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먼저 쳐야겠습니다. (1)
“크아악! 이놈들 뭐야!”
“모여! 어서 모이라고!”
“어디서 나타난 거야!”
신나게 약탈을 즐기던 야만인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기사들에게 공격당하고 혼란에 빠져 버렸다.
본대가 북방 요새의 병력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경계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오직 약탈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탓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사방에서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뒤늦게 대응해 보려고 했지만 상대가 너무나 강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마나를 쓰고 있으니, 도끼로 막아도 도끼가 깨지고 목이 날아갔다.
야만인 전사는 분명 강하다. 혼자서 병사 셋 이상을 감당할 수 있다고 평가되곤 한다. 하지만 병사가 열 명이 모여도 기사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이 새끼들!”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던 야만인 전사 하나가 도끼를 들고 자신이 붙잡은 사람의 목을 치려 했다.
일단 화풀이로 가까운 사람부터 죽이려는 잔인한 습성이었다.
콰앙!
그러나 도끼가 제대로 휘둘러지기 전에 그의 머리는 어디선가 날아온 창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창을 집어 던진 지셀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알겠습니다!”
가장 크게 대답한 루카스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번개같이 야만인들을 향해 달려갔다.
콰앙! 콰앙!
“커어억!”
루카스가 창을 찌를 때마다 야만인들의 투구와 머리가 그대로 박살 났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야만인 전사 하나는 반드시 죽었다.
“약한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나한테 덤벼라!”
루카스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불길 사이로 치솟아 오른다.
지셀의 지도 아래에서 그의 실력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늘고 있었다.
과연 전생에 창 하나로 마스터에 오른 인물답게 뛰어난 재능이었다.
“뭐, 뭐야! 이 새끼 왜 이렇게 강해!”
야만인 전사들은 루카스의 실력을 목도하고 깜짝 놀랐다. 창이 어찌나 빠른지 도끼로 막으려고 시도하기도 전에 머리와 몸을 뚫고 들어왔다.
폼 잡기 좋아하는 루카스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그는 정말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다른 기사들도 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며 야만인 전사들을 처치했다. 급한 마음에 다들 마나를 아끼지 않았다. 이미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뒤였기 때문이다.
야만인 전사들도 살기 위해 발악했지만 백 명이 넘는 기사들의 기습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크아아악!”
“네놈들을 저주할 것이다!”
“우리의 동료들이 반드시 복수할 거다!”
야만인들은 하나둘씩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약탈대는 인원 자체가 많지는 않았기에 토벌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야만인들을 모두 처치하고도 기사들은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마을 전체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 때문이었다.
“으아아앙! 엄마!”
“여보, 여보! 눈을 좀 떠 봐!”
“아니야! 이건 아니야! 제발 좀!”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이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치솟은 불길은 이들의 터전마저 앗아갔다. 살아남은 이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마을을 재건하거나, 다른 마을에 합류해 눈치를 보며 사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것이 진정한 북부의 현실이었다. 이들은 척박한 환경 외에도 몬스터나 야만인들의 위협에도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야만인들은 페르디움이 막아 내고 있었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번처럼 야만인들이 연합을 하거나 감시를 피해 몰래 들어오면 피해를 보는 마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까지 내려올 정도면, 그놈들도 식량 때문에 다급하긴 한가 보군.’
마을들은 옛날에 비해 그 위치가 꽤 남쪽으로 내려왔다. 즈발터가 약탈 피해를 줄이려고 오래전부터 이주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약탈당한 마을들은 아슬아슬하게 이주 정책에서 벗어났던 마을들이었다.
이들도 남쪽으로 이주시켰다면 좋았겠지만, 마을 하나를 통째로 옮기는 건 상당히 많은 재원이 드는 일이다. 척박한 북부에서 살 만한 땅을 찾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가난한 영지에서는 지원도 많이 해 줄 수 없다. 페르디움도 최근에야 형편이 조금 나아졌을 뿐이니까.
