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가족 같은 영지’거든요. (2)
가족.
듣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그 단어.
지금껏 어느 귀족도 그런 말로 인재를 영입해 가지 않았다. 그들에게 관리란 언제든 쓰다 버릴 수 있는, 그런 존재였으니까.
충성을 맹세하고 오래 함께한 자가 아니라면 그런 말을 듣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펜리스의 총관이라는 자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가족이라는 말을 꺼냈다. 마치 영원히 함께하자고 손을 내미는 것 같았다.
이제 그 ‘가족 같은 영지’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학생들은 가슴 벅찬 감격을 느꼈다.
말론 또한 눈물이 나올 것을 참고 계약서를 손에 꼭 쥐었다.
‘엄마, 아빠! 제가 드디어 대영지의 관리가 될 기회를 얻었어요! 이제 고생 끝이에요! 보수도 엄청나니 제가 호강시켜 드릴게요!’
물론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가족들과도 상의해 보고 마음을 정리할 시간은 필요했다.
클로드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결정을 내리면 저를 찾아오면 됩니다. 저는 당분간 세이론 아카데미에서 지낼 겁니다. 먼 지방에 사는 가족들은 말만 해 주시면 따로 저희가 병사를 보내 안전하게 영지로 모시겠습니다.”
학생들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은 가족들과 움직이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가족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다른 왕국까지 이주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병사들을 보내 안전하게 다 처리해 준다는 것이다. 역시 복지가 대단한 영지였다.
어떻게 부모님을 설득해야 이주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말론은 마지막 근심까지 내려놓았다.
‘대단해, 정말 대우가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곳이야.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어라? 이게 뭐지?’
말론은 계약서 구석에 아주 작게 쓰여 있는 글귀를 발견했다.
“기간이…… 20년?”
말론의 중얼거림에 다른 학생들도 그 글귀를 찾아보았다.
“왜 굳이 이런 걸 명시하지?”
“은퇴할 때까지 지내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보통은 관리가 되는 게 어렵지, 퇴임 시기는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일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계속하는 경우는 영주가 무서워서 그만둔다는 말도 못 하거나, 계속 일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기 힘든 경우뿐이다.
어차피 배신을 하거나 첩자 짓을 하면 목이 날아간다. 상인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 기간을 명시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클로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아하하, 그건 저희가 그 기간만큼은 고용을 확실히 보장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가족이 될 사이이니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뜻이지요.”
말론을 비롯한 학생들은 바로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적으로 책임져 준다니 정말 가족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없는 게 단점일 수 있겠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 그런 건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오자 클로드가 웬디에게 속삭였다.
“어때? 괜찮았어?”
“…….”
지금 인력이 부족해 영지가 힘들어지고 있으니 클로드의 행보를 막아서는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영지를 위해서라도 나쁜 놈 옆에 있으니 같이 나빠지는 것만 같았다.
결국 웬디는 침묵하기로 했다.
‘무작정 부려 먹는 건 아니니까 괜찮을 거야.’
일하는 사람에게 충분하다 못해 과한 보상을 주는 것이 지셀의 원칙이었다. 그래서 펜리스 영지의 관리들은 다른 영지보다 몇 배나 많은 보수를 받았다.
받기 싫어도 받아야 하는 게 문제였지만.
‘어차피 저 사람들도 우리 영지 아니면 다른 선택지가 없긴 하니까.’
펜리스 영지에라도 오지 않으면 학생들 중 태반은 제대로 된 일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굶어 죽을 바에는 좀 일이 고되더라도 펜리스로 오는 게 나을 거다.
‘신기할 정도로 잘 맞아떨어지네.’
이런 시기가 아니었다면 클로드의 학연을 이용해도 사람을 이렇게 많이 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영주가 하는 일은 언제나 시기가 절묘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 * *
인재 모집에 관한 설명이 끝나고 며칠 뒤, 집이 가까운 말론이 가장 먼저 클로드를 찾아왔다.
“가족들도 전부 이주하기로 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총관님.”
“오, 잘 생각했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시지?”
“네! 아버지는 목수 일을 하고 있고 어머니는 염료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말론의 대답에 클로드는 고개를 휙 돌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입 관리 한 명 뽑았는데 기술자가 두 명이나 딸려온다고?
웃음을 꾹 참으며 표정 관리를 한 클로드가 말했다.
“병사들을 보내 이주를 도와줄 테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이곳과 다르게 일거리가 넘쳐나니 부모님도 일할 의지만 있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 뒤에도 며칠 동안 수많은 학생이 찾아왔다.
