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기부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3)
뭔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을 보며 빌로어는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펜리스 남작은 왜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해서…….’
뭔 짓을 했는지 소문이 너무나 빨라서 벌써 왕실에도 들어갔다. 포리스코를 성자로 인정해야 할지 검증하자는 논의도 올라간 상태였다.
하지만 그 논의는 브랜포드 후작에 의해서 단칼에 거부당했다.
― 그런 탐욕스러운 놈이 성자일 리가 없다. 포리스코의 이름으로 식량을 나눠 준 게 펜리스 상단이라지? 지셀 그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나 알아 와라.
그 한마디에 죄다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빌로어가 지금까지 말했던 건 그냥 지셀이 그렇게 연기해 달라고 부탁해서 해 준 것뿐이다.
힘든 상황에 많은 식량을 기부받은 처지라 거절하기도 난감했다.
빌로어는 살짝 고개를 젓고선 말했다.
“그러면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곧 왕실에서 정식 논의를 위해 다시 사람을 보낼 것입니다.”
포리스코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이내 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지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는 일부러 쥐꼬리만 한 신성력까지 내뿜어 몸을 감쌌다. 힘들어서 자주 쓰지도 않던 신성력을 말이다.
은근한 빛이 몸을 감싼다. 겉으로만 보면 성자 할아버지라 해도 속을 정도였다.
빌로어가 떠나자 잠깐 듣는 이가 있는지 주변을 살핀 포리스코가 바로 지셀에게 속삭였다.
“지금 여론만 유지되게 해 준다면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소. 아직 정식으로 논의된 게 아니니 대주교는 어떻게든 소문을 덮으려 할 것이오. 더 많은 식량을 풀고 움직여야 하오.”
‘내가 자리만 굳히고 힘이 생기면 어떻게든 쳐 낼 테다. 그때까지 나를 위해 움직여라.’
눈앞에 닥친 위기를 넘기는 걸 우선하기로 했으니 포리스코는 거침없이 말했다.
말투도 완전히 바뀌었다. 어차피 거래 상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달라진 포리스코의 태도에 지셀은 씨익 웃었다.
“당연히 확실하게 투자해 드리지요. 하지만 그 전에 제가 원하는 것도 들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 이미 먼저 하나를 드렸는데요.”
“흐흐…… 그렇지, 하나를 받으면 하나를 주는 게 정당한 거래 아니겠소? 펜리스에 사제가 하나 필요하시다고?”
“네. 교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신전을 세울 테니 피오테 사제를 우선 보내 주시지요.”
“오오, 우리 사이에 그럴 수는 없죠. 피오테 같은 말단 사제 말고 더 훌륭하고 경험이 많은 사제를 보내 드리겠소.”
포리스코는 내친김에 팍팍 쓰기로 했다. 괜찮은 사제 하나 정도 보내는 건 일도 아니다.
당분간은 이놈에게 잘 보여야 입을 계속 닫고 있을 게 아닌가?
한껏 기분을 내는 포리스코의 말에 지셀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닙니다. 원래 있던 피오테 사제님이 나을 거 같습니다. 대신 다른 부탁이 있습니다.”
“다른 부탁이라면?”
“말씀하신 대로 ‘우리 사이’에 뭔가 증표로 삼을 만한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요? 이 이상 어떤 증표가 더 필요하다는 말이오? 원하는 사제도 보내 주는데?”
“성물을 하나 선물해 주십시오. 주교님이 제게 직접 주셨다는 증서도 친필 서명을 넣어서 하나 써 주시고. 제가 직접 가서 적당한 거 하나 고르겠습니다.”
‘이, 이 미친놈이 진짜…….’
성물이 무엇인가? 역사 속 성자들의 유품이자 신성하고 거룩한 물건들이다.
성물 보관소는 외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국왕이나 브랜포드 후작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모를까, 어지간한 귀족들은 구경조차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구경도 모자라서 직접 가서 고를 테니 하나 달라고?
그래, 구경까지는 어떻게든 주교의 권한으로 하게 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성물을 빼돌린 게 걸린다면 파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쥬아나 교단뿐만 아니라 다른 교단에서도 자신을 욕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목숨까지도 위험해진다.
‘개자식이 목줄을 정말 단단히 채우려고 하는구나. 더럽게 독한 놈이다.’
상대는 친왕파에서 밀어주는 귀족이다. 친필 서명까지 들고 있다면, 혹여 성물을 가지고 있는 게 알려져도 선물로 받았다고 우기면 그만이다. 그냥 준 놈만 개자식이 되는 것이다.
