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기부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2)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온 자는 지셀이었다.
포리스코는 순간 시선을 피하며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이, 이 미친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멀쩡히 있는 사람을 갑자기 성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도 남자인데 여신의 계시를 받은 엉터리 성자로 말이다.
아마 역사상 최초로 기록될 것이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 역사서에 남게 생겼다.
당장이라도 무슨 짓이냐고 소리를 지르고 혼쭐을 내주고 싶었지만…….
‘보, 보는 눈이 너무 많잖아!’
난감했다. 진실을 밝혀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빈민들과 신전 기사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그냥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 이게……. 성자의 힘?’
저 경외의 눈빛을 더 받고 싶다. 아예 경험해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그 맛을 알아 버렸다.
무엇도 충족되지 않는 그런 권태로운 삶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래도 되나? 나중에 문제 생기는 거 아냐? 수도에 내 소문이 다 퍼진 거 같은데…….’
이성은 안 된다고 하는데 탐욕스러운 이기심이 자꾸만 괜찮다고 부추겼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흥분해서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이, 이 여론을 유지만 할 수 있다면……. 대주교도 나한테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차기 대주교는 내가 되는 걸로 확정이야!’
성자라는 소문이 더 널리 퍼진다면 대주교도 절대 자신을 파문시킬 수 없다. 파문을 떠나서 아예 자신을 건드릴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한 사정을 모르니 낙관적으로 넘기기도 위험했다. 포리스코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자님?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십니다?”
지셀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신전 기사들이 포리스코의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을 본 지셀이 살짝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흠, 앞으로의 기부에 관해 말씀을 나누려고 했는데……. 그냥 돌아갈까요?”
“아, 아닙니다. 남작님이 ‘저를 도와서’ 큰일을 하셨는데 그럴 수는 없지요. 뭣들 하느냐! 이분이 펜리스 남작님이시다. 어서 신전으로 모셔라!”
포리스코의 말에 신전 기사들이 지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곧 두 사람은 여섯 마리의 백마가 끄는 고급 마차에 탄 채 신전으로 이동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던 지셀이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어떻게…… 기부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식량을 꽤 많이 썼는데요.”
지셀의 말에 포리스코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의 의도를 알아야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부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한 기부는 정말 소박하게 뇌물을 받는 거였다.
‘무슨 생각인 거지? 식량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그렇게 엄청난 지출을 한다고? 겨우 저런 소문을 내기 위해서? 왜?’
그는 천성이 의심 많고 탐욕스러운 자다. 그리고 온갖 협잡질과 정치질로 주교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비록 지금은 과한 탐욕과 대주교의 견제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빠졌지만, 그리 쉽게 속아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애초에 차기 대주교 자리를 노리고 거대 교단에서 파벌까지 형성했던 자가 만만할 리가 없었다.
포리스코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아무 말도 없이 지셀을 바라보았다.
“너무 그렇게 견제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주교님을 도와드리려고 한 것이니까요.”
“날 도와……준다고요?”
“네. 요새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빠져 계시지 않습니까? 대주교님하고 사이가 많이 안 좋으시다던데요.”
‘뭐지? 북부에만 있던 이 애송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친왕파의 귀족이 말해 준 건가?’
포리스코가 귀족들에게도 열심히 뇌물을 바쳤으니 이야기가 돌았을 법했다.
귀족들의 여론도 무시할 수 없어서 뇌물을 썼던 거지만, 대주교의 세력이 더 강해 그렇다 할 효과는 없었다.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그냥 수도에서 며칠 머물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지셀은 포리스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전생의 경험 때문이 아니다.
정보의 중요성을 아는 그는 수도에도 첩자들을 잔뜩 깔아 놨다. 그리고 그들이 구해 온 정보를 토대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지셀의 지시 아래, 첩보관 로웰이 소문을 조작하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그를 보며 지셀이 말을 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소문은 시들해질 겁니다. 아직 의심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도 많거든요. 이 기회를 놓쳐서 좋을 건 없을 겁니다.”
지셀의 말에 포리스코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이 애송이 놈은 지금 자신의 약점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다.
“좋습니다. 이런 걸 그냥 해 주셨을 리는 없고…… 원하는 게 뭡니까?”
“뭐…… 전에도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피오테 사제 말입니까? 그런 말단 사제 때문에 너무 과하게 쓰신 거 같습니다만…….”
포리스코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만약 피오테만을 원한다면 굳이 이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저 엄청난 식량의 절반만 줬어도 흔쾌히 보내 주었을 것이다.
과연 지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맞습니다. 다른 것도 원하는 게 있습니다.”
“뭔지 말씀해 보십시오. 내 듣고 판단하겠습니다.”
