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아니, 넌 돌아가야 해. (2)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길리언이 지셀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출정 준비, 완료됐습니다.”
“좋아, 최대한 빨리 데이븐을 발루아 남작에게 데려다주고 식량을 전해 주도록. 아멜리아가 움직이기 전에 말이야.”
“알겠습니다.”
데이븐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길리언이 그를 끌고 행렬에 합류했다.
펜리스의 군대는 최대한 속도를 내 쉬지 않고 발루아 남작령을 향해 이동했다.
바로 그때, 아멜리아는 지셀이 데이븐을 데리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이를 깨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날을 맞춰서 데이븐을 미리 빼돌린 거지?’
지셀이 자신에 관해 꽤 많이 파악하고 있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예전에 자신에게서 2만 골드를 뜯어갔을 때도, 그저 어림짐작으로 떠보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움직일 시기까지 예측해서 데이븐을 빼돌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그전에 연회까지 열어 가며 연막을 쳤다고?
‘지셀 이 새끼가 기어코…….’
아멜리아의 속이 불같이 끓어올랐다.
그를 지켜보며 범상치 않은 놈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언제든 치울 수 있는 상대로 여겨 왔다.
그런데 이번에 지셀에게 제대로 한 방 먹으며,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았다.
지셀이 카발디 백작령을 차지한 뒤 그의 동태를 계속 감시했는데도, 보란 듯이 당해 버리고 말았다.
‘정보에서 너무 차이가 났어. 아니, 단순히 정보뿐만이 아니야.’
이 정도면 아예 자신과 해럴드의 움직임을 직접 보고 예측한 수준이었다.
아멜리아는 지셀이 지금까지 해낸 일들을 새삼 돌아보았다.
마수의 숲 개척, 페르디움 공방전에서의 승리, 화장품 개발, 가뭄 예측, 소문만 무성한 하늘을 나는 기구와 수많은 기사.
‘이게…… 과연 한 사람이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할 수 있는 일인가?’
아멜리아는 등줄기가 써늘해졌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셀이 세운 업적만 본다면 건국 신화에서나 나올 법한 영웅과도 비교할 만했다.
슬슬 가뭄에 대비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라 정말로 예측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이라면 지셀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어지간한 지식과 경험으로는 안 된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운까지 더해져야 한다.
으드득.
절로 이가 갈렸다.
묘한 패배감이 느껴졌다. 지셀이 자신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대비했다는 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야. 지나간 일에 후회할 필요 없어. 다시 갚아 주면 돼.’
‘생각하자, 생각해. 그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그놈은 평범한 놈이 아니야. 예측해야 해.’
‘내가 지셀이라면?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까?’
레이폴드를 완전히 장악하고 나면 해럴드와 함께 지셀을 공격해야 한다. 어쨌든 해럴드에게 있어서 현재 북부 제패의 가장 큰 걸림돌은 지셀이었으니까.
지셀도 그 정도는 예측했을 테니, 자신이 해럴드와 손을 잡지 못하게 막으려 할 것이다.
‘데이븐을 내세우면 이곳을 공격할 명분이 생기지.’
아멜리아는 가장 먼저 생각난 가능성에 관해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약혼녀를 협박해 2만 골드를 뜯어갈 정도로 쪼잔한 놈이다. 그런데 제 병력을 소모하는 손해를 감수한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누군가에게 데이븐을 맡기는 것.
“지도! 지도를 가져와!”
촤아아악!
아멜리아의 눈이 레이폴드의 인근 지역을 빠르게 훑었다.
7개의 봉신 남작령 중 4개 영지에서는 회유와 협박을 곁들여 충성을 받아 냈다.
이제 남은 곳은 세 곳. 아멜리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디지? 어디냐?’
후계자를 빼돌렸다는 건 결국 레이폴드의 내전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그걸로 자신의 발을 묶고 전력을 깎겠다는 뜻.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만 했다.
‘여기는 아니야.’
세 남작령 중 하나는 레이폴드 성과 거리도 그리 멀지 않고 전력도 약했다. 데이븐을 안전하게 보내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남은 곳은 두 곳.
둘 다 레이폴드와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거리만으로 보면 오히려 지셀이 차지한 카발디 백작령과 조금 더 가깝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아멜리아의 시선이 지도 한쪽에 고정되었다.
레이폴드의 최남단, 레이폴드의 방패라 불리는 곳.
레이폴드의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봉신이 버티고 있는 영지.
‘발루아 남작!’
만약 자신이 지셀이라면 반드시 데이븐을 이곳으로 보낼 것이다.
장기전에 버틸 수 있을 만큼 많은 식량과 함께.
아멜리아는 베르나프에게 손짓하며 급하게 말했다.
“당장 추격대를 꾸려…….”
그녀는 중간에 말을 끊고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주먹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미 늦었어.’
지금부터 병력을 모으고 출발해도 늦는다.
데이븐을 혼자 보냈다면 이미 발루아 남작령에 도착했을 테니 보내 봐야 소용이 없다.