지셀의 의도를 눈치챈 포리스코가 짐짓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성물은…… 대주교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물건이오. 아무리 나라도 그건 좀…….”
“그럼 없던 일로 하시지요. 전 이만 대주교님한테 가 보겠습니다.”
‘야이! 개새끼야!’
말이 안 통한다. 손을 안 잡아도 죽을 거냐고 협박하고, 달라는 거 안 줘도 죽고 싶냐고 협박한다.
살다 살다 이런 새끼는 정말 처음 봤다. 마왕 새끼가 따로 없었다.
만약 포리스코의 모습을 적염의 마탑주 휴베르트가 봤다면 너도 당했냐면서 배를 잡고 깔깔 웃었을 것이다.
포리스코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성물을 빼돌리면 결국 걸릴 것이오. 어차피 죽을 짓을 나보고 하라고?”
“성물은 많지 않습니까? 티 안 나고 작은 거 하나만 우리 사이의 증표로 받아 가겠습니다.”
“끄응…….”
맞는 말이라 포리스코는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성물 보관소는 그 역사가 깊은 만큼 성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중에서는 별 쓸모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도 꽤 많았다. 굳이 기록물을 찾아보지 않는다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물건들이 말이다.
“좋소, 대신 정말 티 안 나게 작고 쓸모없는 것을 가져가야 할 것이오.”
“별걱정을 다.”
피식 웃은 지셀은 언짢은 기색을 풀풀 풍기는 포리스코를 따라 움직였다.
보관소는 신전의 가장 안쪽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 앞을 지키던 신전 기사들은 포리스코가 다가오자 평소와는 다르게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포리스코가 성자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으니 예전처럼 경멸하거나 건성으로 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크, 이놈들 눈빛 봐라. 평소에도 좀 이렇게 잘하지 그랬어.’
포리스코는 신전 기사들의 경외 어린 눈빛을 보고는 기분이 조금 풀려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대주교의 입지는 점점 작아질 것이다.
포리스코가 지셀을 데리고 보관소 안으로 들어가던 그때, 신전 기사가 조심스럽게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주교님, 보관소에 외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외인이 들어오려면 대주교님의 허가를 받아야…….”
“어허! 지금 감히 누구 앞을 막는 게야!”
포리스코의 호통에 신전 기사들이 움찔하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분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를 수행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가! 대주교님이 쥬아나 님보다 높냐는 말일세! 자네들은 정녕 천벌을 받고 지옥 불에 떨어지고 싶은 겐가!”
‘여신’과 ‘계시’, 이 두 단어가 나오면 신전 기사들로서는 어떻게 막을 도리가 없다. 거기에 천벌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같은 신을 믿는 자로서 막을 명분이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편히 둘러보고 오십시오.”
“흥, 갑시다. 펜리스 남작님.”
거만한 표정으로 뒤뚱뒤뚱 걷는 포리스코의 뒤에서 지셀도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새끼……. 생각 이상으로 뻔뻔하다.’
이런 상황이 되도록 부추긴 자신마저도 같이 다니기 민망할 정도로 나댄다. 이런 놈이 권력을 잡으면 제대로 악덕 영주가 되는 것이다.
들어오기가 까다로웠던 것 치고, 성물 보관소는 여느 영지의 보물 창고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교단과 관련된 보물들이 등급별로 분류되어 쌓여 있었다.
물론 쥬아나 교단의 모든 성물이 이곳에 있는 건 아니다. 쥬아나의 교단은 교국뿐만 아니라 여러 왕국에 존재한다.
이곳에는 루타니아 왕국과 관련된 보물들만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지셀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역사 깊은 왕국이라 그런지 꽤 많기는 하네. 이제 그걸 찾아봐야겠군.’
포리스코는 보관소의 문을 꽉 닫고 다급하게 말했다.
“어서 골라 보시오. 1등급 성물은 절대 안 되오. 그건 바로 걸릴 테니까. 3등급의 성물로 하시오.”
“흠, 잠시만 기다리시죠.”
지셀은 이곳저곳 바쁘게 둘러보더니 보관소의 중앙 유리장에 걸려 있는 로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뭡니까?”
“저건 300년 전 성 마르테우스 님께서 사용하던 로브로 1등급의 성물로 지정되어…… 저, 저건 안 되오! 무조건 걸려! 저렇게 대놓고 진열되어 있잖아!”
“아, 예.”
피식 웃은 지셀은 곧 한쪽 구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쪽 벽 전체를 덮은 긴 유리 진열장 안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성물이라고 해서 꼭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종교적 의미나 역사적 가치가 높아 성물로 취급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성력으로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하는’ 성물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손꼽힐 정도로 수가 적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단 하나.
