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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241화 (241/269)

241화 나에게 바쳐라. (1)

콰앙!

마수의 숲 인근에 사는 대부족, 태양돌 부족의 지도자 워로카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탁자가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부서졌다.

루타니아 왕국의 군대가 이곳을 토벌 중이라는 소식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는 큰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곳의 모든 부족을 통일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

그래서 시간을 들여 주변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부족들이 이렇게 하나둘씩 토벌되면 자신이 먹을 게 없어진다.

아니, 지금은 자신의 부족마저 위험해진 상황이었다.

“핏빛 악마라고?”

워로카의 물음에 옆에 있는 전사가 답했다.

“네, 전설에 나오는 그 악마라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놈이 그렇게 강하다는 말인가?”

“소리바람 부족과 연합한 11개의 부족이 단 한 사람의 전사도 남기지 않고 전멸했다고 합니다. 쿠스투 또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

워로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도 이 북방에서 강하기로 유명한 대전사였다. 하지만 한 번에 열 개 이상의 부족을 상대하는 위업을 달성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쿠스투가…… 죽었다고?”

“네, 그것도 핏빛 악마와 일대일 대결에서 패했다고 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부족 연합을 피해 없이 이겼다는 것보다, 쿠스투를 일대일로 상대해 이겼다는 게 더 믿기지 않았다.

쿠스투는 자신과 북방 통일을 다투는 경쟁자였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워로카도 잘 알고 있었다.

홀로 수십의 대전사를 상대할 수 있다고 알려진 자다. 자신도 일대일로 그를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소리바람 부족과의 싸움은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게 아닌가.

“역시 왕국군이군. 마음먹고 나오면 소수인 우리가 당해 내기 힘들어. 거기에 쿠스투까지 처치할 수 있는 강자를 보내다니.”

투덜대던 워로카가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움직인 거지? 북방은 페르디움 한 곳에 맡긴 게 아니었나? 분명 귀족들끼리 서로를 견제하느라 대군을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야만인들도 루타니아 왕국의 상황은 소문으로나마 들어 알고 있었다.

루타니아 왕국에서 북방의 페르디움을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를 꾸리는 걸 가장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음 놓고 자신들끼리 싸우고 약탈을 했던 것이다. 그들이 아는 한, 페르디움의 전력으로는 절대 자신들을 토벌하기가 불가능했으니까.

워로카의 말에 옆에 있던 전사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게…… 왕국군이 움직인 게 아니랍니다.”

“뭐? 그럼 누가 움직였다는 거냐? 다른 대영주가 움직였다는 건가?”

“아닙니다……. 페르디움의 병력만 온 게 맞습니다. 핏빛 악마는 페르디움 백작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

워로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전사들은 페르디움을 호구라 부르며 언제나 우습게 보았다. 페르디움은 전력이 부족해 항상 그들의 공격을 막기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절대 이렇게 먼저 쳐들어온 적은 없었다.

워로카도 페르디움을 낮잡아 본 건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부족을 통일하면 반드시 북방 요새를 함락하고 왕국으로 향하는 교두보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 호구 놈들이 갑자기 이렇게 강한 기세로 북방을 휩쓸고 있다니, 조상님들이 알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게다가 아들을 어떻게 키웠길래 그런 괴물 같은 놈이 나왔단 말인가?

“그놈들이 그간 몰래 힘을 모으고 있었구나. 이대로 싸우면 필패다.”

워로카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자신도 절대 11개의 부족과 동시에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 그것도 피해를 전혀 내지 않고서 말이다.

대부족이라 해도 천 명이 조금 넘는 전사를 거느리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의 전력으로 페르디움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무력하게 토벌당할 수도 없다. 내 대에서 부족을 끝장낼 수는 없어.’

적이 아무리 강해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것이 전사의 미덕이다. 그냥 목숨을 내주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의 꿈도 못 이루고 죽을 수는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워로카는 옆에 있는 전사에게 말했다.

“검은 구름 부족과 산울림 부족에게 연락해라. 잠시 싸움을 멈추고 힘을 합하자고.”

“그, 그들이 받아들일까요?”

“외부인에게 죽기 싫으면 받아들여야지. 그것도 핏빛 악마라 소문난 놈이 있다면.”