학생들 대부분이 클로드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가뭄 때문에 다들 먹고 살기도 힘들었고, 대영지에서 일하는 기회도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곳에 남아 봤자 좋은 대우를 받는 건 극소수의 인재들뿐이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 가족들도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제 가족들은 남기로 했어요. 보수는 정말 그렇게 주시는 거 맞죠? 매달 집에 보내야 하거든요.”
클로드는 그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하며 한 명 한 명 올 때마다 꼭 껴안아 주었다.
“아무런 걱정하지 마세요. 영지에서 다 챙겨 줄 겁니다. 이곳에 남은 가족들의 생계도 절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번만큼은 거짓말이 아니다.
펜리스의 관리가 되는 이들은 남들보다 몇 배나 되는 보수를 받으니까.
또한 남은 가족들의 생계부터 이주를 원하는 자들까지 전부 영지에서 책임져 줄 것이다.
대신 다들 펜리스 영지에 뼈를 묻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미안해요, 후배님들. 나도 살려면 어쩔 수가 없어. 우리 정말 가족같이 오래 지내자. 돈 많이 주면 되잖아. 그렇지?’
학생들을 껴안은 클로드의 눈가에 살짝 눈물이 비쳤다.
* * *
클로드는 정말 바쁘게 움직였다.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스승님의 제자였던 선배들과 친우들도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한 사람씩 찾아다니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 최대한 빨리 찾아서 여기로 데리고 와. 식량을 주면 오기 싫어도 올 거야. 싫다고 하면 강제로 끌고 와!”
점점 지셀과 닮아가는 클로드의 닦달에 병사들이 잽싸게 움직였다.
고향으로 돌아간 자들에게는 구구절절한 서신과 함께 식량을 보냈지만,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던 자들은 식량을 담보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이 스승님의 반역에 연루되어 자리를 잃거나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었다.
누군가는 클로드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또 누군가는 반가운 눈빛으로, 또 누군가는 부러움과 의아함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그들이 찾아올 때마다 자신과 함께하자고 설득했다.
“어차피 여기에 있어 봤자 더 이상 희망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갑자기 고향을 떠난다는 게 좀…….”
“그러면 여기서 굶어 죽을 거야? 아무도 안 써 줄 텐데? 네가 지금 여기서 뭘 할 수 있는데?”
“끄응…….”
고향을 떠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버림받은 이들이 달리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선배들과 친구들은 클로드의 설득에 못 이긴 척 펜리스로 가기로 했다.
어차피 이곳에서 버텨 봤자 거지처럼 지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친구 중의 하나인 빌리는 현재 모인 친구들을 대표해 클로드에게 물었다.
“네가 크게 성공해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건 고마운데…… 왜 루타니아 사람들이 아니고 우리를 찾아온 거냐?”
클로드는 짐짓 처연한 표정으로 답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 해도 내가 사건의 발단이 된 건 사실이니까. 힘들어진 너희들을 생각하니 그동안 마음이 너무 불편했거든.”
빌리와 친구들은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 그런 놈 아니잖아?”
‘이 새끼가?’
역시 오래 알고 지낸 놈들이라 그런지 쉽게 속지 않는다. 하지만 클로드는 표정 관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예전의 내가 아니야. 난 정말 이를 악물고 고통스럽게 일을 해 왔어. 진짜 뒤지고 싶을 정도로……. 아니, 어쨌든 지금은 대영지의 총관이 되었지. 그 모든 게…… 너희를 위해서라면 믿어 줄 수 있겠니?”
빌리는 순간 손으로 입을 막고 떨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너…… 왜 그렇게까지…….”
그가 아는 클로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성적만 좋았지, 평소에는 그냥 또라이에 가까운 놈이었다.
그런데 이런 깊은 우정과 옛일에 대한 죄책감을 가슴 속에 품고 있을 줄이야.
클로드는 그런 빌리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우린…… 친구잖아.”
“클로드!”
빌리는 솟아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클로드를 껴안았다. 클로드 또한 눈물을 글썽이며 빌리를 꽉 껴안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하지 마, 이 새끼야! 네 잘못이 아니잖아! 괜찮아! 우린 괜찮다고!”
옆에서 보고 있던 다른 친구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두 사람을 껴안았다. 남녀를 가라지 않고 모두가 모여들었다.
“울지 마, 클로드! 넌 아무 잘못 없어!”
“지금이라도 이렇게 우리를 안 잊고 챙겨 주는 게 어디야!”
“절대 미안해하지 말라고!”
친구들의 과한 반응에 클로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그게 미안한 게 아니고……. 우리 영지로 데리고 가서 미안하다고…….’
