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지금 시세의 3배. (1)
무척이나 빠르고 순조로운(?) 영지의 개발 상태를 확인한 지셀은 다음 계획을 점검했다.
“개발이야 어차피 계속 진행해야 하는 일이고……. 앞으로 친왕파와 공작파의 대립이 심해지겠어.”
브랜포드 후작은 원하지 않았겠지만, 지셀 때문에 내전이 앞당겨질 것을 그도 깨달았을 것이다.
데스몬드 백작의 움직임만으로도 증거는 충분하다.
데스몬드군이 2군단에 저지당한 건 이미 지셀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걸 노리고 움직였고 브랜포드 후작은 충분히 자신이 바랐던 대로 행동해 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아멜리아로 시간을 끄는 건 여기까지다.’
데스몬드 백작은 중립이라는 가면과 명분을 버리면서까지 직접 군대를 움직였다.
아멜리아의 반란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던 그가 움직였다는 건, 이제 이곳을 직접적으로 노리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의 공격이 내전과 동시에 이뤄질지, 아니면 그 전에 이뤄질지는 상황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제 해럴드, 그놈 차례군.’
데스몬드는 레이폴드와 더불어 북부 최강으로 손꼽히는 영지다.
다른 지역보다야 다소 손색이 있을지언정, 대영주가 괜히 대영주인 게 아니다.
뛰어난 기사들과 수많은 강병, 그들을 받쳐 줄 만한 풍부한 자원이 있어야 대영주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지도를 잠시 살펴보던 지셀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레이폴드는 아멜리아 탓에 전력이 깎일 테니…… 당분간 북부 최강이란 칭호는 해럴드 그놈이 가져가겠네.”
어차피 레이폴드는 아멜리아가 차지할 것이다. 지셀이 정보를 흘려도 레이폴드 백작은 그녀를 당해내지 못할 게 뻔했다.
하지만 지셀은 아멜리아가 쉽게 레이폴드를 차지하게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뭐, 아멜리아 덕분에 마수의 숲도 개척했고, 그간 공작가와 해럴드의 시선도 끌어 줬으니까. 생각해 보면 참 고마운 여자야.”
지셀은 침묵을 대가로 아멜리아에게서 돈을 뜯어냈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 선택이 최고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멜리아는 그만큼 뛰어나고 위험한 인물이니까.
하지만 당시의 지셀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망나니의 말을 레이폴드 백작이 믿어 줄 리가 없었다. 설사 백작이 지셀을 믿었다 해도, 아멜리아는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멜리아를 쳐 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 뒤로는 오히려 더 위험해졌겠지.’
그쪽에서는 아멜리아 말고 다른 말을 구했을 테고, 그들의 계획을 방해한 자신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그때와 다르다.
펜리스는 시선을 피해 숨을 수 없을 만큼 커졌고 해럴드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지셀에게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위험이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북부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정면으로 맞붙을 수밖에 없었다.
‘친왕파가 공작가를 견제할 수 있는 시간도 한계가 있어. 그전에 압도적인 힘으로 데스몬드를 박살 내야 한다.’
북부의 모든 영주들을 발밑에 두어야 공작가와 싸워 볼 만하다.
그들을 전부 전쟁으로 굴복시키려면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고 스스로 무릎을 꿇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얼마나 확실히 준비하는지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룬스톤이 더 필요하겠군. 당분간 마탑에 판매하는 양을 조금 줄일 수밖에.’
앞으로도 룬스톤이 들어갈 곳은 많다. 가장 많이 쓰일 곳은 당연히 영지 개발이고, 전력을 키우는 데도 써야 한다.
애초에 룬스톤을 찾으러 갈 때부터 이 정도는 예상했다. 이제야 그때가 온 것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곧 도착하겠네.”
얼마 전 적염의 마탑주인 휴베르트에게서 서신이 왔었다.
전쟁에 승리한 걸 축하한다며, 오랜만에 지셀의 얼굴도 볼 겸 지부가 잘 있는지 점검하러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속내가 뻔히 보여 지셀은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 * *
며칠 뒤, 휴베르트가 마탑의 장로들과 함께 찾아왔다.
마법사들이 도착하자 영주성 인근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적염의 마탑이 이 북부에서 유명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적염의 마탑주님이 오셨대!”
“진짜? 그런 유명한 분이 우리 영주님을 만나러 왔다고?”
“그렇다니까. 엄청나게 화려한 마차를 타고 수행원들도 많이 데리고 왔어.”
“그런 분들이 직접 오신 걸 보면 우리 영주님의 명성도 많이 높아진 거겠지?”
공방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손님에 대해 떠들었다. 공방 한쪽 구석에서 마법진을 새기고 있던 알포이가 그 말을 듣고 눈을 빛냈다.
