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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92화 (192/269)

192화 내 옆에서 모두 떨어져라. (3)

사위가 침묵으로 물든다.

지셀은 몇 번의 움직임만으로 이곳에서 가장 강한 기사 다섯 명을 순식간에 죽였다.

5대1의 전투가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다들 상상도 못 했다.

카발디의 병사들은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괴물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런 실력자가 이곳에 쳐들어왔단 말인가.

카발디의 기사들을 처치한 지셀은 아무런 말 없이 손을 앞으로 흔들었다.

말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바로 펜리스의 기사 하나가 크게 외쳤다.

“자, 나머지도 쓸어 버리자!”

적군과는 대조적으로 펜리스의 기사들은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은 지셀의 손짓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마나를 뿜어내며 공격을 시작했다.

“으하하하! 역시 우리 영주님이다!”

“진짜 볼 때마다 대단하다니까!”

“최고다! 최고! 나도 따라 해 본다!”

지셀의 활약으로 더욱더 사기가 오른 펜리스의 기사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전장을 휘젓고 다녔다.

카발디의 병사들이 어떻게든 버티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가장 많은 병력을 배치한 것이 무색하게도 방어선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전황을 지켜보던 제이먼이 눈을 감았다.

‘끝인가.’

애초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지만, 전투를 시작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말았다.

그의 능력으로는 아주 잠깐, 검 몇 번 휘두를 정도의 시간을 버틴 게 전부였다.

그 스스로도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모른 채 말이다.

그나마 펜리스군에 궁병이 없기에 성 밖에서는 공격당하지 않아 시간을 조금 더 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보병이라고 놀고만 있는 건 아니니까.

둥! 둥! 둥!

성벽이 완전히 점령당하자 펜리스군 쪽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좌우익의 보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이미 사다리까지 따로 준비한 모양이었다.

곧 성 밖의 병사들까지 사다리를 타고 넘어올 것이다. 이 상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문이 열릴 게 뻔했다.

그때, 저 멀리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아!”

멀리서 들려온 함성의 뜻을 깨닫고 제이먼은 눈을 번쩍 떴다.

아군이다. 아군이 오고 있었다. 이렇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는 건 조금만 더 버티라는 뜻이다.

‘잘만 하면 다시 몰아낼 수 있다.’

대군이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아군이 펜리스군보다 일찍 도착한다면 차근차근 쳐 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성문을 못 열게 사수해야 한다.

성문이 열리고 밖에 있는 대군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온다면 지원을 온 아군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테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틸 수 있다면…….’

고뇌하던 제이먼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상황이 급박해서 성문에 있는 장치를 이제야 생각해 냈다.

“성문! 창살 문의 크랭크를 모두 부숴라! 적이 쉽게 성문을 열지 못하게 해!”

카발디 성의 성문은 무척이나 두껍다. 안쪽에는 충차의 공격에 대비해 내리닫이 창살 문 또한 엄청난 두께로 만들었다.

북부에서 제일가는 철광석의 산지답게 강철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던 것이다.

이 무거운 창살 문을 올리기 위해서는 네 개의 크랭크를 동시에 조작해야 했다.

그걸 부숴 버리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열 수가 없게 된다. 안에서도 성문을 열려면 부숴야 하는 것이다.

차후에 복구할 때 많은 재원이 들겠지만, 당장 성이 점령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콰아앙!

성문에 붙어 아군을 지휘하던 기사는 제이먼의 명령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창살 문의 조작 크랭크를 모두 박살 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행동이었다.

콰직!

“쯧.”

간발의 차이로 기사를 막는 데 실패한 지셀이 혀를 찼다.

그의 몸은 적들의 피에 젖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적 지휘관이 제법이군.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 있었나 보네.”

기사들과 몇 번 공방을 벌이긴 했지만 사실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적들을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적 지휘관은 그 짧은 시간 내에 성벽의 병력을 줄이고 성문에서 발을 묶는 전략을 생각해 냈다.

보통 이런 기습에 당한 상대방은 우왕좌왕하거나 도망가기 바쁘다. 적이지만 빠른 판단과 용단은 인정해 줄 만했다.

“그냥 부수려면 시간이 걸리겠는데.”

성문 또한 쉽게 열 수 없는 구조였다.

