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우리의 힘을 보여 줄 시간이다. (3)
공격을 시작하기 전, 지셀은 바네사에게 물었다.
“적의 병력 배치 상태는?”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바네사가 눈을 떴다. 그녀의 옆에는 마법사 하나가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영주님 예상대로 땅굴의 목표 지점에 모두 몰려가 있어요. 성문과 성벽 주변에 남아 있는 병사들은 절반도 되지 않아요.”
바네사는 6서클에 이른 덕분에 다른 마법사들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탐색할 수 있었다.
부족한 마력은 다른 마법사들의 것을 빨아먹어 해결했다. 그녀에게 마력이 빨려 기절한 마법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마법사들이 쓰러져 나가도 지셀은 계속 바네사에게 탐색 마법을 쓰게 했다.
잠깐이라도 전장 전체를 훑어볼 수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다. 저번 전쟁 때도 마법사들을 갈아 넣은 덕분에 첩자들을 잡지 않았던가.
적들이 자신의 예상대로 움직였음을 확인한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좋아, 이제 시작할 때가 됐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자칫 잘못하면 큰 위험에 빠질 거에요.”
걱정 어린 바네사의 말에 지셀은 픽 웃었다.
“대신 성공만 하면 큰 피해 없이 성을 점령할 수 있지.”
“차라리 제가 마법사들의 마력을 이용해 성벽의 병사들을 공격하는 건 어떨까요?”
“안 돼. 아직은 마법사들의 존재를 대놓고 드러낼 때가 아니야. 그리고 애초에 그 방법으로는 피해를 줄 수는 있어도 쉽게 점령할 수는 없어. 적들은 지원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려 할 테니까. 우리한테 시간이 없는 건 알지?”
“그래도…….”
“들어가서 적들을 잡아 죽이고 성문을 연다. 얼마나 간단하고 좋아? 오래 굶어서 힘이 다 빠진 놈들이니 상대하기 어렵지 않을 거야.”
확고한 지셀의 대답에 바네사는 고개를 숙였다.
위험하긴 하지만, 성공한다면 보상도 그만큼 컸다. 하루 만에 성을 점령할 수 있다는 건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있었다.
그저 별 피해 없이 성공하기를 바랄 수밖에.
“알겠어요. 부디 몸조심하시길…….”
“그래. 이제 슬슬 준비하자고.”
바네사의 걱정을 뒤로하고 지셀은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밤이 되면 우리는 열기구를 타고 적의 성으로 뛰어든다. 그 뒤 성벽을 점령하고 성문을 열 것이다.”
“…….”
얼마 전까지 허세를 부리던 기사들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온 보급품에 수십 대의 열기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찰용이라기엔 너무 많은 수였다.
그걸 본 기사들은 얼마 전에 익혔던 낙법을 떠올리면서도 설마설마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불안감이 현실이 될 줄이야.
영주가 말을 한 이상 그 작전은 취소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영주의 고집을 잘 알고 있기에 기사들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한 기사가 의아해하는 어조로 물었다.
“그러면 땅굴은 왜 판 겁니까? 그쪽으로는 공격을 하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거기는 미끼다. 지금 적의 주력이 역으로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땅굴 출구 쪽에 몰려가 있지.”
“그 말씀은…….”
“그래, 지금 열기구를 타고 성 내로 진입하면 빠르게 성문을 공략할 수 있다.”
기사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영주는 판 전체를 손안에서 주무르고 있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진짜는 열기구였다. 공성 병기를 준비하지 않은 것도, 땅굴을 판 것도 모두 적의 방심을 유도하고 시선을 끌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걸 위해서 낙법 훈련을 한 거였구나.’
‘아예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준비한 거였어.’
‘하긴……. 우리 영주님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럴 리가 없지.’
생각해 보면 영주는 항상 그랬다.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했던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마수의 숲부터 페르디움 공방전까지, 그는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적뿐만 아니라 아군까지 속이며 차근차근 준비하는 스타일.
그 행동 방식이 상식을 벗어났기에 제대로 믿지 못했을 뿐, 결과를 보면 영주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잔뜩 긴장한 기사들을 보며 지셀이 말을 이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리 준비를 했어도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무척이나 위험하고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작전이니까.”
“…….”
그 말이 맞았다. 아무리 기사가 되었다고 한들 자신들은 싸울 수 있는 시간에 제한이 있는 반쪽짜리 기사다.
빠르게 적을 제압하지 못하고, 성문을 여는 데 실패한다면, 분명 적의 병력에 포위되어 전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여기 있는 기사들보다 작전을 계획한 지셀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팽배한 긴장감 속에서 지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우리는 적들보다 약하다. 앞으로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은 카발디 백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하다.”
데스몬드 백작은 북부의 최강자 중 하나다. 공작가는 단일 세력으로는 비교할 대상조차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 적들과 앞으로 싸워야 한다는 건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 전쟁은 적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끝내야 한다. 고작 이 정도의 적도 쉽게 제압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을 테니까. 묻겠다. 우리의 준비가 부족했는가?”
