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아주 좋은 선물을 보내 줬어. (2)
맥스는 억울하다는 투로 사정하듯이 말했다.
“저희가 일부러 의뢰를 소홀히 한 건 아닙니다. 그리고 관례상 이런 경우는 의뢰인의 목적이 이루어진 셈이니 그냥 넘어가는 게 보통입니다.”
그들이 늦장을 피운 건 아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달려왔다.
그래도 공성전이니 시간은 충분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전쟁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나 있었다. 심지어 다들 전장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의뢰인의 바람대로 펜리스 남작이 살아 있어 다행이라 안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셀은 그 점을 집요하게 따졌다.
“내가 성문에서 혼자 포위당해서 죽을 뻔했다니까? 위험할 때 구출했어? 안 했어?”
“아, 안 했습니다.”
사실 위험했는지도 모른다. 근데 본인이 위험했다고 하니 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의뢰를 제대로 수행한 거야? 안 한 거야?”
“아, 안 한 거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전쟁이 빨리 끝날 줄은 정말 몰랐…….”
“그럼 다른 거로라도 돈값을 해야 할 거 아냐! 어? 지금 내 동업자들한테 사기를 친 거냐고! 어?”
지셀의 호통에 맥스와 해결사들은 할 말이 없었다. 뭔가 억울한데 상대방 말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의뢰인이 하필이면 브랜포드 후작의 딸인 로잘린과 귀부인들의 실세인 메리엘이었다.
이 미친놈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들의 눈 밖에 나게 되면 장사 접어야 할 수도 있다.
포위당한 상태라 도망가기도 글렀다. 최대한 상대방을 달래 돌아가야 했다.
“다, 다음 의뢰 때 할인도 해 드리고 더 잘해 드리겠습니다.”
“다음? 다음이 어디 있어? 나보고 또 위험해지라고? 그리고 뭐 크게 선심 써서 할인해 주는 것처럼 말한다? 반값 할인은 당연한 거고!”
반값이라고는 절대 말한 적 없다.
‘이 새끼…… 전혀 말이 안 통한다……. 차라리 원하는 걸 묻는 게 낫겠어.’
“그,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맥스가 조심스럽게 묻자, 지셀은 그제야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일단은 여기 전장 정리부터 도와주고, 우리 영지 일도 좀 도와주고 가. 힘쓸 사람이 조금 필요하거든.”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을 거 같았다. 미친 귀족하고 싸울 바에는 시간을 조금 쓰는 게 나았다.
“끙, 알겠습니다. 그럼 며칠만 도와주고 돌아가겠습니다.”
맥스를 비롯한 해결사들은 풀이 죽은 얼굴로 병사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들은 진짜 며칠만 생색내기로 도와주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셀의 생각은 달랐다.
‘다들 힘 좀 쓰게 생겼으니까 오래오래 써먹어야겠다. 인부들 일당으로 계산하면 되겠지?’
아마 로잘린과 메리엘에게 받은 돈은 못 해도 몇천 골드는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그걸 인부들의 일당으로 셈해서 까려면 두둑하게 쳐 줘도 몇 년은 굴러야 할 것이다.
해결사들이 일거리를 찾아 움직이자 앳된 인상의 사제만 홀로 덩그러니 남아 버렸다.
사제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
지셀은 들은 척도 안 하고 귀를 파며 답했다. 그래도 상대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해결사들을 대할 때보다는 조금 더 정중했다.
“우리 사제님은 아주 젊어 보이시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피, 피오테라고 합니다. 아름다움과 풍요의 여신 쥬아나 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미의 여신 쥬아나? 그쪽 분들은 전쟁터나 지저분한 곳을 무척 혐오하지 않으시던가?”
지셀의 물음에 피오테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그…… 에일즈버 백작 부인께서 저희 교단에 기부도 많이 하시고 친하기도 하셔서 특별히 저에게 부탁을…….”
그 이름을 들으니 이해가 가서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미용’ 하나만큼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바로 메리엘이다. 화장품의 진가도 가장 먼저 알아채지 않았는가.
그런 그녀라면 아름다움을 숭상하는 쥬아나의 교단과 꽤 친분이 있을 것이다.
메리엘의 권위와 돈, 인맥이라면 사제 한 명 정도 전장으로 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렇군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어쨌든 이런 험한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네……. 그럼 전 이만…….”
“어디 가시게요? 사제님도 돈 받으셨을 거잖아요? 아까 걔들처럼 돈값은 하셔야죠?”
그러자 피오테는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돈 안 받았습니다.”
“예? 아무리 그래도 사제가 대놓고 거짓말을 합니까?”
“저, 저는 여신께 맹세코 절대 돈을 안 받았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아무리 부패한 사제라도 웬만해서는 거짓말을 할 때 여신의 이름을 팔지는 않는다.
지셀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사제를 바라보았다.
