에서는 가뭄이 오기 전부터 몬스터들을 거의 다 벗겨 먹은 상태였다. 그 정도로 가난했던 것이다.
클로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영지에서는 몬스터를 보기가 무척 힘듭니다. 보이는 족족 죄다 잡아서 뽑아먹을 수 있는 건 다 뽑아먹었어요. 주변에 있는 다른 영지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몬스터가 있어야 잡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몬스터가 많은 곳으로 가야지.”
지셀의 대답에 클로드가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마수의 숲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
“아니에요? 생각해 보니 거기 들어가면 괜찮을 거 같기는 한데요. 예전에도 초입 부분은 토벌에 성공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거기는 가성비가 안 좋아. 가죽을 얻을 수 있는 몬스터보다 그렇지 않은 몬스터가 더 많거든. 식인 식물이나 푸딩 나무 따위는 잡아 봤자라고. 그런 것까지 토벌하면서 가죽을 얻는 건 손해야.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저번에는 마수의 숲도 다시 토벌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럴 계획은 있지. 그런데 지금 아니야. 최소한의 피해로 토벌할 수 있을 실력을 갖추고 가야 해.”
처음에 무리해서 마수의 숲을 토벌했던 건 가까운 곳에 룬스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큰돈을 구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곳을 토벌하러 가는 건 손해일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으로 숲을 쓸어 버릴 수 있을 때 가서 자원을 얻는 것이 지셀의 계획이었다.
마수의 숲도 해결책이 아니란 말을 듣고 클로드는 이마를 짚었다.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 이제 뻔히 보였다.
“야만인이랑 싸울 때처럼 또 영지 밖으로 나가시려고요?”
“그렇지. 이제 좀 눈치가 빨라졌네?”
“하아, 이번엔 조금 더 멀리 가시겠고요.”
“오, 어디인지도 이미 안 거야?”
“그럼요. 몬스터가 부족하면 몬스터가 많은 곳으로 가면 된다. 그게 영주님 스타일이잖아요? 이제 다 안다고요.”
클로드의 말에 지셀은 한껏 웃었다. 역시 사람은 오래 지내야 서로를 잘 알게 되는 법이었다.
지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튜리안 왕국의 그림자 산맥으로 갈 거야. 몬스터가 넘쳐나는, 아주 미치도록 멋진 곳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