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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203화 (203/269)

203화 친구들 좀 데리고 와라. (2)

세이론 왕립 아카데미의 정문에 8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무척이나 크고 화려한 고급 마차가 멈춰 섰다.

마차 뒤에는 식량이 잔뜩 쌓인 수레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말을 탄 수십의 기사들과 수백의 병사들이 빈틈없이 그것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이러니 아카데미의 문지기들은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누, 누가 온 거지?’

‘이 정도면 엄청 높으신 분이 온 거 같은데?’

끼익.

문지기들이 잔뜩 긴장한 사이, 화려한 마차의 문이 열리며 웬디가 내렸다.

그녀의 복장은 여느 귀족가의 영애와 다를 게 없었다.

그녀는 웬만한 귀부인들보다도 훨씬 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드레스에 아름다운 장신구들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문지기들은 넋이 나갔고 웬디는 눈을 감고 이를 꽉 깨물었다.

‘쪽팔려…….’

예쁜 걸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지금은 치장이 과해도 너무 과했다.

거기에 그녀는 직업상 눈에 띄는 걸 가능한 한 피하는 게 버릇이 되어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니 괜히 기분이 나빴다.

하지만 무조건 돈이 많아 보여야 한다고 이런 복장을 밀어붙인 클로드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

웬디는 부끄러움을 참고 문지기들 앞에 가 말했다.

“루타니아 왕국, 펜리스 영지의 총관님이 이곳 학장님께 볼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문지기들은 깜짝 놀랐다.

펜리스가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루타니아 왕국은 알고 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강대국이 아닌가?

‘어, 어떻게 하지? 우리 왕국의 귀족이 아닌데?’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냥 열어 줘야 하나?’

루타니아는 세이론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군사 강국이다. 그런 곳의 지체 높으신 분을 감히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마차 안에서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해? 빨리 문 안 열어어어?”

알 수 없는 위엄에 짓눌린 문지기들은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일행이 아카데미의 부지 안으로 들어가자 지나다니던 학생들과 교수들까지 모두 걸음을 멈췄다.

대규모 병력이 들어온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화려한 행차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마차가 중앙 건물 앞에 서자 학장까지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끼익…….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모두가 긴장한 채, 그곳에서 내릴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터억.

“아휴, 장거리 여행은 참 피곤하다니까. 영주는 왜 이딴 곳에 보내서. 내가 이런 하찮은 일을 할 사람이야?”

짜증을 내며 내린 사람은 클로드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너무 사치스럽게 지냈다 보니 이제는 그 역할에 완전히 취한 상태였다.

한 마디로 본분을 잊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클로드를 곁눈질로 슬쩍 바라보았다.

옷도, 모자도 엄청나게 비싸 보이긴 하는데……. 뭔가 좀 추했다.

모자에는 귀한 새의 깃털을 하나도 아니라 수십 개를 박아 야만인 주술사처럼 보였다.

그뿐인가? 열 손가락에는 빠짐없이 두꺼운 금과 보석 반지들이 끼워져 있었다. 손가락을 들 수는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목걸이도 두꺼운 금목걸이를 세 개나 걸었는데 배꼽까지 주렁주렁 흘러내릴 정도였다. 무겁긴 한지 목이 거북이처럼 구부정하다.

그 외에도 옷 곳곳에 장신구가 수도 없이 매달려 있어 걷기도 힘들어 보였다.

과연 클로드는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비틀거렸다. 웬디가 바로 부축을 하며 혀를 찼다.

“아우, 나 왜 이렇게 몸이 무겁니?”

‘그러니까 작작 좀 쳐 입었어야지.’

돈 처음 써 보는 티를 풀풀 내는 클로드 앞에 학장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혹여나 눈이 마주칠까 두려운지 시선은 땅바닥을 향해 있었다.

클로드가 누군지는 모르는 듯했지만, 그러니 더더욱 쳐다볼 생각이 안 드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취향이 괴상한 귀족은 대부분 정신이 조금 이상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떨리는 학장의 목소리에 클로드가 손을 흐느적거리며 답했다.

“그냥 마차 타고 왔는데?”

“……누구를 만나러 오셨는지요?”

“여기 학장님 좀 만나러 왔는데 지금 계신가? 데니스 학장님 말이야.”

“제가 데니스입니다.”

“오? 학장님, 저예요. 클로드. 이야, 많이 늙으셨네.”

