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일을 몇 가지나 처리한 거야? (2)
현재 루타니아 왕국군 편제는 4개의 군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수도 카르데니아의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지역군은 전쟁이 일어나면 각 지역의 영주들을 소집하여 새로 편제한다.
단, 지역군의 사령관은 평시에 미리 선발해 여러 상황에 대처하는 전략을 수립해 둔다. 급히 사령관을 선발하고 지휘하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역군 사령관이라 해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그저 이름뿐인 자리였다.
하지만 이 직책에는 단 하나의 강력한 권한이 딸려 있다.
바로 전시에 해당 지역의 모든 영주들을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리고 현재 북부군의 사령관은 데스몬드 백작이었다.
지셀은 이 자리부터 뺏을 생각이었다.
‘차후 공작가와 싸우려면 그 이름이 필요해. 환란의 시기에도 도움이 되겠지.’
지금은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이지만, 전생에는 엄청난 권한을 얻었었다.
반란에 성공한 델파인 공작가가 각 지역의 병사들을 강제로 차출해 영주들의 힘을 약화하고, 왕국의 상비군처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공작위에 올랐던 해럴드 데스몬드가 자연스럽게 북부군 사령관 자리를 연임했다.
지셀은 데스몬드 백작이 전생에 했던 방식 그대로 북부 전체를 손에 쥘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알 리 없는 브랜포드 후작으로서는 지셀의 부탁이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이유가 있느냐?”
“어차피 저와 데스몬드는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상황을 보셨지 않습니까?”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할 거다. 여차하면 우리가 데스몬드를 직접 칠 수 있다는 걸 저쪽도 알고 있을 테니까.”
고마운 말이지만, 솔직히 믿음은 가지 않았다. 친왕파는 공작가 하나도 막기 벅찰 것이다.
그렇다고 그걸 말해서 굳이 자존심을 상하게 할 필요도 없으니, 지셀은 대충 다른 말로 넘겼다.
“데스몬드를 잡은 뒤에 다른 영주들을 누를 명분이 필요합니다.”
“명분?”
“네. 저는 친왕파의 기수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제가 북부 영주 전체와 전쟁을 계속 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그제야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자리일 뿐이다. 그때는 그 누구에게도 명령할 권한이 없으니까.
하지만 내전이 일어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내전도 전쟁은 전쟁. 지역군 사령관 자리는 혼란에 빠진 영주들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명분과 권위를 부여해 줄 것이다.
‘어차피 데스몬드 백작이 이를 드러낸 이상 쳐 낼 생각이긴 했는데…….’
이미 모든 영주가 공작가 쪽으로 넘어간 남부나 서부는 사령관으로 누굴 앉히든 의미가 없다.
하지만 동부와 북부의 일부 지역은 아직 공작가 쪽에 넘어가지 않고 잘 버티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아무리 이름뿐인 자리라 해도 공작가의 사람을 사령관으로 앉혀 둘 수는 없었다.
특히 북부는 펜리스 남작이라는 신선한 바람까지 부는 중이기에 더더욱 공작가의 영향력을 줄여야 했다.
잠시 고민하던 브랜포드 후작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북부 사령관은 이름뿐인 자리라 해도 전시에는 매우 강력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다. 데스몬드 백작이야 쳐내야겠지만, 그 자리에 너를 임명하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어차피 전쟁에서 이겼으니 이왕 이긴 김에 더 밀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뭐를 더 줘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고 계셨을 거 같은데요.”
뻔뻔한 지셀의 대답에 브랜포드 후작은 씨익 웃었다. 지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싸움에는 기세라는 게 있다. 친왕파는 공작가에게 연일 압박당하며 조용히 침몰해 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지셀의 승리는 분위기를 새롭게 전환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눈치를 보던 다른 영주들과 귀족들도 친왕파에 은밀히 선을 대기 시작했다.
막상 까 보니 친왕파도 만만치 않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 북부의 애송이가 그 정도라고? 그러면 친왕파의 저력은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 이 정도면 공작가가 아무리 강력해도 쉽게 친왕파를 누르지 못할 걸세. 어쨌든 명분은 친왕파 쪽에 있지 않은가?
― 역시 브랜포드 후작이야. 미리 2군단을 보내 데스몬드군을 막았다지 않는가? 데스몬드 백작이 공작파였다는 소문이 쫙 퍼졌어.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그냥 멍청하게 넘어갈 브랜포드 후작이 아니었다.
정치판에서만 수십 년을 놀며 정적을 제거해 왔던 그다. 지셀에게 확실한 보상을 주고 지금의 기세를 더 띄워 오래 끌고 갈 생각이었다.
‘자고로 사냥개는…… 겁이 없고, 사냥 실력도 뛰어나야 하는 법이지.’