카발디군이 도착한 뒤에는 뒤늦게 성문을 열더라도 펜리스군은 축차 투입을 감행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대군의 이점을 제대로 살릴 수 없을 것이다.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아군의 피해는 전무하고 적은 전멸 상태에 가까웠다.

소수 정예로만 투입한 덕분에 순간적인 파괴력은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았다.

“흠, 여기까지인가?”

하지만 지속력이 문제였다.

이 잠깐 사이에 기사들은 거의 모든 마나를 쏟아부었다.

다들 지쳤는지 검에 서린 빛이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만약 이 상태로 더 무리하게 된다면 피를 토하고 쓰러질 게 분명했다.

몰려오는 적들과 그런 상태로 싸울 수는 없다.

지셀은 다시 성벽을 바라보았다.

아군이 열심히 올라오고 있지만, 전부 다 성벽을 넘어오기 전에 카발디의 주력이 먼저 도착할 것이다.

‘늦어. 역시 아직은 부족하군.’

여기저기서 강제로 뜯어낸 병력이라 훈련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성벽을 통해 병력을 보충하며 싸워도 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력을 최대한 아껴야 하는 지셀의 입장에서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성문을 빨리 열고 진형을 갖춘 뒤,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후, 피곤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지셀이 피식 웃었다.

성문을 열지 않아도 사실 승기는 기울었다.

카발디군이 주력을 끌고 와도 펜리스군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군의 병력을 지킬 방법이 있는데 굳이 피해를 감수할 필요도 없다.

상대 지휘관에겐 미안하지만, 이런 상황도 이미 지셀이 생각했던 경우의 수 안에 들어가 있었다.

어쩌면 더 세련되고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지금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내 옆에서 모두 떨어져라.”

지셀은 주변의 기사들을 물리고 검을 앞으로 뻗었다.

* * *

초조해하며 성문을 내려다보던 제이먼은 펜리스군의 움직임이 멈추자 쾌재를 불렀다.

“됐다! 됐어! 이 정도면 아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제이먼의 생각보다 더 빨리 아군이 움직였다. 역시 카발디의 병사들은 북부의 강군으로 뽑힐 만했다.

“성문을 여는 게 쉽지는 않을 거다.”

적이 전부 마나를 쓸 줄 안다 해도 저 두꺼운 창살 문과 성문을 부수려면 무기를 수백, 수천 번은 휘둘러야 할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아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성문을 막더라도 성벽을 넘어오는 적들과 다시 난전을 벌여야 하고, 전력 차를 생각하면 아군이 이길 거라 장담할 수도 없었다.

‘아마 패배할 확률이 더 높겠지.’

그러나 승리할 가능성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커진다면,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나는 곧 죽겠군.”

제이먼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미 도망갈 기회는 놓쳤다. 양쪽 성벽에서 펜리스군이 넘어오고 있었고 방어하던 병력은 전멸한 상태다.

호위 기사마저 성문을 지키려고 전부 밑으로 내려보내 제이먼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도망을 갈 거라면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도망갔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아군은 더 빨리 전멸하고, 성문도 박살 났을지 모른다.

“이게 최선이었다.”

자신은 지휘관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다만 적이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너무 강력했을 뿐.

잠깐이라도 발목을 잡은 걸로 만족해야 했다.

한숨을 내쉰 제이먼은 검을 뽑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내 차례인가?”

그의 앞에는 검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에는 로브를 두른 암살자가 서 있었다.

제이먼은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을 알 수 있겠는가?”

“…….”

“누가 날 죽였는지 정도는 알고 가고 싶은데.”

“벨린다.”

“그대 같은 실력자에게 죽게 돼 영광이네.”

벨린다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말했다.

“이곳 지휘관인 거 같은데 이만 항복하고 협조하는 게 어때요? 제법 능력이 있어 보이니 살려 줄지도 몰라요. 당신 덕분에 예상 시간보다 조금 늦어졌거든요.”

“그럴 수는 없네.”

“안 그러면 지금 여기서 죽을 텐데요?”

“죽는 걸 두려워해서야 어찌 기사라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주군을 더 보필하지 못하는 게 두려울 뿐이지.”

제이먼은 미련없는 표정으로 검을 내밀었다.

스르륵.

벨린다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어둠과 함께 움직였다.

혹시 점령 후 성을 안정시키는 데 쓸모가 있을까 싶어 제안했지만, 상대가 거절했으니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는 한번 결정을 내리면 절대 손속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파각!