아무도 모르는 ‘진짜’ 성물이 숨겨져 있었다.
‘찾았다.’
지셀은 유리 진열장 구석에 굴러다니던 작은 반지를 발견하고 미소를 지었다. 하얀 보석이 하나 박혀 있는 수수한 반지였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대단한 능력을 품고 있는 성물.
‘여신 쥬아나의 가호.’
겸사겸사 포리스코의 약점도 잡을 겸 친필 증서를 받아 내긴 했지만, 지셀의 진짜 목적은 이 반지였다.
‘이따위로 보관하고 있을 줄 알았다.’
신성력을 주입해도, 마나를 주입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반지다. 그러니 옛날부터 그냥 별거 아닌 반지로 치부하고 이렇게 대충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반지의 진짜 능력은, 위기 상황에 사제의 신성력을 흡수해 강력한 보호막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신성력이 허락하는 이상, 의식할 필요도 없이 ‘자동 방어’가 되는 것이다.
전생에 이 능력이 밝혀진 건 우연이었다. 한 사제가 환란을 피해 유물들을 챙겨 도망가다가 사고를 당하면서 발견한 것이었다.
‘괴수들 사이에 던져 놓으면 혼자 쭈그려 앉아 있는 게, 도발도 그런 도발이 없었지.’
그걸 이용해서 사람들은 그 사제를 미끼로 자주 사용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성력이 다소 모자란 그 사제는 제때 구출되지 못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피오테에게는 아주 쓸 만하겠어.’
다른 이들은 지셀이 마나 연공법을 알려 주고 기술을 알려 주며 경지를 올려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피오테는 스스로 경지를 올려야 한다. 전생에도 신성력의 구조는 아무도 밝히지 못했던 탓이다.
‘그러면 좋은 장비를 덕지덕지 입혀 주면 되는 거지.’
원래 당장 이걸 구할 계획은 없었다. 언젠가는 내전이 벌어질 테고, 아직 능력도 밝혀지지 않은 이런 하급 성물 정도야 그때 다 털어 오면 된다.
하지만 피오테의 신성력이 빠르게 느는 걸 보니 차라리 빨리 구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오테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쓸모도 있었다.
‘환란 때 제일 앞에 세워 놔야지. 정말 든든하겠어.’
강력한 방어 토템이 될 수 있는 자를 그냥 후방 지원만 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반지의 방어력은 그냥 신성력으로 보호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하다. 신성력만 충분하면 드래곤이 밟아도 버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정말 바퀴벌레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생존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반지를 쥐여 주고 적진 한가운데에 던져 놓으면 제대로 광역 도발이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음, 차라리 시간 날 때 전투기술도 좀 가르쳐야겠다. 돌격대 선봉으로 딱이잖아? 전투도 하고 치료도 하고. 크, 성기사가 따로 있나? 이런 게 진짜 성기사지.’
피오테가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지셀이었다.
지셀이 한참이나 구석에 있는 성물들을 바라보고만 있자 포리스코가 다가와서 물었다.
“골랐소? 여기 있는 것들이라면 적당하겠군. 죄다 3등급 성물이니까.”
“저 반지가 작고 티도 안 나서 적당하겠군요. 저건 뭡니까?”
“어디? 아, 저런 게 있었나? 저게 뭐였지?”
포리스코는 성물을 기록한 책을 가져와 몇 번 뒤적이더니 혀를 차고 말했다.
“아주 오래전에 한 수녀가 유물로 남긴 성물이군. 저런 게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 아주 잘 골랐소이다.”
포리스코는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부담이 덜하겠네. 왜 저딴 게 성물로 지정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오래돼서 넣은 모양이군.’
저런 반지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도 저런 게 있는 줄도 몰랐으니, 일일이 목록과 대조해 가며 조사하지 않는 이상 걸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전이 세워진 이래 딱히 성물 보관소의 성물을 하나하나 점검한 적은 없었다.
설령 조사한다 해도, 작고 하찮은 물건이니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진짜로 눈앞에 있는 애송이만 입을 닫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포리스코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런 귀한 물건이 창고 구석에서 굴러다닐 바에는 진짜 주인을 찾아주는 게 훨씬 낫지.’
혹여 나중에 반출한 것이 들켜도 상관없다. 아무도 이 반지의 진짜 가치를 모르니, 모조품을 만들어서 돌려주면 그만이다.
“알겠습니다. 저걸로 하죠. 잘 받겠습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유리장을 열어 반지를 쏙 챙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