그 말에 기사들은 콧김을 내뿜으며 가슴을 폈다.
목숨까지 걸고 마나를 익혔다. 몸이 부서질 각오를 하고 훈련을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며,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성장해 왔다.
그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자부심과 자신감도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져 있었다.
기사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부족하지 않습니다!”
준비는 부족하지 않았다. 그저 앞에 선 적이 우습게 볼 만한 상대가 아니기에 조심스러워졌을 뿐이다.
“비록 굶었다 하나 카발디군의 무장 수준은 북부에서 최고로 꼽힌다. 우리는 그놈들 한가운데로 떨어질 참이지. 그게 두려운가?”
지셀의 은근한 도발에 기사들이 콧방귀를 뀌며 웃었다.
“우리는 데스몬드군도 한 번 이겼는데 말입니다.”
“마수의 숲에 있는 엄청난 괴물들도 잡았었죠.”
“그런데 그까짓 놈들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기사들의 눈빛에 점점 열기가 피어올랐다.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 두려움은 준비가 안 된 자들의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
적들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제는 그들을 상대로, 그간 쌓아 온 것을 터뜨려야 할 때다.
지셀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 번 치며 웃었다.
“나는 완벽한 승리를 원한다.”
이것은 전쟁의 여신을 모시는 용병들이 취하는 승리의 의식.
태반이 용병 출신인 기사들은 지셀과 똑같이 자신들의 가슴을 치며 웃었다.
용병 출신이 아닌 자들도 그 의미를 알기에 의식을 따라 했다.
어느새 기사들의 얼굴에서는 두려움과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지셀은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내가 가장 앞에 서겠다.”
마수의 숲에서도, 저번 전쟁에서도, 지셀은 언제나 그래 왔다.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모두를 이끄는 힘의 원천이자 믿음이다.
“지금까지처럼 온 힘을 다해 나를 따라와라.”
그러면 된다. 그리하면 다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기사들도 지셀과 닮은 표정을 지으며, 심장에 주먹을 가져다 대는 군례를 취했다.
조금 전에는 용병으로서 승리를 빌었다면, 이제는 기사로서 주군을 따라 목숨을 걸겠다는 맹세였다.
기사들을 잠시 둘러본 지셀은 잔인한 미소와 함께 몸을 돌렸다.
“가자, 우리의 힘을 보여 줄 시간이다.”
* * *
땅굴 작업을 하던 인원들도 밤을 틈타 본대에 합류했다.
전부 열기구에 타서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무리 열기구를 꽉꽉 채워도 400명이 모두 탈 수는 없었다.
고도와 방향을 빠르게 조절하려면 마법사들도 한 명씩 타야 하니, 마법사들의 수 이상으로 열기구를 늘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서로 자존심을 세우며 자신이 가겠다고 우겨 댔다. 결국 강제로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
“에잉, 내가 가고 싶었는데.”
“내가 더 센데 왜 빠지는 거야?”
“하, 갔다 온 놈들 잘난 척하는 꼴 보기 싫은데 말이야.”
100여 명의 기사가 선발됐고, 남은 기사들은 입맛을 다시며 병사들과 함께 진군했다.
위험도는 덜하지만, 이들의 역할이 가벼운 건 아니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진입해 아군을 구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제 적들의 시선을 끌다가 성문이 열리면 바로 돌격해 들어갈 것이다.
곧 수십 대의 열기구가 공중에 높이 떴다. 마법사들이 바람 마법을 이용해 카발디 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성으로 접근하는 내내, 열기구에 탄 자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일반적인 활 공격은 닿지 않겠지만, 실력 있는 기사나 마법사라면 충분히 요격이 가능한 높이였다.
하지만 카발디 성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열기구를 제때 발견하지 못했다.
어두운 밤이기도 했고, 눈앞에 다가오는 펜리스군에게 집중하느라 하늘 위를 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응? 저게 뭐지?”
외곽 쪽 망루에 있던 카발디군의 병사는, 열기구가 성벽을 넘었을 즈음에야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다.
그자의 신호로 성벽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과 지휘관들도 열기구를 보게 되었다.
“저, 저게 뭐지? 하늘에 뭐가 있어!”
“몬스터는 아닌 거 같은데?”
“왜 우리 성으로 들어오고 있지?”
사람들은 눈앞의 펜리스군도 잊은 채 넋 놓고 열기구만 바라보았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기이한 형상에 놀라 생각을 멈춰 버렸다.
보통 사람은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너무 강력한 탓에, 사람이 큰 바구니 안에 탈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멈춘 거 같은데?”
“어? 내려온다, 내려와. 저거 진짜 몬스터 아니야? 뚱뚱한데 밑에 뭘 달고 있잖아?”