눈앞에 있는 이 엉뚱한 놈은 확실히 그에 부합하긴 했다. 물론 사냥개인지 주인을 잡아먹을 미친개인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누군가를 앉혀야 한다면 이놈이 가장 낫긴 하지.’
연륜과 경험이 부족한 자에게 중책을 맡긴다고 또 한바탕 날 것이다. 그런데 또 아무리 생각해도 북부에는 이놈보다 더 나은 놈이 없었다.
정말 데스몬드 백작과 싸워서 이긴다면, 그때부터 지셀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대영주가 될 것이다.
‘보상으로 무엇을 줄지 고민하고 있긴 했지만……. 언제나 기가 막힌 타이밍에 와서 원하는 걸 받아 가는구나. 고약한 놈.’
거절할 수야 있지만, 거절하기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찾아온다. 보면 볼수록 참 신기한 놈이었다.
확실히 능력이 대단하긴 했다. 성격이 영 망나니 같아서 통제가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짧은 고민을 마친 브랜포드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자리를 주도록 하지.”
지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서로의 목표가 일치하는 이상 브랜포드 후작이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막상 일이 잘 끝나니 기뻤다.
얻을 걸 얻어 냈으니 적당히 식량이나 좀 선물로 넘겨주고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브랜포드 후작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카발디 백작령을 차지했으니 조만간 왕실에 너의 승작에 관한 안건을 올리겠다.”
“굳이 승작을 할 생각은 없는데요.”
지셀은 진심이었다. 그까짓 작위야 처음에 영주를 하기 위해 필요했지, 지금은 전혀 필요 없었다.
나중에 필요하면 공작이든 왕이든 힘으로 때려 부수고 차지해도 된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진지하게 말했다.
“……지역군 사령관 자리는 최소한 백작은 되어야 얻을 수 있다. 그게 왕국의 법이다.”
당황한 지셀은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아, 그런가요? 제가 법은 잘 몰라서. 아, 그런 법이 있었네?”
“…….”
하긴, 이 새끼는 법 없이도 살 놈이긴 했다.
뻔뻔스레 웃고 있는 지셀을 보며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카발디 지역을 차지하고 그곳이 더 넓으니 작위는 카발디의 이름을 그대로 승계하는…….”
“아니요, 그냥 펜리스로 할래요. 자꾸 바뀌면 사람들 헷갈립니다. 그리고 그 이름 마음에 안 들거든요? 어차피 펜리스로 다 통합했습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통합해 봤자 어차피 오랜 시간 불린 지역과 작위의 이름은 쉽게 사람들의 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놈이니 말해 봤자 잔소리일 뿐이다.
“현재 폐하께서는 와병 중이시니 재상과 상의해 승작식을 잡도록 하겠다.”
“네, 뭐……. 알겠습니다.”
사령관 자리만 받으러 왔는데 얼떨결에 백작으로 올라가게 생겼다.
나쁜 건 아니다. 뭐든 좋은 걸 더 가져서 나쁠 게 없다. 예상하지 못했던 선물을 받은 듯한 느낌이었다.
“네 아비의 봉신인데 같은 작위에 더 큰 세력이라……. 페르디움 백작의 기분이 좋진 않겠구나.”
“상관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공작이든 후작이든, 작위란 건 어차피 이름뿐이다. 힘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에게는 영 좋지 않아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봉신이자 아들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면 되겠느냐. 다른 이들이 볼 때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이다.”
‘……꼰대.’
지셀의 생각을 모르는 브랜포드 후작은 크게 인심을 쓴다는 듯 말했다.
“페르디움 백작의 승작도 같이 진행하도록 하겠다. 그리 알도록.”
“헐?”
“물론 명분은 네놈과 상관없이, 북부에서 오랜 시간 고생한 페르디움 가문을 치하하는 걸로 해 두겠다. 변경백은 애초 후작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으니 큰 반발 또한 없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건 아니니 그 정도 명분이면 먹힐 것이다. 다들 껍데기뿐인 작위라 생각할 테니까.
실제로도 그렇긴 하지만, 껍데기라도 얻는 게 어디인가?
‘이것이……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자의 면모인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이 시대 귀족들에게는 이런 사소한(?) 체면치레도 참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변방의 페르디움 백작가는 이제 후작가가 되었다. 그걸 노리고 부탁한 건 아니었지만, 브랜포드 후작의 성정상 그냥은 못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뭐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굳이 주겠다는 걸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 아버지가 많이 좋아하실 것이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나중에 네가 영지를 물려받으면 후작이 되는 거니 나쁠 것도 없다. 전공에 대한 상을 하나 더 주는 거라 생각해도 된다.”
‘상 하나 더 줄 거면 다른 걸로 주시지. 작위는 지금 급한 거 아닌데.’
지셀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라서 속으로만 투덜거릴 뿐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최대한 빨리 진행하도록 하지. 더 필요한 게 있느냐?”