곤란한 상황임에도 포리스코는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런 경우 한 번 말려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확실히 산전수전 다 겪은 탐욕스러운 사제다웠다.
지셀은 의뭉스럽게 뜸을 들였다.
“마차 안에서 나눌 얘기는 아닌 거 같군요. 조용한 곳에 도착해서 말씀 나누시지요.”
‘이놈이…….’
포리스코는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이를 악물었다. 애송이 주제에 아주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도 지금 아쉬운 쪽은 자신이다. 어쩔 수 없이 화를 가라앉히며 신전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포리스코는 신전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물린 뒤, 짐짓 화를 내며 말했다.
“이제 원하는 걸 제대로 말해 보시오! 어째서 그런 일을 벌였단 말이오!”
“주교님을 대주교로 만들기 위해서죠.”
“뭐, 뭣? 날…… 뭐라고요?”
“말 그대로입니다. 주교님이 지금의 위기를 넘기고 대주교의 자리에 오르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유로운 지셀의 말에 포리스코는 순간 넋이 나갔다.
대주교 자리는 자신의 인생 목표였다. 그걸 위해 끊임없이 주변에 뇌물을 받고 바치며 달려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대주교는 다른 후계자를 위해 자신을 쳐 내려고 하고 있었다.
‘이 애송이가 날 도와준다면 가능해. 바깥의 여론을 완전히 휘어잡으면…… 성자의 칭호를 받지 못한다 해도 대주교 정도는 쉽게 밟아 버릴 수 있다!’
몇 번만 더 자신의 이름으로 식량을 푼다면 여론은 공고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걸 할 수 있는 자는 눈앞의 애송이밖에 없었다.
자그마치 북부의 식량왕이라고 불리는 놈이었으니까.
거기에 ‘계시’를 통해 미리 준비했다고 말만 맞추면 된다. 누구도 검증할 수 없고 누구도 신의 이름 앞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놈을 믿을 수 있을까?
‘위험해……. 위험한 일이야.’
포리스코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건 자칫 잘못하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는 일이다. 넙죽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눈앞에 있는 애송이가 입만 잘못 놀려도 지금보다 더 곤란한 상황에 빠져 버릴 것이다.
“나를…… 대주교로 만들어서 남작님한테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좋을 거야 많죠. 제가 곤란할 때 교단의 도움을 앞으로도 많이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로 간의 의리 같은 거죠.”
‘이, 이 미친놈이…….’
눈치 빠른 포리스코는 지셀의 말을 알아들었다. 목줄 좀 채워 놓고 필요할 때마다 써먹겠다는 뜻이었다.
평소였다면 불같이 화를 내고 쫓아낼 만한 제안이다. 이딴 제안을 받을 거였으면 진작에 교단은 귀족과 손을 잡았을 것이다.
“웃기지 마시오, 남작. 종교와 정치는 양립할 수 없다는 걸 모르시오? 날 허수아비로 앉혀 놓고 마음껏 주무를 수 있을 거 같소?”
“너무 나가셨네. 그냥 서로 필요할 때마다 친하게 지내자는 뜻이죠.”
“그딴 입에 발린 소리 마시오! 어디 일개 남작 따위가 감히 교단을…….”
포리스코가 예의를 벗어던지고 강하게 나오자 지셀도 픽 웃으며 말을 끊었다.
“그럼 이대로 그냥 죽겠다는 겁니까?”
“…….”
“순교도 아니라 탐욕스러운 돼지로 망신만 당하다가 죽게 되겠군요.”
이미 서로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는 상태다. 지셀은 다시 한번 포리스코의 처지를 상기시켜 주었다.
“대주교 성격도 꽤나 잔인한 걸로 알고 있는데……. 아마 이단으로 몰리지 않을까요? 최악의 죽음이겠군요.”
“…….”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전 지금 주교님을 살려드리려는 겁니다. 그리고 정당하게 그 대가를 받아 가겠다는 거죠. 목숨값보다 비싼 게 있습니까?”
“……내가 거절하면 어찌할 생각이오.”
“싫으면 어쩔 수 없죠. 피오테 정도야 대주교님한테 부탁해서 얻어 내면 됩니다. 식량을 그쪽에 몰아주면 어려울 건 없죠. 대신…… 주교님은 확실히 죽겠지요.”
‘아, 안 돼.’
그러면 자신은 정말로 끝장이다. 목숨을 떠나서, 대주교가 식량을 얻고 성자 소리를 듣는다면?
배 아파서 죽어도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포리스코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민했다. 받아들이면 저놈의 개가 되고 거절하면 죽는다.
하지만 죽기는 싫었다. 죽기도 싫고 대주교 자리도 차지하고 싶다.
