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어때? 금방 구했잖아? (1)
루타니아 왕국 전역이 가뭄으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북부는 다른 지역보다 상황이 더 처참했다.
북부 최대의 곡창 지대를 끼고 앉은 레이폴드와 데스몬드가 식량 수출을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척박하고 가난한 지역이라 그 피해는 더 컸다. 중앙 귀족들도 이번에는 자기들 앞가림하느라 바빠서 지원을 바라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 영주들이 해결책을 찾아 고심하고 있을 때, 한 가지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펜리스 영지에 식량이 그렇게 많다더라.”
“이주민들 때문에 가격이 오를 정도로 식량을 쓸어 갔다는 말은 들었지.”
“그 정도면 분명 여유분이 남아 있을 거야. 그거라도 얻어 내야 해.”
북부의 모든 눈이 펜리스 영지로 향했다.
펜리스의 영주는 젊은 애송이고 군사력도 형편없는 곳이라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절로 흘렀다.
그곳만 차지하면 당장 이 힘든 시기를 넘길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펜리스 영지를 먹고 싶어도 영주들은 전쟁을 걸 수가 없었다.
“젠장! 그 애송이 놈의 뒤에는 브랜포드 후작이 있잖아!”
“운도 좋은 새끼! 화장품 때문에 그런 거물의 총애를 받다니!”
“도대체 친왕파는 그런 놈을 왜 받아들인 거야?”
브랜포드 후작과 친왕파가 지셀의 뒤에 있기 때문이었다. 펜리스를 친다는 건 그들도 적으로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위험을 감당할 만한 영주들은 북부에 없었다.
전쟁을 일으켰다가는 자멸할 게 뻔히 보이니 영주들은 대신 거래를 제안해 보기로 했다.
힘이 곧 정의인 듯 구는 영주들치고는 대응 방식이 드물게 평화적이었다.
그렇게 각지의 영주들과 수많은 단체에서 펜리스로 사신을 보냈다.
당연히 그들은 쉽게 식량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제 아비를 생각해서라도 우리를 극진히 대접할 수밖에 없을 거야. 가뭄이 끝나면 다시 우리한테 지원을 받아야 하니까.”
“그렇지, 북부는 언제나 끈끈한 의리로 맺어진 사이 아닌가! 솔직히 그간 페르디움은 우리 덕분에 먹고 살았지.”
“양심이 있으면 우리한테 절을 해도 모자라고말고! 에헴!”
페르디움을 지원하는 것은 야만인들에게서 지켜 주는 데 대한 당연한 대가인데도, 영주들은 마치 자신들이 너그럽게 도와준 것처럼 생색을 내고 있었다.
그것도 겨우 숨만 쉴 수 있을 정도로 쥐꼬리만큼만 지원했으면서 말이다.
심지어 저번 전쟁에서는 도와 달라는 페르디움의 요청을 모른 척하기까지 했지만, 그런 것은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오만한 판단은 펜리스에 도착하자마자 박살 나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사신들을 맞이하며 먼저 양해를 구했다.
“안타깝지만 손님이 너무 많이 오셔서 묵을 곳이 없습니다.”
“숙소가…… 없다고요?”
“네. 대신 아주 크고 멋지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천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라도 묵으시겠습니까?”
클로드의 말에 사신들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어찌 사신을 이렇게 대접하시오! 나는 영주님에게 모든 권한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오!”
“이건 법도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무례란 말이오! 본 영지를 무시하는 것이오?”
격렬한 항의에도 클로드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귀만 팠다. 진짜 묵을 곳이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작은 성이 미어터질 정도로 사신단이 몰려오는데 숙소가 남아날 리가 없었다.
클로드도 처음에는 허름한 사용인들의 숙소라도 내주려 했지만, 지셀이 반대했다.
― 속이 시커먼 외부인들 때문에 우리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는 없지. 정 들일 자리가 없으면 밖에 천막이라도 쳐 줘라.
영주가 그렇게 말하는데 자신이 뭘 어쩌겠는가. 그런데 계속 항의를 받으니 이제는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아, 저도 이러고 싶진 않지만 정말 자리가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지금 손님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서 어쩔 수가 없다니까요? 무슨 유명 맛집도 아니고, 왜 이렇게 많이 왔대? 아휴, 진짜 귀찮아 죽겠네.”
총관이라는 놈이 이렇게 배 째라는 식으로 구니, 사신들도 달리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끄으응…… 일단 그렇게 합시다.”
