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새로운 훈련을 시작한다. (2)
훈련장으로 이동하며 기사들은 입을 삐죽댔다.
영주님은 뭐가 항상 저렇게 바쁠까?
우리는 조금 천천히 해도 되는데.
“끄으응,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아이고, 너무 아프다!”
몇몇 기사들이 엄살을 부렸지만, 지셀은 못 들은 척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어차피 길리언이 뒤에서 험악하게 인상을 쓰며 기사들을 떠밀고 있었으니까.
훈련장에 도착한 기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 키만 한 단이 수십 개쯤 세워져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훈련을 위한 기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사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듯, 지셀이 중앙에 있는 단에 올라가 말했다.
“이제부터 낙법 훈련을 실시하겠다.”
그러자 기사들은 더욱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낙법 정도는 다들 한두 가지는 익히고 있었다. 마나 연공법만 몰랐을 뿐, 내내 싸움질만 하던 용병들이니 당연한 일이다.
기사들은 피식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낙법 할 줄 압니다!”
“에이, 우리 너무 무시하신다.”
“우리도 기본적인 건 다 할 줄 안다고요.”
그러자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가르쳐 주는 건 무조건 익히고 있어야 해. 잔말 말고 따라 하도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셀은 단에서 직접 뛰어내리며 시범을 보여 줬다.
한쪽 팔과 어깨로만 착지해, 바로 몸을 굴려 충격을 흘리는 측방 낙법의 일종이었다.
그걸 본 기사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에이, 이제 우리도 마나 쓸 수 있는 기사인데 멋없게 그게 뭡니까?”
“맞습니다. 그거 너무 허접해 보입니다. 쓸 일도 없을 거 같은데요?”
“기사가 품위 없이 땅을 막 데굴데굴 구르는 거……. 그건 좀 구린 듯?”
“다른 걸로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측방 낙법도 좀 멋진 거 많지 않습니까.”
기사가 된 뒤로 속에 헛바람이 든 자들이 입을 모아 떠들었다.
누구나 바라던 마나까지 익혔으니 이제 겉멋 좀 부리면서 살고 싶은데, 하필이면 저렇게 보기 흉한 기술을 알려 주다니.
모양새가 웃겨 보이기도 했지만, 저런 허접한 기술을 쓸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어물쩍 반발하는 기사들에게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진짜로 살아남는 데 필요한 기술은 별로 예뻐 보이지 않는다. 효율이 우선이거든. 다들 한 번씩 해 봐라.”
동작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기에 기사들은 쉽게 따라 했다.
단이 겨우 사람 키 정도 되는 높이였기에 위험할 일도 없었다. 그들은 그냥 기초 훈련인 줄 알고 편하게 훈련에 임했다.
지셀은 주위를 돌아다니며 기사들의 자세를 확인하다, 자세가 틀린 자를 발견하면 직접 교정해 주었다.
원래 몸을 쓰던 자들이고 다른 낙법도 알고 있었던 덕분에 새로운 방식에도 금세 익숙해졌다.
“흠, 좋군. 다들 빠르게 익혔어.”
지셀의 말에 기사들은 크게 웃었다. 이런 건 정말 초보들이나 할 만한 훈련이었다.
“영주님, 이건 훈련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루도 안 걸리는 훈련이 어디 있습니까?”
“아, 우리 영주님 심심하셨나 보다.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오랜만에 한잔할까요?”
대부분 용병이었다 보니, 기사가 된 뒤에도 건들거리는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길리언이 인상을 쓰며 나서려 하자 지셀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됐다. 노는 건 나중에 하도록 하지. 조금 더 익숙해지도록 연습해라. 앞으로 자주 써야 할 테니까.”
기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런 걸 뭐 자주 씁니까? 낙법이라기에는 팔에 오는 충격이 조금 큰데요. 다른 자세는 안 알려 주시나요?”
낙법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싸울 때 어떤 방향, 어떤 자세로 넘어지거나 떨어질지는 순전히 운에 따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지셀이 알려 준 낙법은 효과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내가 알려 주는 건 이거 하나다. 나머지는 너희들이 쓰고 싶은 걸 써라.”
왜 이런 안 좋은 낙법을 가르치는지, 왜 다른 낙법은 가르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사들은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회복 중이니 심한 훈련은 안 시키는 모양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금세 익숙해진 기사들은 단 위에서 대충 떨어지며 옆으로 굴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셀은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에게 말했다.
“단을 조금 더 높여라.”