두 부족은 이 근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부족들이었다. 그들은 태양돌 부족과 여러 해를 싸우며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워로카는 그들이 자신들과 손을 잡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외부의 적에게 죽는 건 큰 수치니까. 그보다는 잠시간의 인내를 택할 것이다.

워로카는 비슷한 방식으로 인근의 중소 부족들까지 모두 모았다. 다들 소문을 들었는지 당분간 힘을 합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모인 전사들만 물경 7천에 이르렀다.

핏빛 악마의 군대가 아무리 강해도 이 정도 숫자라면 쉽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전사들은 모았다. 하나……. 이대로 싸워도 되는 걸까?’

워로카는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상대는 5천이 넘는 전사들을 단번에 전멸시키고 쿠스투까지 죽였다. 7천이나 모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지는 건 당연히 피해야 하지만, 싸우다 큰 피해를 본다면 이쪽이 이겨도 부족의 앞날이 불투명했다.

수많은 전사들의 목숨이 날아간다면 통일이고 뭐고 당장 생존하는 데만 급급해질 것이다.

‘가뜩이나 요새 식량이 부족한데, 전사가 없으면 마수의 숲에 들어가지도 못할 것이다.’

이들은 현재 마수의 숲 인근에 자리 잡고 숲 초입에서 나오는 자원들로 버티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대규모 전투를 수행하는 것도 무리였다.

다른 부족장들과 전사들은 전투 의욕을 불사르고 있지만, 워로카는 저들과 달랐다.

그는 분명 부족 최고의 전사이지만, 다른 야만인과 다르게 야심을 품은 정치가이기도 했다.

‘싸움과 약탈밖에 모르는 멍청한 새끼들.’

내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사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라 워로카가 부족 통일의 야심을 키울 수 있었던 거지만, 외부의 침입에 머리 쓸 놈도 없는 게 문제였다.

한참을 고민하던 워로카는 결국 타협안을 내놓았다.

“휴전 협상을 합시다.”

그러자 다른 부족장들이 큰 소리를 내며 삿대질을 했다.

“외부인과 협상이라니! 그 무슨 창피한 소리야!”

“전사로서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어차피 북방 요새 놈들은 전력이 부족하잖아! 이번 한 번만 이기면 저놈들은 끝이야!”

“페르디움 따위에 고개를 숙일 수는 없다!”

부족장들이 모인 천막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다들 전사의 자존심을 운운하며 싸우자는 말뿐이었다.

콰앙!

워로카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자 천막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이곳에서 일대일로 그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쿠스투와 함께 북방의 최강자를 다투던 인물이었으니까.

다른 부족장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결투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부족장들이 입을 다물자 워로카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5천의 전사를 별 피해 없이 갈아 버린 놈들이다. 거기에 대전사 쿠스투까지 일대일 결투로 죽였지. 싸워서 이길 수 있다 쳐도, 우리 쪽은 멀쩡할 거 같나?”

“…….”

“그 뒤에는 어떻게 할 거지? 전사들이 부족한 상태로 이 험한 북방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 같나? 떠돌이 몬스터 하나에도 벌벌 떨면서 살고 싶은가?”

누군가가 상관없다는 듯 외쳤다.

“우리는 위대한 전사들이다! 그깟 건 무섭지 않아! 전사의 긍지를 잃는 게 더 무서운 거다!”

“생각을 좀 해! 이 멍청한 새끼들아! 싸워 죽는 것보다 굶어 죽는 게 더 수치다!”

“…….”

사실 싸움을 피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 외에도 많았지만 워로카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들은 오직 자부심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니, 그 부분만 자극하면 워로카가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기는 쉬웠다.

사냥을 못 하고 가족들과 함께 굶어 죽는 건 전사들에게 나약함의 증거이자 최고의 수치 중의 하나였다. 가뜩이나 식량난이 더 심해진 시기라 이 핑계만으로도 분위기는 금세 바뀌었다.

포기하지 못하고 반항하는 자도 있었지만 워로카는 협박과 회유를 곁들여 모두를 설득했다.

결국 협상을 하기로 한 야만인들은 북방 요새에 사신을 보냈다.

지셀과 함께 기사들의 훈련 상태를 확인하던 즈발터는 그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어, 정말 협상하자고 할 줄이야. 네 말이 맞았구나.”

“네. 협상을 잘 끝내면 아마 몇 년간은 북방 요새에 얼씬도 안 할 겁니다. 말을 안 듣고 소수로 약탈을 시도하는 놈들이야 있겠지만요.”

