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74화 (174/269)

174화 얼마 남지 않았다. (1)

덜컹!

단 위에 올려져 있던 철괴가 반토막이 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와아아!”

“베었다! 정말 고든이 철괴를 베었어!”

결과를 본 사람들의 환호성이 시연장에 울려 퍼졌다.

고든의 실력이 부족한 탓에 철괴의 단면은 억지로 톱질을 한 듯 거칠었지만, 어쨌든 그가 철을 벤 건 틀림없었다.

클로드는 입만 벌린 채 얼이 빠져버렸다.

‘정말 검으로 철괴를 잘랐어? 이 짧은 시간에 마나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혹시나 무기의 중량을 이용한 부정행위라도 있을까 봐 무기도 클로드가 직접 준비했다.

그가 준비한 일반적인 롱 소드로 저 두꺼운 철괴를 베었다는 건 고든이 정말 마나를 사용했다는 증거였다.

그의 머릿속에 새로운 희망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 출정을 반대했지만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초급 기사 수준이라 해도 그 수가 수백 명이면 엄청난 전력이다!’

이번에 지셀이 가르친 기사들의 숫자는 무려 사백 명.

델파인 공작가를 제외한다면 어느 영지도 이렇게 많은 기사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비록 다른 곳보다 질은 떨어질지언정, 숫자로는 절대 뒤지지 않다는 뜻이다.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야 해. 저렇게 많은 기사라니! 할 수 있다!’

클로드가 흥분으로 발개진 얼굴을 들어 지셀에게 뭐라 말하려는 순간.

“우에에에엑!”

고든이 피를 토하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피거품을 물고 부들부들 떠는 고든을 사용인들이 잽싸게 들것에 실어 날랐다.

“…….”

분위기가 단번에 싸늘해졌다. 환호하던 가신들도 입을 다물었고 클로드의 가슴도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어색해진 침묵을 깨고 지셀의 목소리가 울렸다.

“왜? 뭐가 문제야? 피 토하고 쓰러진 사람 처음 봐?”

“…….”

다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문제인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가신들은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궤변가를 상대할 때는 이쪽도 똑같이 궤변의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낫다.

클로드는 전문가답게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저건 기사가 아니잖습니까! 기사가 아니라 사기라고 하는 게 더 잘 어울리겠네요. 아니, 100% 사기입니다.”

“뭐가 사기인데?”

“저런 상태로 무슨 전쟁입니까! 칼 한번 휘두르고 쓰러지는데!”

“어쨌든 마나 썼잖아? 마나 쓰면 출정하기로 약속했잖아? 다른 건 조건에 없었는데?”

지셀의 뻔뻔한 대답에 클로드는 할 말을 잃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기 조건은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지 ‘마나를 쓰고 나서 쓰러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사기를 당했다는 억울함은 지워지지 않았다.

답답해서 발만 동동 구르던 클로드는 옆에 있는 웬디에게 물었다.

“야, 네가 좀 말해 봐. 저게 정상이야? 응? 정상이냐고!”

“……아니, 갑자기 저한테 그러시면.”

언제나 차분하고 무표정하던 웬디도 클로드의 물귀신 작전에 당황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상황이 안 좋은 건 알겠지만, 왜 자기를 끌어들인단 말인가?

하지만 클로드는 필사적이었다.

“말 좀 해 보라니까! 솔직히 너 저기 있는 애들 혼자서 다 이길 수 있지? 그렇지? 솔직히 말해 봐.”

“아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전쟁이 장난이야? 이러다가 쟤네 다 전쟁에 끌려가서 죽게 생겼다고! 사람 살린다 치고 말을 좀 해 봐! 저렇게 이상한 놈들이라도 살아갈 자격은 있다고!”

클로드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으로 싸울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결국 웬디는 한숨을 쉰 뒤 조그맣게 말했다.

“저 혼자……. 다 이길 거 같긴 합니다.”

그녀의 말에 가신들은 탄식을 토해 냈다.

병실에 누워 있는 자들은 시연장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곳에 있는 기사들은 무려 이백여 명이었다.

그 많은 수를 웬디 혼자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약하다면 기사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발언에 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총관의 호위라 해도, 일개 하녀에 불과한 자가 기사들을 무시하다니!

폼 잡기 좋아하는 루카스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너! 감히 우리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당장 나와서 결투를……. 쿨럭! 크윽, 분하다!”

루카스는 말을 하다 말고 피 기침을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요새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조금만 흥분해도 머리에 피가 몰려 코피가 쏟아졌다.

옆에 있던 기사들이 루카스를 부축하며 한마디씩 건넸다.

“흥분하지 마, 혈압 올라. 숨 크게 쉬어.”

“야, 그냥 네가 참아. 너 쟤 못 이겨.”

