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겠다. (1)
식량을 미끼로 한 협상에 모여 있던 야만인들은 다들 찬성했다. 반발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말 잘하는 워로카의 설득에 모두 넘어가고 말았다.
그의 부족이 힘도 가장 세니 반항해 봤자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다시 열린 협상 자리에서 워로카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연합 부족들이 모두 찬성했다. 5년간 루타니아 왕국을 향한 공격과 약탈을 멈추겠다. 우리와 연합하지 않은 소수 부족의 약탈은 내가 책임지고 막도록 하겠다.”
“잘 통제해야 할 거야. 여기서 다시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말은 매년 북방 요새로 보내도록.”
오만한 지셀의 말에 워로카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지금이라도 도끼로 건방진 놈의 머리를 찍어 버리고 싶었지만, 싸우기는 부담스러웠다.
아니, 솔직히 페르디움과 펜리스란 이름 자체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내가 페르디움의 이름에 겁을 먹는 날이 오다니.’
살면서 그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겁을 먹기는커녕 페르디움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고, 부족 통일에만 신경 쓰고 있었다.
안중에도 없던 놈들에게 고개를 숙이게 될 줄이야.
물론 이렇게 끝낼 생각은 절대 없었다.
‘두고 보자. 내가 이 북방을 통일만 한다면……. 페르디움뿐만 아니라 루타니아 왕국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 오늘의 굴욕을 절대 잊지 않겠다.’
불편한 기색이 가득한 워로카의 얼굴을 보고 지셀은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쯧쯧, 너한테 그럴 기회는 없을 거다.’
부족을 운영하는 것과 국가를 운영하는 건 전혀 다르다. 실제로 워로카는 전생에 통일 국가를 세우긴 했지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전혀 수습하지 못했다.
식량뿐만 아니라 인프라도 부족하니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아마 지셀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워로카는 더 버티지 못하고 루타니아 왕국을 쳤을 것이다.
‘그러면 델파인 공작한테 목이 날아갔겠지.’
그 시절, 모든 귀족을 제압하고 절대왕권을 휘두르던 루타니아 왕국은 결단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빠르고, 그걸 실현할 힘도 있는 강국이었으니까.
대륙 7강에 이르는 지셀쯤은 되어야 왕국과 싸울 수 있었다. 워로카의 능력으로는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터다.
‘시간 여유만 있었으면 아예 씨를 말려 버렸을 텐데. 조금 아쉽긴 하네.’
워로카와 연합한 부족 말고도 다른 부족까지 모두 쓸어 버리려면 몇 달로는 부족하다.
해럴드 때문에 계속 이곳에서 시간을 끌고 있을 수는 없으니 적당히 마무리하고 돌아가야 했다. 지셀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뭐…… 지금만 기회는 아니니까.’
내전이 끝나면 워로카는 확실하게 결정을 해야 할 것이다.
모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모두 죽을 것인가를 말이다.
어쨌든 협상은 잘 끝이 났다. 즈발터는 그간 힘들었던 야만인들과의 싸움이 멈춰서 좋았고, 지셀은 필요한 말을 대량으로 구하고 후방의 안정을 얻게 돼서 좋았다.
그리고 클로드는 웬디가 업어 주지 않아서 슬펐다.
지셀은 그간 전리품으로 얻었던 것까지 포함해, 1만 필이 넘는 말들을 이끌고 영지로 돌아오게 되었다.
히이이이잉!
말들이 줄지어 성으로 들어오자 영지민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들은 살면서 이렇게 많은 말들을 본 적이 없었다.
“우와아아아아! 엄청나다!”
“말이 저렇게 많다고? 이게 말이 돼?”
“대단하다! 진짜 영주님은 대단해!”
말 한 마리당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이 정도로 많은 말을 보유하고 있는 영지는 거의 없었다.
영지는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도로를 정비해도 말이 부족해 운송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말들이 넘친다. 일부를 군사용으로 빼더라도 운송용으로 몇천 필이나 쓸 수 있게 되었다.
지셀은 가신들을 모아 놓고 그간의 성과를 자랑했다.
“자, 봐 봐! 기강 좀 잡고 왔더니 말이 어마어마하게 늘었잖아!”
가장 기뻐한 것은 역시 벨린다였다. 그녀는 말을 얻은 것보다 야만인들을 무지막지하게 패고 왔다는 데 더 열광했다.
“역시 우리 도련님이라니까요! 저도 같이 가서 패고 싶었는데!”
영지가 개발될수록 벨린다는 따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졌다. 갈수록 늘어나는 사용인들을 관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셀도 웬만하면 아주 중요한 전투에만 벨린다를 참전시킬 생각이었다.
다른 가신들도 이 정도 결과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완전히 강도가 다 됐구나.’
‘필요한 건 다 뺏어오는 사람이 됐어.’
