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기부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4)
포리스코는 바로 자신의 집무실로 이동하여 피오테의 발령장을 써 주었다.
“교구 확정은 총회를 열고 대주교의 허락이 있어야 할 수 있으니 당장은 결정할 수 없소. 대신 피오테의 파견 정도는 내 권한으로 가능하니 먼저 써 드리겠소이다.”
“최대한 남들의 방해를 받지 않게 써 주시죠. 피오테 사제가 자유롭게 말입니다.”
“선교를 위한 영구 발령의 명분이니 피오테 사제가 원하는 만큼 그곳에 계속 있을 수 있을 것이오.”
이제 피오테는 자유롭게 펜리스 영지에 있을 수 있었다. 보통 이렇게 선교 목적의 영구 발령을 받는다면 많은 자유가 부여된다.
차후 교단에서 강제 소환이나 이동을 명령할 수는 있지만, 원한다면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된 셈이었다.
“자자, 이제 다 되지 않았소? 피오테도 얻고, 성물도 얻었으니 말이오. 어서 계시를 마저 진행하러 움직입시다.”
포리스코가 은근히 마무리를 지으려 하자 지셀이 품에서 계약서 하나를 꺼냈다.
“자필로 지금까지의 일을 작성하시죠? 주교 인장도 직접 찍으시고요.”
‘하, 이 용의주도한 새끼.’
품에서 바로 계약서가 나온다? 애초부터 작정하고 왔다는 뜻이다.
포리스코는 슬쩍 지셀의 눈치를 보더니 계약서를 아주 복잡하고 빽빽하게 쓰기 시작했다.
그걸 받아 본 지셀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읽었다.
“……이 세계의 창조주이시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시자, 인자함과 자비로 인도하시는 여신 쥬아나 님의 길에 우리가 늘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당신께 부탁드리며……. 장난하세요, 지금?”
“아, 아니. 그래도 내가 주교인데 기도문을 먼저 작성하고…….”
“아, 됐고. 딱 사실 관계만 명확하게 쓰시죠.”
“그, 그렇지? 너무 길었지? 그러면 내가 새로 작성을…….”
“아니다, 그냥 제가 부르는 대로 쓰는 게 나을 거 같네요.”
지셀은 계약서를 바로 찢어 버리고 품에서 새로 계약서를 꺼냈다.
계약서에는 보통 상단의 신용장처럼 인증 마법 및 보존 마법이 걸려 있다. 그렇기에 가격도 무척이나 비싸다.
그런 게 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막 나오는 것이다.
‘뭔데! 왜 저렇게 계약서를 많이 들고 다니는 건데! 너 뭔데? 고리대금업자냐?’
포리스코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가만 보니 자신 말고도 엮인 사람이 많을 거 같았다.
기도문을 섞어서 해석이 복잡해지게 하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려고 했지만, 상대방이 너무 꼼꼼했다.
“자, 받아 적으시죠. 나, 쥬아나 교단의 포리스코 주교는, 펜리스 남작에게 식량을 지원받았으며……. 그 대가로…….”
포리스코는 눈물을 머금으며 지셀이 불러 주는 대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인장도 찍었다.
이제 정말 확실하게 약점을 잡힌 것이다.
‘크윽, 두고 보자. 대주교에 오르면 반드시 저걸 되찾고 찢어 버릴 테다!’
계약서에는 포리스코가 지셀에게 지원을 받았으며, 그 대가로 성물을 내주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증거인 성물까지 지셀의 손에 있으니 빼도 박도 못했다.
거칠게 계약서를 넘긴 포리스코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제 빨리 시작하시오. 총회가 시작하기 전에 여론을 굳혀야 하니까. 대주교도 분명 소문을 들었을 테니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걱정하지 마시죠. 제 밑에 또 그런 쪽의 전문가가 하나 있거든요. 아, 그 전에 조언을 하나 드릴 게 있는데.”
“조언? 무슨 조언 말이오?”
“그간 뇌물 받아서 모은 재산 말입니다. 분명 대주교가 그걸 노리고 움직일 텐데 잘못하면 문제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으, 으음…….”
확실히 그렇다. 비밀 창고에 숨겨 놓긴 했지만, 대주교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분명 이번처럼 중요한 순간을 위해 파악해 놓고서도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처리를 하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됐다. 평생 욕을 먹으며 힘들게 모은 재산이었다. 절대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그냥 저한테 주시죠.”
“그걸…… 달라고요? 그 많은 재산을?”
“그거 계속 가지고 있어 봤자 대주교한테 털릴 텐데요? 지금 주교님이 제시할 명분은 ‘계시를 받아 악착같이 재산을 모았고, 그걸 써서 식량을 구매했다’라는 건데……. 걸리면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역공을 당할 겁니다.”
‘그런 명분을 만든 건 너잖아!’
이제 보니 명분도 아주 수상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따져 봤자 시간 낭비다.