“그 정도만 해도 어디냐. 나는 그 정도만 되어도 정말 안심이다.”

언제나 영지민들의 피해를 걱정하는 영주다운 생각이었다.

이미 인근의 부족들은 전멸시켰다. 거기에 5천이나 되는 야만인 연합까지 없앴다.

다시 야만인들이 약탈을 시도한다 해도 예전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연신 벌어지고 있었다.

‘허허, 내가 정말 아들 하나는 잘 뒀다니까. 이런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았겠는가. 우리 아버지도 몰랐을 거야.’

즈발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결과라는 듯 무덤덤한 태도가 유난히 듬직하게 느껴졌다.

며칠 뒤, 북쪽 요새 앞의 넓은 평원에서 야만인들의 군대와 페르디움, 펜리스 군대가 대치하고 섰다.

양측 진영에 하얀 백기가 올라가고, 대표들은 곧 두 진영 사이에 준비된 테이블에 앉아 협상을 시작했다.

야만인들은 워로카와 몇 명의 전사들이 대표로 나왔고 페르디움 측은 즈발터와 지셀, 그리고 몇 명의 측근들이 함께했다.

“태양돌 부족의 부족장 워로카다. 우리는 더 이상의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말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그의 얼굴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일그러져있다.

정치적 이유와 야심 때문에 휴전을 제안했지만, 그도 전사로서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즈발터도 그간 쌓인 감정이 많았기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좋다. 그쪽에서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을 들어 보지.”

“5년간의 휴전. 루타니아 북부를 향한 약탈을 멈추고 다른 루트를 찾아보겠다. 소수 부족의 약탈 시도도 최대한 내가 통제하겠다.”

“그간 우리를 그렇게 괴롭혀 놓고, 다른 조건도 없이 약탈을 멈추겠다는 게 전부인가?”

“그쪽에도 나쁜 조건은 아닐 것이다. 우리를 막기 위해 많은 군비를 쓰고 있지 않은가. 마음도 더 편해질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나? 우리와 계속 싸워서 그쪽에도 좋을 건 없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 때려 놓고 이제 안 때릴 테니 화해하자는 뜻이었다.

오만한 태도였지만 그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페르디움이 항상 가난했던 건 마수의 숲과 야만인들을 막는 데 돈을 전부 썼기 때문이니까.

5년은 생각보다 짧긴 하지만, 페르디움으로서는 그 정도도 충분했다. 지셀에게 얻은 식량과 마나 연공법이 있으니 그동안 내실을 다지면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었다.

즈발터는 생각을 마치고 물었다.

“네놈들을 어떻게 믿지? 약속을 어기고 갑자기 공격할 수도 있지 않으냐.”

그러자 워로카가 분노한 표정으로 외쳤다.

“나는 대전사다!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말은 못 했지만, 실제로 워로카는 페르디움에 줄 게 없었다.

약탈하며 인근을 떠돌아다니는 부족들의 특성상 본래도 자원을 크게 쌓아 놓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자기네들끼리도 싸우며 약탈을 하겠는가.

거기다 요새는 식량난도 더 심해졌다. 그러니 뭘 달라고 해도 줄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전사의 약속과 자존심밖에 내세울 게 없었던 것이다.

“크흠…… 고작 그 정도라니.”

즈발터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도 야만인들의 사정과 대전사의 자존심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제시한 조건이 그들의 최선이라는 것도.

어차피 더 싸울 생각도 없었으니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도 좋을 거 같았다.

저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혹여나 협약을 어긴다 해도 평소와 같은 상황이 벌어질 뿐이다.

지금처럼 대규모로 모인 야만인들을 상대하다 큰 피해를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일단 한숨을 돌리고 다시 정비할 생각으로 즈발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을 추구하는 그다운,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좋다, 그러면 협상문을 작성…….”

즈발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지셀이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장 말 5천 필, 추가로 매년 200필의 말을 나에게 바쳐라. 기간은 5년이다.”

“뭐, 뭐?”

워로카가 당황한 얼굴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좋게 끝나나 했더니 갑자기 엉뚱한 놈이 끼어들었다.

기분이 상한 그는 잔뜩 인상을 쓰며 답했다.

“네가 뭔데 너한테 바쳐? 싫다면?”

워로카의 대답에 지셀은 오만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거절하면 오늘 네놈들은 여기서 모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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