‘그런데 상대가 야만인들이라 뭐라 할 사람이 없네.’
철광석이 필요하면 광산을 뺏고, 말이 필요하면 말을 뺏는다. 다음에는 또 뭘 구해 오겠다고 나설지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게 또 다 그럴듯한 이유와 명분이 있으니 말릴 수도 없었다.
정말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욕도 덜 먹는(?) 영주님이었다.
“자, 말도 생겼으니 이제부터 운송 혁명을 일으켜 볼까?”
지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클로드가 나서서 분위기를 깨 버렸다.
“문제가 있습니다.”
“…….”
“문제가 있다고요.”
“……너 혹시 문제의 정령 같은 게 몸에 붙어 있는 거 아니야? 왜 항상 문제가 있어? 너 어디서 저주받았니?”
‘너 때문이야! 너! 너! 너! 너 때문에 일이 항상 촉박하게 돌아가서 그런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안 통하니 클로드는 그냥 짜증 나는 속마음을 숨기고 답했다.
“……아무튼 문제가 있습니다.”
“알았어, 문제가 뭔데?”
“말이야 많으면 좋으니 이번 출정도 크게 반대하진 않았습니다만……. 생각했던 것보다 구해 오신 말이 너무 많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냐?”
“그것도 적당히 많아야 좋죠. 당장은 저 엄청난 말들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마구간도, 관리를 할 사람도 현저하게 부족해요.”
클로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말을 가져왔다고 그냥 내버려 두는 건 말이 안 된다. 1만 필이 넘는 말을 꾸준히 관리하려면 엄청난 재원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 정도야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답했다.
“마구간 많이 짓고 사람들 잔뜩 뽑아. 그러면 되잖아?”
“……그럴 돈은 뭐 땅 파면 나온답니까? 지금도 영지 개발과 군사력 증강 사업에 엄청난 돈이 나가고 있습니다. 저 정도 말을 유지하려면 돈이 더 필요해요.”
식량과 화장품을 팔아 무지막지하게 돈을 벌고는 있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었다. 벌어들이는 돈에 못지않게 많은 돈을 자원을 구매하는 데에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식량도, 화장품도 팔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식량은 인부들의 보수를 주는 데도 쓰이지만, 펜리스와 페르디움 두 개 영지의 영지민을 먹이는 데도 쓰이다 보니 소모량이 만만치가 않았다.
한 마디로 추가적인 돈벌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클로드는 새로운 제안을 건넸다.
“이번에 얻어 온 말의 반 정도는 판매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절반만 있어도 자재를 운송하고 기마병을 양성하는 데에는 충분할 겁니다. 말은 비싸게 팔 수 있으니까 재원도 확보되고요.”
“싫어.”
단호한 지셀의 거절에 클로드는 생각했다.
‘……그럴 줄 알았다. 너는 사람 말을 안 들으니까!’
그래도 클로드는 발작하지 않았다. 영주는 쓸데없이 돈이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 부분을 노릴 생각이었다.
“지금도 무리해서 유지하려면 할 수는 있습니다. 어쨌든 식량을 더 팔아서 재원을 마련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우리한테는 당장 쓸모가 없을 겁니다.”
“왜?”
“말을 탈 사람이 부족하니까요. 도로를 건설하고 말을 잔뜩 구하면 뭐 합니까? 실제로 그걸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현저하게 부족한데.”
“흐음…….”
“거기에 우리 영지는 일이 너무 많거든요. 현재 자재는커녕 식량과 고기의 운송도 점점 늦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남은 말들은 마구간에서 놀고먹고 잠만 잘걸요? 젠장! 부럽잖아!”
말만 있다고 끝이 아니다. 그걸 다룰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가난하게 살았던 영지민 중에서 말을 탈 줄 아는 자는 많지 않았다.
병사들은 죄다 보병만 얻어와서 별 도움도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자재 운송도 마차를 끌거나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은 죄다 긁어모아 겨우겨우 해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급할 때는 기사들까지 자재 운송 업무에 투입될 정도였다.
“이 두 가지 문제 때문에 저희는 그 많은 말들을 당장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돈만 나가는 셈이에요. 일단 당장 쓸 수 없는 건 팔고 나중에 다시 늘리는 식으로 가야 합니다.”
클로드는 이번에야말로 영주도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조건 많이, 크게 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뭐든 상황에 맞게 해야 한다.
당장 쓸 수가 없는데 규모를 키웠다가는 오히려 더 손해를 보게 된다. 그건 당연한 진리였다.
하지만 지셀이 누구인가? 그는 필요하다면 상황도 강제로 비틀어 버리는 사람이다.
얻어 온 말을 다 못 쓴다고? 그러면 써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버리면 된다.
“마구간도 짓고 관리인도 늘리고 말 타는 사람도 육성하면 된다.”