삶의 터전을 쉽게 버릴 수도 없고, 버린다 해도 살아갈 곳이 없으니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야만인들에게 위협받는 근처의 다른 영지들은 자신들도 가난하니 협조조차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
‘인부들을 더 많이 보내서 지원해 줘야겠어.’
펜리스 영지는 동떨어져 있는 마을들을 성과 요새 주변으로 전부 옮기고 있다. 전쟁뿐만 아니라 차후에 올 환란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페르디움도 천천히 펜리스 영지처럼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인부들을 보내 도로를 깔아 주고 주요 위치에는 시설을 세워 주고 있었다.
준비할 게 많기는 하지만, 이번에 피해를 본 마을이 꽤 많을 테니 지원 규모를 키워 줄 생각이었다.
“돌아가자, 살아남은 자들은 요새로 데리고 간다.”
이대로 이들을 버려두고 가면 살아갈 수 없다. 당장 내일의 생활도 힘들 것이다.
당분간 요새에 머물게 하다가 적당한 마을에 지원 물자와 함께 보내 줘야만 했다.
말에 올라탄 지셀이 떠나려고 할 때, 한 아이가 앞을 막았다.
아까 지셀이 구해 준 소년이었다.
소년을 바라보며 지셀이 물었다.
“할 말이 있느냐?”
“저희를…… 지켜 주신다고 하셨죠?”
“그래, 오늘 일은 안타깝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약속하지.”
지셀의 단호한 대답에 소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저는 지켜 주지 않으셔도 돼요.”
“무슨 뜻이지?”
“저도…… 저도 함께 싸우고 싶어요.”
“나이가 몇이냐.”
“15살입니다.”
지셀은 가만히 소년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지나면 성년이 될 나이다. 하지만 워낙 못 먹고 자라서 그런지 체격이 왜소해 나이보다 어려 보였다.
“너에게는 아직 무리다. 충분한 식량을 지원해 줄 테니 먼저 잘 먹고 조금 더 큰 뒤에 페르디움의 병사로 지원을…….”
말을 하던 지셀은 소년의 눈을 보고 멈칫했다.
저 눈빛이 뭔가 익숙했다.
아직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눈물을 글썽거리며 몸을 떨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숨겨져 있는 감정을 지셀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떠한 힘도 보태지 못했다는 죄책감.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다는 무력감.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
이제는 돌아갈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다는 절망과 후회.
그리고…….
“원하는 게 뭐냐.”
“복수입니다.”
“어떤 복수냐.”
“모든 야만인들의 죽음.”
“…….”
알고 있다. 저 눈빛과 저 감정을.
상대방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살의.
그것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로 타오르는 증오.
고통을 양분 삼아 자신을 끝없이 채찍질하고 결국에는 스스로마저 파괴하는 광기.
그것은 바로, 전생에 멸망한 영지를 보고 지셀이 품었던 눈빛과 감정이었다.
뚝.
소년의 부릅뜬 눈에서 글썽거리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소년은 절대 눈을 감지 않고 지셀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선 자만이 자신의 염원을 이뤄 줄 수 있는 걸 안다는 듯이.
그는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자신의 복수를 도와달라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뚝.
눈물이 또 한 방울 떨어졌다.
지셀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반응하는 방식은 다르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도 다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다르다.
이번처럼 큰 사건을 겪은 자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곤 했다.
반면 눈앞에 있는 소년의 태도는 자신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희대의 살인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목표를 제대로 잡는다면…….
어떠한 적에게는 절대 피할 수 없는 ‘공포’가 될 것이다.
소년이 품은 광기는, 그 자신이든 복수의 대상이든 어느 한쪽이 없어져야 끝나는 것이었으니까.
저 소년은 지셀이 도와주지 않더라도 이제 피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미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먹었을 테니.
“영지로 돌아갈 때 널 데리고 가겠다. 내가 특별히 지도해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될 거다.”
“상관없습니다. 그 정도도 못 버티면 죽는 게 낫습니다.”
그 말에 지셀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마치 전생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름은?”