데니스는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들고 찬찬히 클로드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 확실했다. 데니스는 깜짝 놀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클로드? 진짜 클로드란 말이냐? 아니, 네가 어떻게 이런 부자가…….”

데니스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교수들도 깜짝 놀랐다.

그들도 돌아온 안나를 통해 클로드의 소식을 들었다. 다른 왕국으로 완전히 떠났다는 얘기를 말이다.

그랬던 클로드가 이렇게 엄청난 부자가 되어 나타났으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드는 간드러지게 손가락을 몇 번 흔들더니 말했다.

“아, 손가락 왜 이렇게 무거워? 아무튼 제가 학장님한테 조금 알아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도 할 게 있어서요.”

“그, 그래.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행렬이 너무 과하고 화려해서 학생들까지 다들 몰려나온 상태다. 여기서는 제대로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클로드는 바로 들어가지 않고 말했다.

“세이론 왕국도 가뭄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요새 식사는 다들 잘하고 있습니까?”

“끄응…… 상황을 다 알 거 아니냐. 왕국 곳곳에 빈민들이 넘쳐나는 상황이다. 우리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야.”

왕립 아카데미는 똑똑한 평민들을 인재로 키우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 보니, 왕실과 귀족들에게서 후원금을 넉넉히 받는 편이다.

그런 곳에서마저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면 상황이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클로드는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길리언, 여기 식량 좀 잔뜩 나눠 줘. 넉넉하게 말이야. 뭐 해? 빨리 안 움직이고?”

뒤에 서 있던 길리언이 입술을 씰룩거렸다.

필요한 일이니 장단을 맞춰 주고는 있지만, 갈수록 꼬락서니를 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이번에 성공하면 지셀에게 도움이 될 건 확실하니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길리언은 이를 악물고 병사들을 시켜 식량을 내려주었다.

데니스가 그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저 많은 식량을 이곳에 준다는 건가?”

“기부입니다, 기부. 배부르게 먹어야 공부도 잘되는 법 아닙니까? 주변에도 넉넉하게 나눠 주세요.”

“너, 너 정말 엄청난 부자가 됐구나.”

“우와아아아!”

몰려온 사람들이 클로드의 말을 듣고 감탄을 내질렀다.

어느새 수레 옆에는 병사들이 내려 둔 식량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지금의 시세로 따지면 이 아카데미 전체를 살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그걸 다 기부하겠다니, 통이 커도 보통 큰 결정이 아니었다.

클로드가 잘난 척을 하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환호 소리가 더 커졌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본 그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안나는 안 나온 건가? 오늘 자리에 없나?’

그러는 사이 데니스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런데 힘들게 뭐 하러 직접 내려 줘. 그냥 수레로 두고 가면 우리가 알아서 내릴 텐데. 식량을 준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마우니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

데니스가 판단하기로는 저 정도 식량이면 수레 따위는 몇만 대도 살 수 있었다. 굳이 다시 안 가져가도 되는 하찮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클로드는 살짝 어두워진 안색으로 말했다.

“아뇨……. 수레는 다시 가져가려고요…….”

펜리스에서는 식량보다 저딴 수레가 더 귀하다. 식량은 그냥 동네 똥개들도 맛없는 건 먹다 버릴 정도로 넘쳐났다.

“사연이 있는 귀한 수레인가 보구나.”

“……네. 사연이야 많죠…….”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편하게 얘기하자.”

데니스가 클로드의 손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사실 클로드가 평범하게 나타났다면 이런 환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스승의 죽음에 연루되어 왕국에서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압도적인 돈 자랑을 시전한 데다 식량까지 나눠 주자 다들 함부로 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금 추할 정도로 과하긴 했지만 어쨌든 클로드의 전략 자체는 딱 맞긴 했던 것이다.

접객실로 이동한 뒤, 데니스는 클로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 알아볼 것과 부탁할 게 무엇이냐? 안나를 만나러 온 것이냐?”

“아뇨, 뭐 그건 아니고……. 잠깐 볼까는 하는데…….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훅 들어오는 말에 당황한 클로드가 더듬거리자 데니스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일이냐? 편하게 말해 보거라.”

잠깐 생각을 정리한 클로드가 말했다.

“제 스승님이 가르쳤던 제자들의 명단을 받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 공부한 동기들의 명단도요.”