거기에 성자 소리도 계속 듣고 싶었다. 그 경험은 정말 인생 최고로 짜릿했다.
그런 경험을 앞으로도 계속한다면? 소문이 점점 더 퍼져 나가서 왕국 이상으로 뻗어나간다면?
‘대주교가 문제가 아니야. 눈앞에 있는 놈만 빼면 아무도 날 건드릴 수 없게 돼. 성녀에 맞먹는 취급을 받을 수 있다고!’
계속 눈알을 굴리는 포리스코의 모습을 보며 지셀은 소리 없이 웃었다.
‘아주 그냥 욕심이 절절 흐르는구나. 다 갖고 싶어서 죽겠지? 그래도 의심이 많은 놈이라 그런지 꽤 조심스럽네. 다루기가 쉽지는 않겠어.’
원래 지셀은 이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적당한 보상을 주고 당장은 피오테만 얻어올 생각이었다.
차후 환란에 대비하려면 교단의 힘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가 점찍어 놓은 자는 다른 죄 많은 사제였다.
하지만 포리스코의 사정을 알게 되자 계획을 조금 수정해서 앞당긴 것이다.
한참 지셀의 눈치를 보고 고민하던 포리스코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절하면 지금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목숨을 건져도 대주교 성격상 파문은 확정이야. 그렇다고 이놈한테 약점을 잡히면…….’
그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할 때, 밖에서 수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교님, 노튼 백작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빌로어 노튼 백작, 왕국 재상의 장남이자 브랜포드 후작 부인의 오빠다. 즉 로잘린의 외삼촌이 되는 자로서 친왕파의 핵심 귀족 중 한 사람이었다.
“어, 어서 안으로 모셔라.”
손님이 있다고는 하지만 빌로어는 포리스코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귀족이다.
가문도 가문이지만, 수도의 대법관을 겸하고 왕실 관료들의 수장이나 마찬가지기에 그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잠깐 격식 있는 인사를 나눈 빌로어는 지셀을 보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펜리스 남작이 아닌가? 신전에는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님. 주교님과 어려운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지 상의하고 있었습니다.”
“허어, 젊은 자네가 그런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니. 참으로 왕국의 흥복이로고. 그렇지 않아도 내 왕실의 일 때문에 주교님을 찾아왔습니다.”
왕실의 일 때문에 찾아왔다는 말에 포리스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왕실에서 자신과 볼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설마……? 그 소문 때문에? 벌써 왕실에서 날 찾아왔다고?’
정말로 성자로 인정받으면 왕국 차원에서 밀어준다. 성자가 있는 곳은 다른 왕국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연 빌로어는 단도직입적으로 포리스코가 받을 혜택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리하여 주교님이 교단에서 성자로 인정만 받는다면 차후 주교님의 성체와 성혈을 보관할 수 있는 성물함을 왕실의 보물인 드래곤의 뼈로 제작할 것이며……. 왕궁에는 주교님을 위한 전용 별실을 마련하고……. 새로운 부지에 주교님의 이름을 딴 대신전을 건립할 것이며…….”
어마어마한 제안에 포리스코는 넋이 나갈 거 같았다. 지금까지 받은 뇌물들이 다 푼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은 진작 이런 대우를 받고 살았어야 했다. 인생의 절반은 손해 본 것 같았다.
살짝 지셀을 바라보자, 지셀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그 이름이 왕국 전역에 뻗칠 것입니다. 그러면…… ‘계시’에 따른 기부는 계속 진행할까요? 포리스코 성.자.님.”
‘흐, 흐흐흐, 내가 상황이 급해서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깜빡 잊었구나.’
평생을 신성력으로 빈민들을 치료해도 받을까 말까 한 게 성자의 칭호다.
기본적으로 신성력은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빈민들과 구르며 평생을 힘들게 살 만큼 인내심이 강한 사제는 없었다.
그렇기에 성자의 길은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법이고, 성자라는 칭호 역시 사후에나 받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빠르고 쉽게 성자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고? 뒈진 다음에 받는 건 소용이 없지. 살아 있을 때 받아야 즐기지!’
설사 다른 주교들의 견제로 칭호를 받지 못한다 해도 괜찮다. 성자나 마찬가지라는 소문만 나도 살아남아 대주교가 될 수 있었다.
‘의심 때문에 생각이 너무 많았군. 확실하게 대주교의 자리에 올라가고 왕실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는다면…… 저놈 정도야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겠지.’
멍청하게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의 목숨이다. 일단은 지금 닥친 위기를 넘기는 게 우선이었다.
포리스코는 지셀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부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펜리스 남작님.”
그는 일단 지셀과 한배를 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