“아렐입니다.”
지셀은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픽 웃었다.
아렐. 눈빛만큼이나 익숙한 이름이었다.
* * *
여러 사람이 열심히 활약한 덕분에 야만인들의 약탈대를 모두 찾아 박멸할 수 있었다.
분노에 찬 페르디움의 군대가 전사들을 잃은 부족을 찾아갔지만, 이미 소식을 들었는지 전부 도망간 뒤였다.
요새에 돌아온 즈발터는 의자에 털썩 앉아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피해가 있긴 했지만 이 정도에서라도 막아 낸 게 정말 다행이구나.”
말은 다행이라고 하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몇 년간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막아 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북부의 마을들은 약탈당한 적이 거의 없었다. 혹시나 공격당하더라도 페르디움군이 빠르게 추격한 덕분에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과 달리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니 즈발터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네 덕분에 이 정도에서 끝날 수 있었다. 고맙구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며칠 사이에 안색이 훅 나빠진 아버지를 보며 지셀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인생까지 버리면서 언제나 성실히 책임을 수행한다. 저 책임감이 자신을 옭아매고 고통스럽게 해도 버리지 못한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아들의 마음이 마냥 편할 수는 없는 법이다.
“조만간 영지에서 장비를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될 테니 추가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무너진 마을을 재건할 수 있게 자원과 인부들도 보내드리겠습니다.”
현재 요새에는 무너진 마을에서 온 피난민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적당한 곳에 새로운 마을을 건설해 이들이 자리 잡을 수 있게 할 예정이었다.
“그래, 고맙다. 네가 영지에 아주 큰 도움을 주는구나.”
즈발터는 예전처럼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금 너무나도 피로했다.
늙어서 털이 빠지고 이빨이 무뎌진 늑대는 초라하다. 즈발터는 수십 년간 이어진 책무에 짓눌려 그렇게 늙어가고 있었다.
잠시 마음을 추스른 그가 물었다.
“말을 확보하러 왔다고 했느냐? 이번 전쟁으로 꽤 많이 얻었으니 충분할 것이다. 모두 가져가거라.”
지셀 덕분에 승리했으니 전리품도 지셀이 챙겨가는 게 맞았다. 함께 싸우긴 했지만, 즈발터는 욕심부리지 않고 모두 넘겨줄 생각이었다.
그간 지셀에게 받은 게 훨씬 더 많았으니까.
그리고 페르디움은 병력이 적어 아직 말이 그렇게 부족하지도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클로드가 지셀에게 말했다.
“말을 2천 필이 넘게 확보했습니다. 이 정도면 당장 쓰기에는 충분합니다. 생각보다 금방 끝났군요.”
말 2천 필이면 루타니아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수다. 과연 6개 부족이 힘을 합쳤던 만큼 전리품의 양도 엄청났다.
야만인들이 연합해서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만한 양을 이렇게 쉽게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승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즈발터도 클로드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연합해 온 부족은 요새와 제법 가까운 지역에 자리 잡았던 부족들이었다. 그들이 없어졌으니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다. 우리도 그동안 전력을 정비하며 쉴 수 있겠어.”
루타니아에서는 야만인들이라고 뭉뚱그려 언급하지만, 사실 그들은 수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부족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야만인들끼리 싸우는 경우도 많았다.
이번 전투로 여섯 개 부족이 사라졌으니, 다른 부족들이 그들의 영역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울 것이다.
가까운 곳에 새로운 부족이 자리 잡기 전까지는 요새를 향한 공격도 훨씬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북방 요새는 오랜만에 정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하지만 지셀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전 아직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왜? 다른 할 일이 있느냐?”
“네, 할 일이 있습니다. 별다른 건 아닙니다.”
이미 큰 전투도 끝났다. 별다른 건 아니라는 말에 즈발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일이냐. 이곳의 정비라도 도와주고 갈 생각인 거냐? 아니면 마을의 재건? 어찌 됐건 네 병력이 도와주면 뭐든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놈들이 다시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