돈을 안 받았다니? 이 시대에 돈을 안 받고 도와주러 오는 사제가 있다고? 그러면 못 붙잡잖아?
‘그건 말이 안 되는데? 그런 사제가 있을 리 없잖아.’
지셀은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고 피오테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옅은 분홍색의 머리카락에 체구도 작고, 듬직하다는 말보다 예쁘다는 말이 훨씬 잘 어울릴 정도로 선이 고운 남자다. 빤히 쳐다보자 소심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숫기도 전혀 없어 보였다.
피부도 하얗고 매끈한 게 고생이라곤 전혀 안 하고 신전에서만 곱게 자란 사람 같았다.
‘이런 사람이 돈을 받고 위험한 전쟁터까지 오는 건 전혀 안 어울리긴 하지만…….’
절대 메리엘의 안목으로 고를 사람이 아니기에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여신의 뜻을 전하겠다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원래 사제들은 직접 돈 받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관례인데 말이지.’
잠시 고민하던 지셀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고 화색을 띠었다.
‘대박! 대박이다! 드디어 제대로 된 사제를 구하는구나!’
북부의 대부분 영지에는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교리를 전파하는 전도사들 정도가 돌아다닐 뿐이었다.
애초에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제가 무척 적기 때문에, 대영주의 영지나 수도 급의 대도시가 아니라면 사제는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
길리언이 딸을 고치기 위해 레이폴드를 떠나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맞는다면 이 사제를 영지에 꽤 오래 붙잡아 둘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봐요. 다른 사람이 돈 받았죠? 엄청 높으신 분이 대신 받아서 사제님은 그냥 어쩔 수 없이 온 거 맞죠? 사제님들 관례 때문에 이 단순한 걸 바로 생각하지 못했네.”
“읏…….”
피오테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괜히 혼자 깨끗한 척하다가 진실을 말한 셈이 되어 버렸다.
카르데니아의 신전에는 당연히 대주교를 비롯해 고위 사제들이 지내고 있다.
아무리 메리엘과 로잘린이라 해도 변방의 위험한 영지에 고위 사제들을 쉽게 보낼 수는 없었다.
지금도 당연히 그들에게 돈을 받은 고위 사제가 신전에서 키우던 말단 사제를 대신 보낸 것이다.
어차피 후에 다른 영지로 파견을 가야 하니 미리 경험을 쌓아 보라는 명분을 들어 말이다.
순진한 피오테는 한껏 억울해하며 말했다.
“그, 그건 맞지만 저는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는 해결사들처럼 여기에 잡혀 있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입고 좋은 것만 먹고 자랐다. 그런데 처음 보는 세상은 자신의 생각과 너무나도 달랐다.
‘신전 밖은 지옥이야. 빨리 돌아가야 해.’
이곳으로 오면서 많은 마을을 거쳤다. 그곳에 사는 불쌍한 빈민들을 보며 피오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오만이었다. 전쟁터야말로 진짜 지옥이었다. 그전에 지나온 영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방이 시체에 부상자들의 신음이 울려 퍼지고 있다. 피 칠갑을 한 채 돌아다니는 기사와 병사들을 볼 때마다 꼭 악마를 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은 억지로 구역질을 참고 있는데, 눈앞에 있는 영주란 작자는 피에 절은 상태로 웃고 있다.
‘으…….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웃고 있을 수가 있지? 역시 신전 밖은 무서워. 이해할 수 없는 놈들투성이야.’
죄다 악마들 같았다. 여기는 악마의 소굴이 분명하다.
빨리 돌아가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순진한 사제를 보며 지셀이 피식 웃었다.
“그래요, 그럼 돌아가세요. 귀하신 분이 돌아가겠다는데 잡을 수는 없죠.”
“정말입니까? 저, 저는 그러면 바로 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혼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모르겠네. 가시는 길 평안하시길.”
“어, 엇?”
그제야 현실을 깨달은 피오테는 크게 당황했다.
몬스터를 비롯해 도적놈들이 툭하면 돌아다니는 세상이다. 도시와 마을도 성곽이나 목책으로 둘러싸야 할 정도다.
그런 세상에서 경험도 부족하고 전투 사제도 아닌 자신이 혼자서 수도까지 돌아간다고?
성 밖으로 나가자마자 죽거나 어딘가에 납치될 확률이 100%였다. 특히 자신처럼 예쁘게 생긴 남자는(?) 더 위험하다.
‘아, 안 돼. 호, 혼자서는 절대 못 돌아가.’
여기까지 올 때는 든든한 해결사들과 함께하니 별걱정이 없었다.
실제로 몇 번 몬스터와도 마주치고 산적들도 만났지만, 그들이 쉽게 처리했다.
결국 피오테는 울상을 지으며 지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 영주님. 호위를 좀 붙여 주세요.”
“얼마 주실 건데요?”
“네? 도, 돈이요? 돈을 달라고요? 저 사제인데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그쪽도 돈 받고 사제님 보낸 거잖아요. 저 호구 아닙니다.”