조금 늦게 도착한 사신들은 정말로 천막을 치고 밖에서 지내야 했다.
크기만 크고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천막에서 지내자니 감탄은커녕 매일같이 욕만 나왔다.
불편한 잠자리 탓에 몸이 뻐근한데 지셀은 이들을 바로 만나 주지도 않고 기다리게만 했다.상상도 못 했던 대우에 그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애송이 주제에 식량 좀 쌓아 뒀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귀족의 예의도 모르는 망나니 놈 같으니라고! 얼마나 더 오만방자하게 나오나 보자!”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돌아가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당장 펜리스 영지가 아니면 식량을 구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쪽이 이 악물고 참는 수밖에.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사람이 모일 만큼 모였다 생각될 즈음 지셀은 이들을 동시에 한자리로 불렀다.
대전이 좁아 사신들은 수행원도 떼어 두고 책임자 몇 명만 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전은 시장통처럼 북적거렸다.
사신들은 미칠 듯이 불쾌했지만, 최대한 감정을 숨겼다.
지셀은 그들을 슥 둘러보고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
장사치와 같은 지셀의 말에 사신들은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본래 그들이 세운 계획에 따르면, 적당히 설득과 협박을 곁들여 애송이에게서 어떻게든 식량을 잔뜩 뜯어내야 했는데.
‘아니,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협상을 한단 말인가?’
‘젠장! 얼마를 불러야 하지? 다른 놈들도 지금 식량을 잔뜩 노리고 있을 텐데?’
‘미치겠군. 가격 경쟁을 해야 할 판이야.’
무릇 영지 간의 거래는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법이다. 그래야 다른 영지와 거래할 때도 ‘저기는 이 조건에 해 줬잖아요’ 하는 뒷말이 나오지 않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여러 영지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아 두면 협상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제일 값을 높이 부르는 놈이 우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분위기가 경매로 넘어가기 전에 사신 중 몇몇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험한 북부에서 지금까지 주둥이로 먹고산 자들다운대응이었다.
“크흠, 짐바르 영지에서 왔습니다. 저희는 정식으로 펜리스 영지에 식량 지원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요청?”
“그렇습니다. 저희는 오랜 시간 동안 페르디움에 많은 지원을 해 왔습니다. 그 덕에 남작님께서도 이리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실 수는 없으실 겁니다. 지금은 저희의 사정이 어려워진바, 그간 저희가 보여 드린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사신은 구구절절 자신들이 얼마나 페르디움을 위해 힘을 써 왔는지 말을 이었다.말이야 길고 길었지만 요약하자면 ‘우리 덕에 그간 먹고 살았으니 이제는 좀 내놔라’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신들도 그에 맞춰 지셀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북부는 언제나 고통을 같이 나눠서 지고 살았습니다. 페르디움도 저희와 함께했기에 그간의 어려움을 버틸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는 남작님이 베푸셔야 할 때입니다.”
사신들은 앞다투어 ‘아무튼 네가 책임져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식량을 구하러 온 자들의 발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건방진 태도였다.
오랫동안 페르디움을 상대할 때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버릇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입장이 조금 바뀌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다시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가난한 페르디움은 자신들에게 지원을 받아야 먹고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하면 지셀이 모질게 나오지 못할 거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 판단은 지셀이 서늘하게 웃으며 내뱉은 말로 완전히 박살 났다.
“그건 우리 아버지한테 가서 말해야지, 왜 나한테 대가를 달라고 해? 내가 지원을 받는 것도 아닌데.”
지셀의 말에 잠깐 당황하던 사신들은 다시 강하게 나갔다.
“남작님이 그곳의 후계자이지 않습니까? 미래에는 어차피 저희 쪽에서 지원을 받아야 하실 텐데요.”
“그렇습니다. 가뭄은 잠깐이지만 차후에는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간 맺어온 동맹의 의리를 모른 척하지 마시지요. 우리는 유서 깊은 동맹 사이 아닙니까.”
“지원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정말로 지원이 끊기면 남작님뿐만 아니라 페르디움 백작님도 곤란해질 겁니다.”
사신들은 스스로 한 말에 설득되어 다시 자신감을 찾았다.
그래, 이 애송이가 지금 식량을 갖고 우위에 서려 해도 그건 잠깐일 뿐이다.
가뭄이 해결되면 그다음은? 자신들의 지원이 없이 감히 북방을 혼자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고작 그 정도 생산력과 병력으로?