“그래도 내가 평생을 일군 재산인데…….”
“사제가 왜 그렇게 욕심이 많아요? 그거 교리에 어긋나는 거 아닙니까?”
“……걸리면 식량 대금이라고 하고, 안 걸리면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겠소?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기든가…….”
포리스코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역시 그런 쪽으로는 참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다.
하지만 그것도 지셀이 동의했을 때나 가능한 법이다.
“다른 곳으로 옮기더라도, 가지고 있던 걸 걸리면 결국 빌미를 주는 셈입니다. 이왕 할 거면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낫죠. 저한테 넘기시면 잘 포장해서 명성을 더 올려 드리겠습니다.”
“끄응…….”
영 수상쩍긴 하지만, 지셀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일이 터지고 나서 해명하려면 터지기 전에 방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아예 깔끔하게 처리하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긴 했다.
지금은 목숨을 살리고 자리를 보전하는 게 우선이다. 결국 포리스코는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비밀 창고의 열쇠를 넘겼다.
‘혹시 내가 악마랑 손을 잡은 게 아닐까?’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포리스코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털어 냈다.
‘지금 닥친 위기만 넘기면 돼. 대주교의 자리에 오르면 전부 되찾을 기회가 올 거야.’
그때 이 애송이를 처리할 방법을 짜내면 된다. 그러니까 지금은 좋은 동업(?)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크흠, 빨리 시작합시다. 꼭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오.”
“걱정하지 마시죠. 조금만 기다리시면 금방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비밀 창고의 열쇠를 품에 집어넣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비밀 창고도 공유할 만큼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됐다.
로웰은 지셀의 명령을 받자마자 바로 포리스코의 창고를 털었고, 다시 식량을 풀며 소문을 조작했다.
포리스코의 이름뿐만 아니라 지셀의 이름도 수도에 드높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아예 날을 잡아 수도의 대광장에서 식량을 나눠 주는 쇼까지 벌였다.
“포리스코 주교님!”
“펜리스 남작님이다!”
두 사람은 환히 웃으며 서로의 손을 잡고 높이 들어 올렸다.
“여신께서는 저와 펜리스 남작을 통해 여러분을 굽어살피고 계십니다! 이 모든 게 여신의 뜻입니다!”
포리스코가 크게 외치자 사람들은 더욱더 열광했다.
“와아아아아! 여신의 계시를 받은 분들이다.”
“성자 포리스코!”
“성자 펜리스 남작!”
왕실과 브랜포드 후작가, 에일즈버 백작가에서도 민심을 달래려고 식량을 일부 풀긴 했다.
하지만 공작가와 대립하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만족할 만큼 푸는 건 무리였다. 아무리 수도가 물류의 중심지라 하더라도 없는 식량이 갑자기 생길 리는 없으니까.
그런 와중에 지셀이 미친 듯이 식량을 푸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여신의 ‘계시’라는 말도 안 되는 명분까지 들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게 아주 잘 통했다.
“포리스코 주교님이 계시를 받고 펜리스 남작에게 알려 줬대!”
“그래서 펜리스 남작님이 그렇게 식량을 모았던 거래!”
“그걸 어떻게 믿었냐고? 펜리스 남작님도 같이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지!”
“전쟁도 당연히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왜? 여신이 돌봐주시는 분이니까!”
로웰이 심어 둔 첩자들이 중간중간 다른 이들을 선동하기도 했다.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펜리스 남작이 왜 식량을 그렇게 모았는지에 대한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제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힘든 시기일수록 사람들에게는 기댈 곳이 필요했다.
신의 뜻을 펼치는 사제와 신의 가호를 받는 귀족이 식량을 풀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었다.
이 이상 믿을 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두 사람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웃으며 손을 잡고 ‘쇼’를 하는 장본인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이 애송이 귀족 새끼……. 나중에 저놈을 어떻게 떨궈 내지? 그래도 인기 있는 건 참 좋구나. 이놈 덕분에 일이 참 잘 풀리긴 했는데……. 으으으! 아냐!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기대 이상의 효과네. 그나저나 저녁 뭐 먹지? 맛있는 게 뭐가 있더라.’
머릿속이 복잡한 포리스코와 다르게 지셀은 별걱정이 없었다.
내전과 환란이 닥치면 지금 적어 둔 계약서도 사실 아무 의미가 없다. 교단이든 마탑이든 강한 자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그전까지 얻어 낼 만한 걸 전부 다 뽑아 먹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 * *
상황이 이렇게 되자 쥬아나 교단의 대주교는 무척이나 당황하고 말았다.
포리스코를 쳐 내고 반대파의 세력을 줄인 뒤, 자신이 점찍어 놓은 후계자를 내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성자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포리스코의 인기가 커져 버리니 건들기가 곤란해졌다.
“어, 어서! 어서 포리스코 주교의 창고를 털어라! 그간 사람들을 착취하고 뇌물을 받아 모은 재산이 쌓여 있을 것이다! 장부도 있을 거야!”