“그, 그건 그렇지만…….”
피오테는 이번에도 당황하고 말았다. 신전에 기부하는 귀족은 많이 봤어도 돈을 뜯으려는 놈은 생전 처음 봤다.
보통은 신전의 위세와 권위 때문에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열심히 퍼 준다.
어쩔 수 없이 피오테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제가 돌아가서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돌아가면 이쪽은 쳐다도 안 볼 거야!’
하지만 지셀은 그런 입에 발린 소리에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싶은데, 우리도 사람이 부족해서요. 정 혼자 돌아가기 힘들면 아까 그 친구들 돌아갈 때 같이 가시든가요.”
“으…….”
한 마디로 그냥 보내 주기 싫으니 일 좀 하다 가라는 뜻이었다.
혼자 돌아가면 목숨이 위험해진다. 어쩔 수 없이 피오테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결사 친구들이 얼마나 붙잡혀 있을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하지만 지셀은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살짝 협박도 곁들였다.
“아, 중간에 다른 루트로 도망가시거나 열심히 일 안 하시면, 내가 아주 크게 소문낼 겁니다.”
“소, 소문이요? 무슨 소문이요?”
“쥬아나 교단에서 돈만 빼먹고 도망갔다고요. 그러면 다들 상당히 곤란해지겠죠? 제 뒤에 누가 있는지도 잘 아실 거고.”
피오테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신전은 마탑 이상으로 위계질서가 엄격하다.
가장 말단 사제인 자신 때문에 고위 사제가 욕을 먹는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평생 수도원에 갇혀 살면 다행이고, 여기보다 더 심각하고 위험한 곳으로 쫓겨날 수도 있었다.
“저, 저기…… 잠깐만…….”
사정을 좀 하려고 얼굴을 바라보니 상대방은 아주 사악하게 웃고 있다.
이 새끼는 진짜 악마 대장인 게 분명했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여신께서 내 주신 시험에 든 게 확실했다.
자고로 신앙이란…… 이런 시험을 통과해야 증명받을 수 있는 법이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말 놓고 지내죠? 같이 오래 지낼 건데 매번 딱딱하게 말하면 너무 정이 없어 보이잖아요?”
“네……. 그냥 영주님 편하게 하세요……. 저는 이게 편해서요…….”
“에이, 말 놔도 되는데. 그래, 어쨌든 우리 잘 지내보자고. 일단 부상병들부터 치료를 좀 해 줘. 우리 영지에 의사가 부족하거든.”
바로 명령조로 들어간다. 진짜 살면서 이런 망나니 같은 귀족 새끼는 처음 봤다.
이런 대접을 받는 것도 생전 처음이라 피오테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피에 절은 악귀 같은 놈 심기에 거슬렸다가는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네…….”
피오테는 비틀거리며 바로 부상병들에게 다가갔다.
다른 건 몰라도 외상 치료와 활력 증진은 신성력이 최고다. 사제는 최고급 포션 통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좀 쉬다 보면 자동으로 충전까지 된다.
자동 충전 포션이라니, 그야말로 돈다발이 굴러들어 온 셈이었다. 색깔도 분홍색이라 참 예쁘다.
말단 사제다 보니 신성력이 조금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마법사보다 훨씬 귀한 인력이었다.
‘이야,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네. 최대한 오래 붙잡아 둬야겠다. 순진해서 말도 잘 들을 거 같아. 두 사람이 아주 좋은 선물을 보내 줬어. 운이 좋군.’
힘 좀 있어 보이는 노동자 열 명에 최고급 인력인 사제까지 덤으로 구했다.
이러니 메리엘과 로잘린에게 감사 인사가 안 나올 수 없었다.
“자, 이제 나머지 놈들도 정리해 볼까?”
실컷 웃은 지셀은 몇 명의 기사들과 함께 영주성으로 향했다.
이미 소식이 들어갔는지 영주성에는 백기가 걸려 있었고, 카발디 백작령의 고위 가신들과 관리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새 영주님을 뵙습니다.”
“저희는 그저 카발디 백작의 명만 따랐을 뿐입니다.”
“창고도 활짝 열어 두었습니다. 이 모든 건 이제 남작님의 것입니다.”
“앞으로 성심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지셀은 그들을 휙 둘러보았다.
카발디 백작의 곁에서 온갖 이득을 취하고도 데스몬드 백작에게 붙어먹은 자들이다.
전생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전쟁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자신만만했을 것이다. 역으로 펜리스를 점령해 식량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도 했겠지.
그랬던 자들이 이제는 살고 싶어서 애타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흠.”
무심한 눈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인 지셀은 옆에 있는 길리언에게 말했다.
“하급 관리들은 모두 감옥에 가둬라. 죄를 따로 확인한 뒤 처우를 결정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영지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던 가신들은…….”
잠시 그들을 둘러본 지셀이 스산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모두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