“으음……. 그들의 명단을 말이냐?”

“네, 그리고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좀 모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학생들을? 왜?”

클로드가 묘하게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저희 영지에서 쓸 사람들을 좀 뽑으려고요.”

그 모습을 보며 데니스는 뭔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지만,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다.

기부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받았으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오히려 크게 성공한 클로드가 학생들을 데려가면 고마운 일이었다.

요즘처럼 안 좋은 시기에는 아카데미의 졸업생들이 갈 곳이 없었다. 다들 사정이 어려우니 있는 입도 줄이는 판에 새로운 사람을 뽑아 갈 리가 없었다.

며칠 뒤, 데니스의 지시로 아카데미 곳곳에 현수막과 대자보가 붙었다.

[펜리스 영지 신규 관리 모집]

[금일 고용에 관한 설명이 있으니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필히 참가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본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렸다.

“루타니아 왕국이라면 강대국이잖아?”

“대영지에서 사람을 구한다더라. 며칠 전에 온 졸부가 그곳의 총관이래.”

“어서 빨리 가 보자!”

이제 졸업을 앞둔 말론은 다른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도 가 봐야 하나. 요새 일자리 찾기도 힘든데.’

기근으로 인해 있던 관리들도 잘려 나가는 판국이다. 심지어 충성을 맹세한 가신들까지 충성 서약을 철회하는 영지도 비일비재했다.

귀족들에게는 기사들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행정관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애초에 기근 전에도 행정관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영지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아무 경력도 없이 공부만 했던 학생들의 근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면 일도 못 찾고 굶어 죽을 거야.’

아카데미에 후원을 하고 인재들을 뽑아가던 귀족들은 이제 이곳에 찾아오지 않는다.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할 판에 누군가를 후원하고 고용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아버지 일이나 물려받아야 하나.’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다고 소문난 말론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부모는 큰 기대를 품고 말론의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왕국 전역에서 모인 학생들 사이에는 뛰어난 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그는 중하위권의 성적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평생 고생만 하며 자식 뒷바라지를 한 부모님을 생각하자 말론은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래도 설명은 들어 봐야지……. 혹시 모르니까…….’

다른 왕국이라 딱히 끌리지는 않았지만 지금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한 사람이라도 뽑는 게 대단한 것이었다.

현실의 무거움에 짓눌린 말론은 무기력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의 가장 큰 홀에 도착하자 이미 대부분의 졸업 예정자들이 모여 있었다.

상황이 워낙 안 좋으니 다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아온 것이다.

잠시 후, 홀에 들어오는 클로드를 실제로 본 말론은 인상을 찌푸렸다.

‘딱 봐도 사기꾼 같아 보이네. 다른 왕국까지 온 거 보면 안 봐도 뻔하지.’

다른 학생들도 말론과 비슷한 심경이었다. 이러다 굶어 죽을 판이라 오긴 했지만, 한순간에 기대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졸부다, 저건 분명 졸부야.’

‘엄청 이상해 보여.’

‘저런 사람이 대영지의 총관이라고?’

몸이 무거워진 클로드는 웬디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들어왔다.

화려하다 못해 괴상한 복장에 분위기가 싸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실망한 학생들의 표정을 보고 클로드는 피식 웃었다.

‘어휴, 귀여운 것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이 몸에 차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 모양이다.

살아 보니 그냥 비싼 건 챙길 수 있을 때 모조리 챙겨 놓는 게 최고였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클로드는 자신의 소개를 간단히 끝내고 펜리스 영지에 대한 소개를 시작했다.

“……우리 영주님께서는 북부의 변경백을 아버지로 두고 있으며 그곳의 후계자로서……. 디갈드 백작령과 카발디 백작령을 무력으로 통합하여 대영지를 거느리는…… 또한 왕국 최고의 권세가인 브랜포드 후작 각하를 후견인으로 두고 있으며 현재 그분의 딸과 약혼 얘기가 어쩌면 오가고 있는 상태로…….”

학생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펜리스 영주는 신분도 신분이지만 그 전적과 배경이 범상치가 않았다. 이야기만 들어 보면 젊고 뛰어난 전쟁 영웅에 왕국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인재 중의 인재였다.

특히 브랜포드 후작의 총애를 받고 어쩌면(?) 그의 딸과 약혼 얘기까지 오간다는 건 큰 충격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인근 왕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권세가였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더욱더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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