대주교는 이미 포리스코의 비밀 창고까지 파악해 둔 상태였다.
원래는 더 확실한 판을 깔아 놓고 마지막으로 승기를 굳히는 데 쓰려고 했지만, 지금은 아껴 둘 상황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아예 건드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약점을 공개해 기세를 꺾는 것이 최선이었다.
대주교의 명을 받은 신전 기사들이 포리스코의 창고를 급습했다.
그들은 창고 안을 보고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이, 이럴 수가…….”
창고 안에 금은보화 따위는 없었다. 그저 낡은 경전과 사제복, 기도문집, 성찬 용품 등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누가 보면 매우 청렴결백한,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성직자의 창고였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광경이 물론 놀랍긴 했지만, 그들이 놀란 이유는 이것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창고의 벽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 하나의 글귀 때문이었다.
[사악한 대주교의 명을 받아 너희들이 여기에 찾아올 것을 여신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 진정 지옥 불에 떨어지고 싶은 것인가?]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글귀였다. 과연 여신의 계시를 받은 사제다웠다.
놀라운 광경에 부들부들 떠는 신전 기사들의 뒤에서 포리스코가 지셀과 함께 나타났다.
“이제 진실을 알겠는가?”
포리스코의 위엄 어린 말에 신전 기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아아, 포리스코 주교님…….”
“불경한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미혹에 빠져 대주교를 따랐나이다.”
신전 기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해성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포리스코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의 죄를 사하겠노라.”
그 모습에 신전 기사들은 더욱더 오열했다. 이분은 진짜다. 진짜 성인을 몰라보고 그간 탐욕스러운 돼지라고 욕을 했던 것이다.
신의 이름 앞에서는 대주교를 향한 충성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전 기사들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신념보다 신앙이 우선이었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적을 눈앞에서 보고도 외면한다면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두려움도 그들이 마음을 돌리는 데 한몫했다.
그런 신전 기사들의 모습을 보며 포리스코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빨리 안 치웠으면 진짜 좆 될 뻔했네. 저 애송이 말을 듣길 잘했어. 아, 얘 똑똑하네.’
이왕 지셀에게 다 넘기기로 한 것, 포리스코는 하나의 꾀를 냈었다.
대주교가 이른 시일 내에 습격해 온다면, 차라리 그걸 역이용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 포리스코를 보며 지셀은 웃었다.
‘이것 봐라? 역시 지금까지 그냥 살아남은 게 아니네. 이렇게 탐욕스러운 주제에 괜히 주교까지 올라간 게 아니야.’
지셀에게 재산을 뺏겼다고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걸 역이용해 어떻게든 자신의 이득을 챙겼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었다.
이런 노골적인 놈이 차라리 낫다. 적당한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면 앞으로 꽤 많이 벗겨 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효과는 확실했다. 신전 기사들을 시작으로 소문이 미친 듯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이 퍼질수록 포리스코의 위엄은 더욱더 올라갔고, 교단의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포리스코는 그만큼 더 거만해졌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대주교와 포리스코의 입장이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총회가 열린 자리에서 포리스코는 배를 벅벅 긁으며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주교님께서 큰 실수를 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청렴결백한 저를 의심해서 기사들까지 보내시다니요. 쯧쯧쯧, 여신께서 알려 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큰 곤욕을 치를 뻔했습니다.”
“…….”
대주교는 할 말이 없었다.
계시고 나발이고 다 개소리라는 건 안다. 포리스코와 알고 지낸 게 한두 해가 아니다.
그냥 타이밍이 늦어 저놈 수작질에 걸려든 것일 뿐이다. 그건 하늘이 알고 땅도 알고 여기 있는 모든 주교들이 안다.
하지만 정치라는 게 그런 거다. 공격에 실패하면 그것이 적들의 명분이 된다.
대주교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일단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네. 내가…… 실수를 한 거 같네. 엉터리 제보를 받아서 그만…….”
“허어! 그게 말이 됩니까! 저한테 누명을 씌우려고 그러신 거잖습니까!”
“아, 아닐세…… 정말 잘못된 제보를 받아서 그래…….”
“비겁한 변명입니다!”
포리스코의 연이은 압박에 대주교는 식은땀만 흘렸다.
내친김에 포리스코는 성자 인정 건까지 밀어붙이려 했다. 원래 이런 건 기세가 올랐을 때 밀고 나가야 하는 법이다.
“소문은 들으셨을 겁니다. 저 정도면 성자라 불려도 될 거 같습니다만? 투표하시죠?”
포리스코는 아주 뻔뻔한 태도로 팔을 벌리며 말했다.
하지만 모든 게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다. 포리스코는 때는 잘 맞췄지만, 적당한 선에서 그치는 법은 몰랐다.
대주교와 그를 따르는 주교들이 그 말에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회장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