벨린다의 손짓 한 번에 제이먼의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카앙! 카앙! 카앙!

그 뒤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제이먼은 연신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한 영지의 기사이자 무관장답게 제이먼의 실력도 제법 뛰어났지만, 예전보다 경지가 오른 벨린다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카앙!

제이먼이 다시 한번 가까스로 벨린다의 단검을 막았을 때.

펄럭.

그녀의 로브가 흔들리며, 그 안에서 몇 개의 단검이 쏘아져 나갔다.

퍼퍼퍽!

“커억!”

그걸로 전투는 끝이 났다.

온몸이 단검에 뚫린 제이먼은 피를 쏟아 내며 무릎을 꿇었다.

가물거리는 눈을 몇 번이나 깜빡거리던 그는, 꺼져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펜리스 남작 때문에…… 북부가 전란에 빠지겠구나…….”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 * *

현시대에 ‘마스터’는, 경지를 일컫는 말이라기보다는 그저 칭호에 가까운 말이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관한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똑같이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사람들끼리도 그 실력에 다소 차이가 있었다.

그저 그 사람의 활약과 명성, 그간 보여 준 실력을 토대로 사람들이 ‘마스터라 불릴 만하다’ 하고 인정해 주는 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주 오래전에는 분명 마스터의 경지에 관한 기준이 있었다.

지금은 그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우우우웅.

지셀은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나가 모일수록 검이 떨리며 붉은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이것이 흔히 기사들의 자격으로 통하는 ‘마나 블레이드’다.

우우우웅!

하지만 지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마나를 더욱더 쏟아부었다.

검의 떨림이 심해지고 빛이 더욱더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신기해하는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에서 나오는 빛이 어찌나 밝은지 점점 주변으로 퍼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우우웅!

그렇게 퍼져 나가던 빛은 다시 크기를 줄였으나, 뿜어내는 빛의 세기는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압축된 마나는 계속 밀려드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사방으로 퍼져 나가려 했다.

하지만 지셀은 정신을 집중해 다시 그것을 잡아끌고 압축시켰다.

한없이 압축되고 압축되는 마나의 힘.

이제 지셀의 검에 서린 붉은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태양처럼 밝은 그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날 정도였다.

그래도 지셀은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멈추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대리석상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건 단순히 많은 양의 마나를 무작정 밀어 넣는다고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힘에 대한 통제, 이치에 관한 깨달음,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표현하겠다는 강력하고도 단호한 의지.

이 모든 것이 들어맞아야만 한다.

우우우우웅웅!

그리고 지셀은 그 모든 것을 이미 체득한 사람이었다.

부족한 것은 그저 마나의 양뿐.

그나마 지금은, 잠깐이라면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블러드 퓌톤의 독 덕분에 마나 양이 급격히 많아졌고, 육체 또한 이 힘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수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압축되고 압축되던 마나는 어느 순간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파아아아악!

빛의 형태가 달라졌다. 단순히 검날에 서려 은은히 빛나는 그런 빛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은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저, 저게 뭐야!”

“마, 마나가 무슨 저렇게 길게…….”

“빛이…… 마치 타오르는 거 같아.”

연기처럼 일렁거리던 빛은, 어느 순간 검날의 길이를 몇 배나 뛰어넘으며 올곧게 앞으로 뻗어 나갔다.

그 빛은 태양보다 밝고 뜨거워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이 느껴졌다. 감히 닿을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진정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

마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정제된 힘의 절정.

세상의 이치를 자신의 의지 속에 가두고 재정립을 해야만 내보일 수 있는 기예.

빛의 검, 오러 블레이드.

시대마다 그것을 칭하는 이름은 달랐지만, 가장 유명했던 건 고대 제국에서 불렀던 이 이름이었다.

고대 제국에서는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는 자만이 마스터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후우…….”

지셀은 오러를 머금은 검을 두 손으로 잡고 천천히 뒤로 당겼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영롱하고 작은 빛의 입자들이 점점이 퍼져 나간다.

마치 별 무리가 움직이는 듯한 그 아름다운 모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저 넋을 놓고 지셀만 바라보았다.

황홀한 표정의 사람들을 뒤로한 채, 지셀은 숨을 한 번 깊이 들이쉬고는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파아아악!

순간적으로 환한 빛이 모두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자.

쿠쿠쿵!

완전히 두 동강 난 성문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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