‘탑주님이 왔다고? 침착하자, 침착해!’
알포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이곳에 버림(?)받은 뒤, 탑주인 휴베르트를 볼 방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휴베르트가 직접 온 이상 지금이야말로 이곳을 탈출할 절호의 기회였다.
자신이 노예가 되어 지내고 있다는 걸 알면 탑주도 절대 모르는 척하지 않을 테니까.
주변에서 동요하는 마법사들을 진정시킨 알포이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이 기회야. 내가 탑주님을 만나고 올게. 너희들은 시선을 좀 끌어.”
비장한 알포이의 말에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인 뒤, 바로 행동에 나섰다.
“아, 도구를 어디에 놨지?”
“사제님 좀 불러 봐. 몸이 안 좋아.”
“야야야! 이거부터 빨리 좀 옮겨야지! 드워프들 어디 있어?”
마법사들이 일어나서 괜히 여기저기 찌르고 다니니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 틈을 타 알포이는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공방을 빠져나갔다.
“헤이스트.”
그는 속도가 빨라지는 마법을 자신의 몸에 걸고 잽싸게 움직였다.
시간은 잠깐밖에 없다. 오래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이 찾을 것이다.
‘좋아, 달리자!’
알포이는 정말 최선을 다해 성을 향해 달렸다.
이미 해가 져 주변도 어두워진 상태였다. 멀리서 경계를 서는 사람들도 빠르게 움직이는 자신을 발견하기는 힘들 것이다.
“허억, 허억!”
일하느라 얼마 남지도 않은 마력을 써서 그런지 금세 숨이 차올랐다.
공사장에서 일하며 체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간 무리를 하긴 한 모양이었다.
‘힘내 알포이! 넌 할 수 있어! 넌 포기하지 않는 불꽃 남자잖아! 크윽, 심장 아파!’
이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샘솟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돼! 스승님이라면 반드시 노예 계약을 풀어 주실…….’
휴베르트를 떠올리자 갑자기 불안감이 앞섰다.
그가 지금까지 보아 온 휴베르트는 게으르고 사치스럽고 속도 무척 좁았다.
영주한테 얻을 게 많은 그가 과연 자신을 풀어 줄까? 나 같아도 제자 따위를 위해 손해를 감수하지는 않을 거 같은…….
‘이익, 지금 무슨 생각이야! 세상에 제자를 버리는 새끼가…… 아니, 그런 스승이 어디 있어! 나는 그래도 내 스승님은 안 그래!’
성이 얼마 남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집중을 흐트러뜨릴 필요는 없었다.
저 앞에서 시끄럽게 난동을 피운다면 휴베르트가 반드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마력까지 쭉쭉 써 가며 달리던 알포이가 순간 걸음을 멈췄다.
‘뭐지?!’
사아아악!
갑자기 주위에서 진한 어둠이 몰려들더니 눈앞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상에 알포이가 바로 손에 마력을 모았다.
이 영지에서는 이상한 걸 보면 일단 공격부터 하는 게 이득이다.
하지만 알포이가 마법을 시전하는 것보다, 어둠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사람의 손이 튀어나오는 게 더 빨랐다.
빠각!
‘아이, 씨ㅂ…….’
목이 돌아간 알포이의 의식은 거기서 끊겼다.
쓰러진 알포이를 내려다보며 벨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얘 갈수록 눈치도 빨라지고 잡기도 힘들어지네. 저녁 시간이라 마력도 거의 다 썼을 텐데 이 정도 속도로 움직인다고? 마력 효율이 얼마나 높아진 거야?”
매일 같이 공사를 하며 쉬지 않고 마법을 써대니 실력이 안 늘 수가 없다.
서클은 그대로이지만 마력 운용 능력과 응용력이 기형적으로 발전해 버린 것이다.
실전에서 상대할 때는 오히려 그런 게 더 위협적이다.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벨린다가 보기엔 마법사 주제에 어지간한 기사들과도 정면 승부까지 가능할 듯했다.
혀를 몇 번 찬 벨린다가 알포이를 다시 공방에 던져 버렸다.
기절한 알포이를 본 마법사들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고 벨린다는 한 번 싱긋 웃고 자리를 떴다.
실력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 이들이 벨린다를 넘어서기엔 한참은 멀었다.
* * *
“오랜만입니다, 탑주님. 장로님들도 오셨군요.”
“오오, 그래. 이번에도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네. 정말 싸움 하나는 잘하는구먼. 그래, 잘 지냈는가?”
지셀의 인사에 휴베르트가 환하게 웃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 새끼가 또 전쟁을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었다.