미리 준비시켜 두었던 듯, 나무로 만든 낮은 단이 원래의 단 위에 올라갔다.
높이가 조금 더 높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기사들은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오히려 높이가 높아지니 더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마음을 아는 듯, 지셀이 다시 말했다.
“다시 단을 조금 더 높여라.”
확실히 아까보다 더 재미있어졌다. 그간 쉬느라 심심했던 기사들은 즐겁게 훈련에 임했다.
그런데 잠시 뒤에도 같은 말이 이어졌다.
“조금만 더 높여 봐.”
“한 번 더 올려.”
“옳지, 조금만 더.”
“그냥 확 더 높여라.”
어느 순간부터는 마나를 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높이가 높아졌다.
높다랗게 쌓인 단들을 보며 기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에는 단을 잡고 올라가고, 중간에는 짧은 사다리를 이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긴 사다리를 사용해야 올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마나가 없는 보통 사람이라면 떨어지는 순간 팔다리가 박살 날 것이다.
“…….”
기사들의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휘몰아쳤다.
도대체 왜 저렇게 높은 곳에서 떨어져야 하는 걸까? 저런 높이에서 떨어지는데 낙법이란 게 의미가 있는 걸까?
다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지셀이 재촉하듯 말했다.
“뭐 해? 계속 훈련해야지. 왜 구경만 하고 있어?”
기사 중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영주님, 아무래도 낙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높이가 아닌 거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다들 이제 마나 쓸 수 있잖아. 이 정도는 아직 안전해.”
“마나로 몸을 보호하는 게 전제라면 낙법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야 버틸 수 있으니까. 떨어지는 순간 지면에 닿는 쪽 팔과 어깨에 모든 마나를 집중시켜라. 마나로 특정 부위를 강화하는 것도 겸사겸사 연습하는 거야.”
눈치 빠른 기사 하나가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 그러면 다른 낙법이 필요 없다는 이유가…….”
지셀은 기특하다는 듯 기사를 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높이에서 떨어지면 다른 방식은 의미가 없지. 하지만 내가 알려 준 낙법을 쓰면 딱 한쪽 팔만 박살 나고 일어나서 검을 들고 싸울 수 있다.”
언제나 억울하면 못 참는 고든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아니, 이런 훈련이 왜 필요한데요! 거인하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대결에서 쓰려고 하는 게 아닌데?”
“그럼 뭔데요?”
“성벽에서 뛰어내리거나 떨어질 때를 대비해서 하는 훈련이지.”
“…….”
성벽은 위에서 지키라고 올라가는 거지, 뛰어내리라고 올라가는 게 아니다.
낙법이고 나발이고, 성벽에서 뛰어내리면 높은 확률로 적에게 포위되어 죽게 된다.
아무래도 영주가 예전 전쟁에서 몇 번 뛰어내리더니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거……. 꼭 해야 합니까? 높은 곳에서 떨어질 일이 있습니까?”
다른 기사의 물음에 지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거지. 그런 일에 대비해서 훈련을 하는 거다. 조금이라도 생존 확률을 높이고 싶으면 미리 연습하는 게 좋아.”
“끄응…….”
기사들은 지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하나둘 단에 오르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낯빛은 하나같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이제는 처음처럼 여유 있게 웃으며 훈련할 수가 없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팔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박살이 날 수도 있었다.
곳곳에서 떨어지는 기사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으아아아! 안아 줘요!”
“너무 아프잖아!”
“우리는 초급 기사라고요!”
아무리 마나를 쓸 수 있어도, 초급 기사인 이들이 버틸 수 있는 높이에는 한계가 있었다.
거기다 그들이 익힌 연공법의 특성상 마나를 전부 쓰면 피를 토하게 되니, 마나를 아껴서 땅에 부딪히기 직전에만 순간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마나 운용 능력도 빠르게 늘고 있었지만, 반대로 몸과 정신은 다시 피폐해져 갔다.
“으으, 내 팔이 보라색으로 변하고 있어.”
“이게 진짜 효과 있는 거 맞아? 그냥 우리를 다 성벽에서 밀어 버릴 계획인 게 아닐까?”
기사들은 곡소리를 내며 훈련을 이어 갔다. 다들 한쪽 팔이 피멍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자칫 낙법에 실수한 이들은 몸 전체가 시퍼렇기도 했다.
그나마 실전이 아니기에 지셀이 어느 정도 높이를 조절해서 피멍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간 구른 기사들은 마침내 ‘한쪽 팔만 부서지고 살아남기’ 낙법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훈련을 진행한다. 조금 더 실전에 가깝게 말이지.”