뜨거운 우정 고백이 한바탕 지나간 뒤, 조금 민망해진 빌리가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크흠흠, 그런데 계약서 말이지……. 보수도 정말 좋고 가족 생계부터 거주지까지 다 좋은데 왜 우리는 30년이야? 후배들은 20년이라고 들었는데?”
“그야…… 너희들이 안정적으로 마음 편하게 오래 일하기를 바라니까. 이제 먹고 사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너희들의 능력을 펼쳐.”
‘더 배웠으면 더 굴러야지. 그냥 나랑 거기서 같이 죽자. 죽을 때까지 능력을 펼쳐라.’
“클로드, 너…….”
빌리가 다시 떨리는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도 다시 한번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린…… 친구잖아.”
“클로드!”
다시 뜨거운 포옹이 시작됐고, 옆에서 구경하던 웬디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장만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그렇게 두 달여 간이나 아카데미에 머물며 많은 인재를 낚았다. 무척이나 성공적인 여정이었다.
너무 먼 곳에 있어 만나지 못하고 서신만 보낸 자들 중에서도 몇몇은 찾아올 게 분명했다.
“자, 이제 펜리스 영지로 갑시다!”
클로드의 뒤에는 수많은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친구와 학생들뿐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도 함께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변 영주와 귀족들에게 식량을 뇌물로 바쳤기에 이주에 큰 마찰도 없었다.
이번에 이주를 못 하는 자들은 펜리스에서 추가 병력을 보내 도와줄 것이다.
떠나기 전, 클로드는 아카데미의 정문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안나, 잘 지내고 있지?’
안나는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지금 역사서 편찬에 관한 일로 다른 아카데미에 파견을 나간 상태였다.
학장을 통해 많은 돈과 식량을 남겼으니 돌아오면 깜짝 놀랄 것이다.
‘…….’
클로드는 아쉬워하면서도,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 * *
그리고 마침내 대규모 행렬이 펜리스의 경계 안에 들어섰다.
다들 조금 지쳤을 뿐 건강해 보였다. 사람이 많아 속도는 조금 느렸지만 여정에 큰 문제는 없었다.
지셀은 도착한 사람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 주었다.
“클로드가 진짜 많이 낚아…… 아니, 다들 환영한다. 내가 이곳의 영주인 펜리스 남작이다. 여러분들을 내 가족이라 생각하고 언제나 최고의 대우를 해 주겠다!”
“와아아아!”
그 말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지셀은 내친김에 더 화끈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가족이자 한 몸이란 걸 절대 잊지 말아라!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
사람들은 정말 감격했다. 평범한 영지민들에게 저런 말을 해 주는 귀족은 소문으로도 들은 적이 없었다.
영주까지 나서서 ‘가족 같은 영지’라고 확언해 주니, 낯선 곳에 와서 느끼던 걱정이 모두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같이 죽자는 말이 정말 진심인 걸 몰랐기에 감동했던 것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셀은 약속대로 그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다. 집과 땅은 물론이거니와 보수도 선금으로 마구 퍼 주었다.
“정말 이런 대우를 받다니! 꿈만 같아!”
“오기를 잘했어! 이곳은 기회의 땅이야!”
“영주님도 정말 좋으신 분 같아! 다른 귀족들하고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
사람들은 매일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에 빠져 있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조금 낙후된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곳저곳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걸 보니 빠르게 발전할 것 같아 금세 마음을 놓았다.
오히려 학자들을 따라온 가족들은 일거리가 넘쳐서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세이론 왕국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생활이 풍족해지니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영입한 관리들은 영지 곳곳의 요직을 차지하고 중요한 행정 업무를 맡아 하기 시작했다.
클로드의 친구인 빌리는 쌓인 일들을 하면서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일이 좀 많은 거 같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 있겠지. 짜식, 이렇게 일이 많았으면 진작 도와달라고 할 것이지.”
말론과 다른 졸업생들도 의욕이 넘쳤다.
“반드시 영주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해! 이 대우에 걸맞은 관리가 되겠어!”
낮에는 펜리스 아카데미의 교수 일을 하고 저녁에는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강행군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영지에서 제법 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큰 보수와 권력까지 쥐니 처음에는 의욕이 넘쳐 어떻게든 버텼다.
하지만 그들이 할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제법 큰 지역을 관리하던 빌리는 업무를 진행할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이, 이게 뭐야? 이게 영지야?”
뭔가 파면 팔수록 정상적인 영지가 아니었다. 펜리스 영지는 심각할 정도로 기형적이고 기괴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이 미친…….”
실시간으로 옆에 쌓여 가는 서류를 보며 빌리는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