자기가 망하면 마탑도 힘들어진다는 걸 제발 좀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안도감 가득한 표정으로 대충 인사를 건넨 뒤, 그간 서로 어떻게 지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휴베르트가 요새 자신이 얼마나 잘나가는지 자랑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영지의 귀족들이 다 나한테 잘 보이려고 선물을 어찌나 많이 가져다주는지…….”
“아, 예.”
“사교 모임에서 내 인기가 최고인데…….”
“아, 예.”
“그러니까 자네도 나랑 더 친하게 지내면 앞으로 영지에 많은 도움이…….”
“아, 예.”
심드렁한 지셀의 반응에 휴베르트가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눈앞에 있는 놈은 요새 너무 잘나간다. 브랜포드 후작까지 등에 업고 있으니 예전처럼 마탑주의 권위를 내세우기도 어려웠다.
“크흠흠, 그래. 지부는 어떻게, 도움이 많이 되는가? 알포이는 잘 지내고?”
“그럼요. 영지에 아주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알포이도 한번 만나고 가시겠습니까? 오늘은 늦었으니 오랜만에 제자도 만나고 푹 쉬다가 돌아가시죠. 저는 이만 바빠서…….”
은근하게 쫓아내려는 지셀의 말에 휴베르트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저었다.
“아냐, 아냐! 잘 지내고 있으면 됐지. 뭐 하러 만나. 나 걔 만나러 온 거 아니야. 알아서 잘하겠지. 신경 안 써도 돼.”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무슨 일로? 혹시 뭐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휴베르트와 장로들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셀은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우리 사이에 뭐 그렇게 어려워하십니까?”
“그렇지? 우리 사이에 말이야. 허허허.”
휴베르트는 활짝 웃더니 곧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식량 좀 살 수 있을까? 아주 많이 필요한데.”
“흐음, 요새 식량이 엄청 비싼 건 아시죠?”
“아, 알지! 그런데 마탑 식구들도 좀 늘었는데 이게 참…… 돈이 있어도 원하는 만큼 구하기가 쉽지 않네.”
지셀에게 룬스톤 수급을 받은 뒤부터 적염의 마탑은 예전의 성세를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제자들도 더 늘었고 그에 따라 그들을 보조하기 위한 사용인들의 고용도 늘었다.
마법 도구와 스크롤 장사도 호황을 맞이해 자금도 예전 못지않게 쌓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가뭄이 터지면서 모든 게 멈추고 말았다.
북부 제일이라 불리는 진홍의 마탑에서도 지셀에게 식량을 사러 올 정도였으니, 다른 곳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끄응……. 요새 식량 구하기가 참 힘들더라고. 그런데 여기에 식량이 많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야…….”
“마탑이 그래도 굶을 거 같지는 않은데요?”
“아휴, 말도 마. 하루에 수백 명분씩 소모하는데, 갈수록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도 미친 듯이 오르니 내 골치가 아플 정도일세.”
그나마 시장에 나도는 것들도 귀족들이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영지의 법까지 바꿔 가며 쓸어 가는 상황이었다.
마탑의 권위와 풍부한 자금 덕분에 지금까지 버틴 거지, 아니었으면 망해도 진작 망했을 것이다.
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던 카발디 백작도 병사들을 굶길 수밖에 없을 정도였으니까.
가뭄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한번 흉년이 들면, 최소한 다음 수확기 전까지는 공급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휴베르트가 땀을 흘리며 말했다.
“어떻게…… 식량도 좀 같이 팔면 안 될까? 자네 영지도 인구가 늘어났으니 쉽지 않겠지만…… 어려움을 나눠야 진정한 친구라는 말도 있지 않나.”
휴베르트는 지셀에게 식량이 얼마나 많은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냥 풍문으로 식량이 정말 많다더라 하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놈은 그 귀한 식량을 팔아 병사를 구하고 전쟁까지 치렀다.
‘끄응, 아깝게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영지민들도 늘어났으니 어쩌면 여유분이 없을지도 몰라. 안 팔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불안하긴 했지만, 어차피 달리 구할 데도 없으니 일단 상황이라도 보려고 찾아온 것이다.
사정을 다 들은 지셀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이야 아직 많죠. 저희가 먹을 만큼 빼고도 충분합니다.”
“지, 진짜? 진짜 그렇게 많아? 그럼 우리한테 좀 팔아 주게나! 우리는 귀족들한테 파는 만큼은 안 팔아도 돼. 그냥 안전하게 2년간 우리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을 정도만…….”
적염의 마탑은 한 때 북부 제일이라 불렸을 정도로 큰 곳이다.
마탑에서 가르치는 제자들에 고용인들까지 더하면 수백 명이 가뿐하게 넘어간다.
그런 인원이 안전하게 2년간 소모하는 양이면 어마어마할 것이다.
피식 웃은 지셀이 예전처럼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지금 시세의 3배.”
휴베르트와 장로들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