식량을 함께 보냈다면 아직 도착하진 않았겠지만, 그만큼 상당한 병력이 따라갔을 테니 급히 모은 소수 인원으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상대는 오래전부터 제대로 준비하고 움직였다. 촉박하게 시간에 쫓겨 움직인다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본 지셀은 이제 절대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눈을 감고 잠시 마음을 다스린 그녀는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베르나프.”
“네.”
“발루아 남작을 제외한 남은 두 곳의 영주들에게 한 달의 시간을 주겠다고 통보해. 한 달 뒤에도 내게 충성 맹세를 하지 않으면 군대를 출정시키겠다고.”
“발루아 남작에게는 연락하지 않으실 겁니까?”
“의미 없으니까. 바로 출정 준비를 해. 그는 성에 틀어박혀 안 나올 테니, 공성 장비 위주로 확실히 준비해. 내가 직접 가서 쓸어 버릴 테니까.”
그러자 악티움 상단의 상단주, 콘라드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었다.
“발루아 남작은 명성 높은 지휘관입니다. 차라리 설득을 해 보시는 게…….”
“그는 끝까지 항전할 거야. 원래 그럴 사람이니까. 그리고…….”
아멜리아는 서늘한 눈빛을 내비치며 말을 이었다.
“데이븐도 그곳으로 갈 거야. 내가 직접 가서 목을 날려야겠어.”
* * *
“좋아, 잘 되고 있군.”
길리언이 데이븐을 무사히 데려다주고 돌아오자, 지셀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멜리아는 결국 발루아 남작과 전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이쪽에 제대로 신경을 못 쓸 테니 수작을 부리기도 힘들게 된다.
발루아 남작은 신경을 분산시킨 채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자가 아니었으니까.
해럴드는 친왕파에 견제를 받고 있으니 당장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다.
‘이번 암살 실패로 또 큰 손해를 봤으니 이를 갈며 다른 방법을 찾겠지.’
양쪽 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지셀은 이때를 틈타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 전념할 생각이었다.
현재 영지에는 대형 부화기가 많이 늘어나 닭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생산되고 있었다.
고기가 넘쳐나니 영지민들을 비명을 지를 정도로 기뻐했다.
“역시 우리 영주님이야!”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다 하셨지?”
“고기가 넘쳐나다니! 내 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영지민들에게 고기는, 먹기는커녕 보기도 힘든 것이었다. 빵도 제대로 못 먹는 판에 고기는 무슨 고기란 말인가?
본래도 생산량이 많지 않아, 거의 귀족들과 기사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들마저도 가뭄이 덮친 뒤에는 고기를 쉬이 먹지 못했다. 가축들의 피해도 상당했던 탓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고기가 사방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비록 닭고기뿐이지만, 영지민들은 그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워했다.
특히 체력 훈련을 받던 엘프들은 오랜만에 고기를 실컷 먹으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시발……. 왜 이딴 게 기쁘지? 명품을 받은 것도 아닌데.’
‘우리는 원래 고급 음식만 먹었었다고…….’
‘진짜 이 거지 같은 영지, 너무 짜증 나…….’
맛있는데 눈물이 난다. 특히 눈앞에서 혼자 100마리나 처먹고 있는 고든이란 새끼는 그냥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났다.
“자! 다 먹었으면 바로 운동을 시작하자! 이걸 빨리 흡수해야 근육이 되는 거거든! 오늘도 기합 있게 하자고! 근손실 안 오게!”
인간 같지도 않은 발언에 엘프들은 눈을 감았다.
‘토한다. 이 새끼야…….’
‘제발 상식적으로 운동을 하자…….’
‘아, 오늘도 한바탕하겠네.’
엘프들의 예상대로, 분노조절 ‘장인’ 아스콘이 벌떡 일어나 욕을 갈겼다.
“야이, 싯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야! 나이가 들면 소화 능력이 안 좋은 거 모르냐? 우리가 너처럼 위장까지 무식한 줄 알아?”
그는 장인답게 욕을 해야 할 사람과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무척 잘 구분했다.
‘미친 영주, 예쁜 사제, 잔소리 집사장, 하녀 마법사, 최고 영감과 꼰대 영감. 이렇게만 빼면 돼.’
그 외에는 전부 아스콘에게 욕을 거하게 먹었다. 특히 카오르란 놈은 욕을 들을 때마다 반응이 무척이나 찰졌다.
자신을 죽이지 못하니 혼자서 지랄 발광을 하는데, 그거 구경하는 맛이 일품이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다 건드려 봤지만, 그때마다 영주에게 불려가 지옥을 맛봤다. 마지막으로 불려갔을 때는 증조할아버지와 세계수가 함께 마중 나왔었다.
‘특히 피오테인지 뭔지 하는 예쁜 사제 년? 아니, 놈이었나? 아무튼 그 새끼는 절대 건들면 안 돼. 특별 관리 대상 같아. 욕하는 맛이 정말 좋았는데.’
욕으로 몇 번 피오테 눈에서 눈물 뽑아낸 걸 들키고 나서는 진짜 땅바닥에 영원히 매장당할 뻔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고든은 건드려도 괜찮다는 판단이 확실하게 들었다. 카오르한테도 마음대로 욕하는데, 고든 정도면 아스콘에게는 밥이었다.