“예?”
지셀이 기사들을 끌고 간 곳에는 정말 높은 단이 세워져 있었다.
그 높이는 단은 일반적인 성벽 수준이 아니라, 왕도 카르데니아의 성벽 정도로 아주 높았다.
기사들은 단을 올려다보고 확신했다.
초급 기사 수준인 자신들은 여기서 떨어지면 무조건 죽는다고.
당연히 극렬한 반응들이 튀어나왔다.
“영주님! 여기서 떨어지면 낙법이고 뭐고 못 버팁니다!”
“우리 그냥 다 죽는 겁니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시는 건데요!”
지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저기서 어떻게 그냥 뛰어내려? 나 그렇게 무모한 사람 아니야. 줄을 내려 줄 테니 그걸 타고 빠르게 내려가는 연습을 하는 거다.”
“아하, 그렇구나.”
기사들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줄을 타고 성벽을 오르내리는 것은 흔하면서도 중요한 훈련이었으니 지셀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셀은 단의 최상층에 길게 뻗은 발판을 놓고 능숙하게 긴 줄을 묶어 아래로 늘어트렸다.
“자, 한 명씩 타고 내려가라.”
펜리스 성벽에서도 몇 번 해 본 것이기에 기사들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훈련은 아니었다.
차이점이라면 허공에 줄 하나만 믿고 매달린 터라 발을 디딜 곳이 없고, 너무 높아서 조금 무섭다는 것 정도?
첫 번째로 호명된 기사가 줄을 잡고 빠르게 내려갔다.
익숙해서 쉽게 내려가는 게 아니라, 무서운 걸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려는 의도였다.
열심히 내려가던 기사는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식은땀을 흘렸다.
‘줄이…… 짧다? 왜 짧지? 이런 건 짧으면 안 되는 거잖아?’
아직 땅에 닿으려면 한참 남았는데 줄이 좀 짧았다.
기사는 잽싸게 다시 올라가며 외쳤다.
“영주님! 줄이 짧아요! 뭔가 문제가 있는 거 같습니다!”
위쪽에서 지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문제없어. 그게 맞아. 줄 끝까지 내려가면 배운 대로 뛰어내려.”
사자는 자기 새끼를 강하게 키우려고 절벽에서 굴린다고 한다. 하지만 기사는 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싫어요! 여기서 어떻게 뛰어내려요! 이런 훈련은 도대체 왜 하는 겁니까!”
“다 필요하니까 하는 거다. 어? 이놈 봐라? 올라와? 안 뛰어내리고 올라와?”
지셀은 잽싸게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간 좀 배웠다고 기사가 너무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릭!
지셀이 검을 휘두르자 줄이 끊어지고, 줄을 타고 올라오던 기사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진짜 좆같아!”
입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기사는 순식간에 낙법 자세를 잡았다. 그간의 지옥 훈련 덕분이었다.
위기 상황에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거……. 솔직히 훈련은 짜증 나지만 효과는 정말 확실했다.
기사는 배운 대로 온 힘을 다해 마나를 팔에 집중했다.
안 그러면 진짜 죽는다. 목숨을 건 위기에 부딪히자 작은 깨달음마저 얻어 버렸다.
화아악!
기사는 고도로 정신을 집중해 시간이 느려지는 현상까지 체험했다.
콰아아아앙!
“크어억!”
기사는 지면과 충돌하자마자 몸을 데굴데굴 굴리며 최대한 충격을 해소했다.
과연 살아남으려면 겉멋 따위는 필요 없었다. 분하지만 지셀이 한 말이 맞았다.
고통이 어마어마했지만 팔이 부러지지는 않았다. 정말로 그간의 훈련이 도움이 된 것이다.
“사, 살았다! 살았다고! 으하하하! 쿨럭!”
기쁜 웃음을 터트리던 기사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팔이 부서지지 않았다고 해도, 땅에 부딪힌 충격이 없는 건 아니다.
충격을 완전히 흘리려면 더 많은 마나와 섬세한 기술이 필요하지만, 초급 기사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셀은 뒤에 대기하고 있는 기사들을 돌아보며 웃었다.
“봤지? 다 되잖아? 다음.”
기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새로 맨 줄을 잡고 내려갔다.
이런 비정상적인 영지의 기사 따위는……. 정말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기사들은 다시 피를 토하는 훈련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