어림도 없는 소리. 그게 가능했다면 페르디움이 그렇게 힘들게 살 리가 없다.
자신만만한 사신들의 얼굴을 노려보며 지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동맹이니, 의리니 강조하시는 분들이 전쟁 때는 우리를 모른 척하셨다?”
“…….”
그 말에 사신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페르디움 따위야 누가 차지하든지 상관없었다. 그런 전쟁에 끼어들어 병력과 자원을 소모할 멍청이는 없었다.
원래 정치란 게 그런 거다. 이 애송이가 아직 어려서 그런 걸 모르고 과거의 일로 꽁해 있는 것이다.
사신들이 반박하려고 할 때 지셀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2만 골드.”
“네? 2만 골드라니요? 혹시 식량값입니까?”
“아니, 식량과 상관없이 페르디움의 지원 영지들은앞으로 매년 2만 골드씩 나한테 방위비를 내도록. 내지 않거나 납부가 밀리는 영지에는 야만인들이 들어갈 수 있게 길을 뚫어 유도하겠다.”
페르디움 백작이 그런 걸 허락할 리가 없지만, 다른 영지 사람들은 백작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러니 지셀의 선언에 다들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무, 무슨 소리를!”
2만 골드라는 방위비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길을 뚫겠다고 협박을 하다니! 완전히 미친놈이었다.
‘아니 애초에, 방위비를 받아도 페르디움에서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자기가 받겠다고 해? 너 뭐 돼?’
사신들은 당혹감과 굴욕감이 섞인 표정으로 즉시 반발했다.
“불가합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페르디움 백작은 변경을 지켜야 하는 변경백입니다. 그게 의무란 말입니다!”
“그건 왕국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혜택을 받는 거 아닙니까!”
사신들의 거센 항의에도 지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혜택은 쥐뿔, 다들 우리 위험할 때 모른 척했잖아.”
“그러니까 그때는 다 사정이…….”
“한낱 용병도 한 일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앞으로는 희생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받을 생각이니 따지지 말도록. 그간 허접한 지원 가지고 우리 영지 휘두르는 거 아주 지겨웠거든.”
“그 무슨 무례한 소리를……!”
“그만, 더 이상 떠들면 식량 거래도 하지 않고 쫓아내겠다. 말 길게 하기 귀찮다. 아, 내가 진짜 착해졌다니까. 이렇게 말이 많아도 다 상대해 주고.”
“이, 이익!”
쫓아낸다는 협박에 사신들은 일단 입을 닫았다. 당장은 식량을 얻어 내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올라 참을 수 없었다. 몇몇 이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이를 갈았다.
‘두고 보자, 이번 가뭄만 해결되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애송이 놈이 친왕파를 믿고 너무 까부는구나. 방위비? 우리가 그까짓 걸 낼 거 같으냐?’
‘우리가 힘을 합치면 네놈 따위 천천히 말려 죽이는 건 일도 아니다.’
펜리스가 얼마나 빨리 발전하고 있는지 모르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군사력도 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영지에서, 그저 이주민 때문에 식량을 쌓아 둔 게 운 좋게 터졌을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사신들은 그들이 당하는 꼴을 보고 침묵을 지켰다.
그나마 페르디움 핑계를 댈 수 있는 자들도 저리 당하는데, 아무 관계도 없는 자신들은 나서 봐야 엄한 꼴만 보게 될 것이다.
조용해진 대전을 둘러보며 지셀은 히죽 웃었다.
“자, 그러면 이제 거래를 시작해 볼까?”
눈치를 보던 사신 한 명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잽싸게 손을 올렸다.
“밀 한 자루에 10실버를 드리겠습니다!”
기근 전 밀 한 자루가 평균 3실버였다. 수확기를 거치면 1실버까지 떨어진다.
10실버면 몇 배나 높게 부른 것이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끼어들며 외쳤다.
“우리는 11실버를 내겠습니다!”
“우리는 12실버!”
“13실버를 내겠습니다!”
다들 마음이 급해 앞다투어 가격을 올리기 시작했다.
펜리스 영지에서 식량을 쌓아 놨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여유분이 정확히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혹시 다른 쪽에서 먼저 사가면 자신들이 살 분량이 없을까 봐 너도나도 목소리를 높였다.
시장통처럼 시끌벅적해진 대전 한가운데에서, 누군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1골드.”
“……!”
어마어마한 가격에 다들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로브를 입은 한 중년 남자가 거만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를 바라본 지셀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