“아니, 그러니까 언제 육성하냐고요.”
말을 잘 타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기마술을 배워야 한다. 그냥 타고 움직이는 수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빠르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숙련된 기마병을 키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마병을 육성하는 계획 자체는 오래전부터 세워 두었고, 그건 다른 가신들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계획을 시행하는 데에는 지금 얻어 온 말의 절반만 있어도 충분했다. 더 있어도 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클로드의 말을 끊고 제 할 말만 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한테 다 계획이 있거든. 전부 해결할 수 있다.”
“무슨 계획이요?”
“첫째, 도로를 이용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겠다.”
“도로……. 새로운 사업이요?”
클로드를 비롯한 가신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저 입에서 나온 문제 해결 방식도, 사업 방식도 하나같이 정상적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지셀은 그런 눈빛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영지 내의 도로는 거의 다 완성됐지?”
“네, 작은 마을과 오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시와 성, 마을들은 연결이 다 된 상태입니다. 우리 영지만이 아니라 페르디움까지요.”
“그걸 이제 수도와 친왕파, 중립 영주들의 영지까지 확장하고 연결한다. 공작파 귀족들과 수상한 놈들은 빼고.”
어마어마한 대공사였다. 역사에 나오는 황제나 할 법한 짓이었다. 아무리 돈과 인부가 넘쳐나도 섣불리 시도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친왕파 귀족들의 영지와 수도까지 전부 도로를 연결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도로 건설은 단순한 작업이야. 단순한 작업은 생각보다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어떻게요?”
“돈하고 사람을 갈아 넣으면 금방 끝나. 다들 해 봐서 알잖아?”
“…….”
가신들은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펜리스 영지는 진짜 돈하고 사람을 갈아 넣어서 엄청난 속도로 발전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기간이야 그렇다 쳐도, 그걸 영주들이 허락하겠어요? 우리가 마음대로 도로를 깔겠다는 걸?”
“도로 깔아 주면 좋은데 왜 거절해? 그리고 안 하면 어쩔 건데?”
“네? 뭘 어째요?”
“왕실과 브랜포드 후작이 하라고 하면 자기들이 어쩔 거냐고.”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지셀이 부탁하면 브랜포드 후작이 거절할 리가 없었다. 도로를 잘 닦아 두면 군사 목적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을 테니까.
누가 쳐들어오는 데 쓸까 봐 도로를 안 까는 영주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모든 친왕파의 영지를 연결한다면 오히려 지원군을 부르기도 쉬워질 테니 다들 찬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셀의 원대한 계획을 듣고 클로드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저 영지들을 모두 연결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들까?
“돈은요! 돈이랑 사람은 어디서 구하는데요? 우리가 아무리 돈과 사람이 넘친다 해도 그 정도로 큰 공사를 감당할 수는 없어요!”
“그거야 우리 인부들 말고도 다른 영주들이 각자의 영지에서 인부들을 지원해 줘야지. 물론 돈은 우리가 대 주고, 대가로 이용료를 받는다. 왕실을 통해 도로 이용료 징수권을 받아오는 거야. 그럼 돈이 얼마나 벌릴지 상상이 가?”
꿀꺽
.
클로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도로가 제대로 깔린 곳은 흔하지 않다. 그렇기에 운송과 이동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말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도로를 완성하고 이용료를 징수한다면?
도로 위에서 움직이는 물류와 사람들이 곧 돈이 되어 펜리스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구상으로만 치면 정말 획기적인 사업은 맞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말이다.
“……인력도 각 영지에서 조달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우리한테 그만한 돈이 있어요?”
그러자 지셀이 별거 아니라는 듯, 자신만만한 웃음으로 답했다.
“우리 돈도 쓰고, 지분을 나눠 주는 방식으로 로잘린 아가씨하고 메리엘 누님한테 투자하라고 하면 돼. 요새 거기 무슨 투자 모임도 있다며? 귀족들 돈 다 끌어오면 되지. 쥬아나 교단도 도와줄 거야. 사제들 있으면 공사가 더 빨리 끝나는 거 잘 알지?”
포리스코는 피로한 인부들을 회복시켜 줄 사제들을 대량으로 파견해야 할 것이다.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
말하는 게 아주 거침이 없었다. 남들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이미 인맥까지 빵빵한 영주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원대한 계획에 다들 멍하니 있자, 지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 그리고 둘째. 도로 징수권 사업이 끝이 아니야. 도로를 다 깔면 넘쳐나는 말들을 이용해서 배송 사업을 시작하는 거지.”
“……배송 사업이요?”
“그래, 내가 벌써 이름도 정했어.”
“그게…… 뭔데요?”
모두가 기대 반, 걱정 반 섞인 얼굴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셀은 그런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펜리스 화살 배송. 어때?”
그 노골적이고 천박한 이름에 모두가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