“당장은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혹시 필요한 게 생기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입술을 실룩거렸다. 선물 하나도 제대로 안 가져오는 놈이 제 필요할 때면 기가 막히게 찾아온다.
‘이번 전공이 선물이라 치면 근래 받은 선물 중 가장 크긴 하군.’
그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졌다.
* * *
승작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진행하는 일이니 당연히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러졌다. 연회도 며칠 내내 이어졌다.
연회에 참여한 귀족 중 몇몇은 눈가를 바르르 떨며 지셀에게 인사를 했다.
“오, 오랜만입니다. 펜리스…… 백작님.”
“그, 앞으로, 으……. 잘 부탁드립니다.”
“승작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예전 연회에서 지셀을 은근하게 무시하던 하급 귀족들과 공자들이었다.
지셀은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다들 배가 아파서 죽을 지경인 게 티가 났다.
그들은 지셀이 이 정도로 잘 나갈 줄은 몰랐을 것이다.
‘적당히 이용당하다 버려질 줄 알았는데 계속 날아오르고 있으니 당혹스러워할 만도 하지.’
이제는 격차가 너무 나서 무시할 엄두도 나지 않는 듯했지만, 그 눈빛에서는 여전히 시기와 질투가 엿보였다.
‘공작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제발 죽어라.’
‘데스몬드 백작하고 한판 붙을 거라는 소문이 있어.’
‘데스몬드 백작 이겨라!’
속으로 저주하는 게 뻔히 보였지만 지셀은 굳이 신경 쓸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모두가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건 아니다.
지셀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고위 귀족들 몇몇은 진심으로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특히 에일즈버 백작 부부와 노튼 백작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정말 축하하네! 젊은 나이에 스스로 백작위를 쟁취하다니!”
“동생이 승리한 덕분에 우리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어.”
“언제든 필요한 게 있다면 말만 하게나. 내 온 힘을 다해 도와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고위 귀족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영애들이 우르르 지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간의 소문이 범상치 않으니 호기심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지셀의 곁에 있던 로잘린은 몰려드는 영애들 때문에 뒤로 밀려나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바닥을 주먹으로 치며 이를 갈았다.
‘분해! 뭔가 분해 죽겠어!’
쥬아나 교단의 사제들도 찾아왔다. 포리스코는 지셀을 보자마자 덥석 손을 잡고 웃었다.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과연 저와 함께 여신의 계시를 받으신 분답습니다!”
‘죽어, 제발 죽어 버려! 왜 백작까지 된 거냐고오오오오! 나는 어떻게 하라고오오오!’
속마음과 다르게 연기를 하는 게 아주 일품이었다. 이 정도로 표정 연기를 잘하는 놈은 전생에 본 것까지 쳐도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지셀은 속으로 낄낄대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아이고,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것도 다 여신님의 은총이겠지요.”
이런 식으로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자들을 일일이 상대하느라, 지셀은 연회 내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연회가 끝날 즈음에야 겨우 여유가 생긴 그는 메리엘을 찾아 궁금한 것을 물었다.
“아스콘이라고 알아요?”
“아스콘? 아, 그 분노조절장애 엘프? 어머, 설마 구했다는 엘프가 그놈이었어?”
“유명한가 보네요?”
“그럼, 얼마나 유명한데. 특별한 능력도 있거든.”
“특별한 능력이요? 뭔데요?”
“맞아도 끄떡없고 무척 잘 버텨서 걔 샀던 귀족들이 다 가르치길 포기했어. 욕도 되게 잘해.”
“아……. 괜찮은 능력이네요.”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콘은 잠깐 죽음의 공포를 느껴서 그런지, 지금은 말을 잘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소문이 자자한 놈이라면 계속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작식과 연회까지 잘 마무리한 지셀은 기분 좋게 영지로 돌아갔다.
‘피오테 녀석 발령장도 얻었고, 성물도 얻었고, 포리스코한테 목줄도 채웠고, 사령관 자리도 얻었고, 아버지도 승작되었고…… 크, 도대체 이번에 와서 일을 몇 가지나 처리한 거야?’
오랜만에 큰 소득을 얻었다. 기분이 안 좋으려야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지셀이 백작이 되어 돌아오자 펜리스 영지도 축제 분위기에 빠졌다. 벨린다와 퍼거스, 길리언 등 지셀의 측근들은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기사들과 병사들, 영지민들도 한마음으로 영주의 승작을 축하했다.
하지만 클로드는 넋이 나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뭐? 북부군 총사령관? 펜리스 백작? 우리 영주만 미친 게 아니라 세상도 미쳐 돌아가는구나. 진짜 좋은 건 혼자 다 먹고 다니네.’
클로드는 이 돌아 버린 세상 속에서 자신만 정상이라고 확신했다.
지셀이 들고 온 소식 때문에 시끄러워진 건 펜리스 영지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왕실의 사신을 맞은 북방 요새 또한 난리가 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