과연 고든은 욕을 먹고서도 입술을 깨물며 손만 부들부들 떨었다.
죽여도 안 되고, 심하게 다치게 해도 안 된다. 기껏해야 몇 대 때리는 정도밖에 못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 아스콘이란 놈은 수상할 정도로 맷집이 좋았다. 몇 번이나 때려도 벌떡 일어나 욕을 갈기니,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나한테 욕하지 마!”
결국 고든은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크헉!”
아스콘은 나동그라지면서도 욕을 쉬지 않았다.
“너희 어머니 수프 존나 못 끓이시더라! 먹고 개 토했다! 싯팔!”
“우리 엄마 욕도 하지 마! 이 미친 엘프 새끼야!”
고든의 주먹이 한 번 더 날아갔지만 아스콘의 욕설은 끝이 나지 않았다.
구경하던 엘프들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잡아먹으면 잠도 못 자고 훈련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요새 고기를 많이 먹어서 확실히 전보다 체력이 좋아지긴 했는데, 그만큼 아스콘이 날뛰는 시간도 길어졌으니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엘프들을 비롯해 영주성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넘쳐나는 고기 덕분에 부쩍 건강해졌다.
하지만 대형 부화기가 영지 전체에 들어선 건 아니었다. 아직은 어마어마한 단가가 들어가서 보급이 쉽지 않았다.
재료도 많이 들지만, 제작 과정에 마법사들이 무조건 참여해야 했기에 시간도 상당하게 걸렸다.
그런데 이걸 페르디움에도 지어 줘야 한다.
결국 마을마다 대형 부화기를 보급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일단은 주요 도시에서 각 마을로 나눠주는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기반 시설이 도로.
지셀의 지시로 수많은 인부가 도로 건설에 달라붙어 빠르게 공사를 진행했다.
페르디움에서도 적극적으로 병사와 인부들을 제공했기에 주요 마을들과 각 성 사이를 연결하는 도로는 어느 정도 정리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 도로들을 아직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지셀은 가신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도로도 생겼으니 운송 혁명을 시작하겠다. 운송이 빨라야 영지 발전도 빨라지니까.”
그 말에 클로드가 물었다.
“전에 말했던 대로 대량의 말들을 구해 오는 건가요?”
“그래. 지금 영지에 있는 말은 거의 군마로만 쓰고 있잖아? 말이 부족하니 운송도 늦어질 수밖에 없지.”
식량과 고기도, 여기저기서 쓰는 공사 자재도 부피가 크다 보니 사람 손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토의 크기에 비해 말이 현저하게 부족하니 제때제때 빠르게 지원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지금 펜리스 영지 내의 공사 현장에서 가장 시간을 잡아먹는 부분은 자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지셀도 이제 슬슬 말을 구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꼭 운송에 필요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마병을 대규모로 양성하려면 말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해.”
군사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기마병도 늘려야 했다. 지금 이 영지의 병력은 대부분이 보병이었으니까.
클로드는 잘됐다 싶어 전에 묻다 만 얘기를 꺼냈다.
“어떻게 구하시려고요? 나중에 알려주신다고 했잖아요.”
“반대 안 한다고 했지?”
“아, 그럼요! 지금까지 영주님이 하신 일들이 다 성공했는데 왜 반대하겠어요?”
클로드도 이제 간덩이가 좀 부었다. 하도 비상식적인 일을 많이 접해서 이제는 그냥 될 대로 돼라, 하는 마음이었다.
다른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동의했다.
“말이야 꼭 필요하니까요.”
“영주님이라면 다 방법이 있겠죠.”
“우리 영주님 하고 싶은 거 다 하시라니까요.”
지셀은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역시 진심은 언젠가 통하는 법이다. 이제 귀찮고 시끄러운 과정을 조금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화끈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아버지가 저기 북방 요새에서 고생을 좀 오래 했잖아?”
“네, 그렇죠. 야만인들이 수시로 약탈하러 오니 그거 막고 감시하느라 아주 고생 많이 하셨죠. 돈도 없고 병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말이죠.”
“그래, 우리 가문의 선조들이 참 고생 많이 했지. 그것들 때문에 항상 영지가 가난했단 말이야. 원래 가난했는데 걔들 때문에 더 가난해진 거지.”
클로드는 대답하지 않고 눈알만 뒤룩뒤룩 굴렸다.
불안하다. 말 구하러 가자는데 왜 저렇게 사설이 길까?
영주가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자주 하긴 했지만, 나중에 보면 다 필요한 말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말을 늘인다는 건? 뭔가 좀 위험한 시도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클로드가 눈치만 보고 있자, 지셀이 툭 던지듯 말했다.
“출정 준비 좀 해라.”
“왜요? 갑자기 웬 출정이요? 말을 구하는데 왜 출정을 해요?”
지셀은 뭔가 벼르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야만인들 기강 좀 잡고 와야겠다.”
‘그걸 왜 니가 잡으세요!’
클로드는 머리가 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