다들 혼란에 빠져 웅성대기 시작하자 성벽 지휘관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무엇인지 확인은 해야 했다. 만약 몬스터라면 앞뒤로 적과 싸워야 하는 무척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펜리스군이 진격을 멈췄다. 아무래도 저쪽도 저걸 발견하고 조심스러워하는 거 같군. 정찰대를 보내 확인하고 와라.”
펜리스군은 화살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방패를 들고 진군을 멈춘 것이었지만, 지셀의 계획을 모르는 성벽 지휘관은 자기 멋대로 판단했다.
곧 소수의 정찰대가 꾸려져 조심스럽게 열기구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조심스러운 카발디군과 다르게 열기구에 타고 있던 기사들은 난리가 난 상태였다.
“야! 빨리 내려가야 해! 저기 횃불 안 보여? 적들이 확인하러 오고 있잖아!”
마법사들이 기사들을 재촉했다. 기사들이 빨리 내려야 자신들이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은 열기구를 띄우고 이동하느라 마력도 상당히 많이 소모한 상태였다.
이런 기습적인 난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니 기사들이 내리는 즉시 도망쳐야 했다.
공중에서 지원할 수도 없는데 괜히 미적거리다 요격당하면 아까운 마법사들이나 열기구만 잃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사들도 억울한 면이 조금 있었다.
“아씨! 조용히 해! 지금 너무 높잖아! 더 내려가자고!”
“뭐? 안 돼! 더 못 내려가!”
열기구의 고도를 너무 낮출 수는 없었다. 다시 띄우는 데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도망가기가 쉽지 않게 된다.
적절한 고도에서 기사들이 내려야 퇴각할 수 있으니, 마법사들도 양보하지 않았다.
“빨리 안 내려? 확 줄 끊어 버린다?”
“와, 이 새끼들 보소? 전쟁 끝나고 나서 두고 보자.”
기사들은 마법사들과 옥신각신하면서도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서로 으르렁거리긴 하지만 의외로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콧대 높은 마법사들이 용병 출신들과 이렇게 허물없이 지낼 리가 없었다. 서로 소 닭 보듯 하며 무시하기 일쑤였으니까.
지셀이 유도한 분위기에 휩쓸려 모두가 가식을 벗어던진 동네 친구 비슷한 사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기사들은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그간 훈련한 ‘한쪽 팔만 부서지고 살아남기 낙법’을 사용했다.
쿵! 쿠웅! 쿵!
“크윽! 안 부서졌어!”
“살았다! 좋았어! 역시 훈련한 보람이 있네!”
“아오, 싸우기도 전에 죽을 뻔했네.”
다들 바닥에 구르며 엄살을 부렸다.
그래도 그간 훈련을 하고 마나를 익힌 덕분에 크게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끄러운 와중에도 조용한 열기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카오르와 알포이가 탄 열기구였다.
두 사람은 ‘열기구 추락 사건’ 이후로 서로 말도 안 섞고 데면데면한 상태였다.
서로를 구하려고 했던 게 뭔가 창피해서 괜히 대하기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줄을 잡고 내려가던 카오르가 말했다.
“야, 괜히 까불다가 또 떨어지지 말고 잘 도망가라.”
알포이는 뒷짐을 지고 괜히 다른 곳을 보며 답했다.
“흥……. 잘 다녀오든가.”
“새끼, 부끄러워하기는.”
카오르는 한번 피식 웃고는 멋지게 열기구에서 뛰어내렸다.
철퍽!
“악, 싯팔! 아프잖아!”
카오르를 마지막으로 기사들을 전부 내려 준 열기구들이 하나둘씩 고도를 높여 갔다. 이제 마법사들에게 남은 임무는 빠르게 전장을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떠오르는 열기구 안에서, 한 마법사가 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야, 꼭 살아서 돌아와라. 그래야 내가 천박한 네놈들 버릇을 고쳐 주지.”
팔을 주무르던 기사도 픽 웃으며 답했다.
“너도 목 깨끗하게 닦고 기다려라. 편하게 보내 줄게.”
“크큭, 파이어볼 한 방이면 오줌 지릴 놈이.”
마법사가 낄낄 웃으며 공기 주머니를 마법으로 데웠다.
빠르게 작아지는 열기구를 보며 카발디군의 병사들이 주춤주춤 다가오고 있었다.
적진 한복판에 떨어진 펜리스의 기사들에게는 이제 도망갈 길이 없다.
남은 것은 성공이 아니면 죽음뿐이다.
가장 먼저 내려 전방을 감시하던 지셀이 뒤를 보며 말했다.
“도망가거나 못 내린 놈 없지? 이 정도에 다친 놈도 없을 테고.”
“없습니다!”
기사들이 욱신거리는 팔을 돌리며 웃었다.
곧 그들 사이에서 험악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셀이 검을 뽑으며 웃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전장의 향기였다.
“모두 피 토할 준비 됐나?”
“준비 다 됐습니다!”
차차창!
기사들도 지셀과 꼭 닮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들의 검은, 단 한 자루도 빠짐없이 푸른빛의 마나로 감싸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