“맞아, 쟤 엄청 세. 덤비면 너 그냥 죽어.”

기사들의 한심한 모습을 본 클로드는 울상을 지으며 지셀에게 말했다.

“쟤네 말고 다른 병력은 더 없어요?”

“없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전에 회의할 때 부족한 병력은 알아서 채우신다고 하셨잖아요!”

“아,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거야. 병력도 때가 되면 채울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클로드는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펜리스 영지에서 구할 수 있는 병력이라고 해 봐야 뻔했다. 브랜포드 후작에게 부탁하든가, 페르디움의 병력을 빌려 오든가.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공작파의 귀족을 치겠다는데 브랜포드 후작이 병력을 빌려줄 리가 없다.

북방을 막아야 하는 페르디움이 빌려줄 수 있는 병력도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력을 구해 온다는 건 반대 의견을 무마하려고 내뱉은 거짓말 같았다. 저 엉터리 반쪽짜리 기사들로만 전쟁을 할 생각이 분명했다.

“저런 얘들 데리고 전쟁을 하겠다고요? 저게 기사예요? 저런 기사를 어디에 써먹습니까?”

하지만 지셀은 티끌만큼도 걱정하지 않는 듯했다.

“괜찮아. 지금은 마나 연공법을 빨리 익히려고 무리하게 수련을 해서 그래. 당분간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회복할 거다.”

북방 요새에 있는 기사들과 다르게 이들은 쉴 틈도 없이 마나를 쌓는 족족 뽑아내었다.

마나를 써 본 적이 없다 보니, 마나를 사용하는 감각 자체에 익숙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무리를 해서 몸이 망가졌을 뿐, 휴식만 충분히 취하면 금세 회복될 터였다.

물론 너무 오래 쉬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어차피 수명을 늘리려면 다들 알아서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완성한 무한 굴레 수련법의 자세한 원리를 모르는 클로드와 가신들은 계속 반대했지만, 지셀은 완고했다.

“그만. 약속대로 기사들이 마나를 사용했으니 출정 계획은 확정되었다. 더 이상의 반론은 받지 않겠다. 반박 시 너희들 말이 틀리니 출정 준비나 제대로 끝마쳐 놓도록.”

내기 결과 클로드와 알포이의 노예 생활 기간이 10년 늘어난 건 덤이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지셀을 설득하는 것과 자신의 인생을 동시에 포기한 클로드가 물었다.

“바로 출정하실 생각입니까?”

“아니, 드워프한테 만들게 한 물건들이 제대로 완성되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기사들도 전술 훈련을 더 해야 하거든. 그리고 아직 적당한 시기가 오지 않았어.”

“무슨 시기요?”

“싸우기 좋은 시기. 그런 게 있어.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온다.”

“……알겠습니다.”

클로드는 막상 출정하기로 결정되자 살짝 빼는 지셀의 모습에 희망을 품었다.

바로 내일이라도 카발디 백작령에 쳐들어갈 것처럼 급하게 굴더니, 막상 싸우게 되니까 겁이 나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고민하다가 출정을 취소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다.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클로드를 보며 지셀이 물었다.

“그나저나 식량 수매는 계속하고 있지?”

클로드는 마침 잘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지셀에게 하소연했다.

“저기, 영주님. 이제 사들이는 건 그만하시는 게 어떨까요? 페르디움에 나눠 주고서도 넘치도록 쌓여 있습니다. 게다가 저 괴물 밀도 곧 수확기에 들어서고요. 이번에도 수확량이 엄청날 겁니다.”

식량이야 많아서 나쁠 건 없다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식량이 소모량 이상으로 늘어나다 보니 보관하기도 곤란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북부 사람들이 아예 굶을 정도로 싹싹 긁어 와. 웃돈을 주고서라도 최대한으로 구매해. 알았지?”

“도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지금 쌓인 것만으로도 펜리스와 페르디움 두 영지에서 10년은 넘게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먹어 치우기 전에 썩어서 버릴 수준이에요!”

지셀은 기이할 정도로 식량 저장에 집착했다.

몇 번이나 가신들이 팔아서 돈을 마련하자고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분명 식량을 잔뜩 팔면 큰돈이 들어올 텐데도, 굳이 다른 돈줄까지 마련해 가며 식량을 끌어모았다.

가신들로서는 그 이유를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정말 굶어 죽은 유령이라도 달라붙은 건가?’

답답해하는 클로드에게 지셀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내가 다 계획이 있어서 그래. 어차피 내가 뭘 말해도 안 믿을 거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 그러니까 그냥 계속 사.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무조건 풀 매수야.”

“에휴, 알겠습니다.”

클로드는 논쟁하기도 포기했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최악의 경우 자신이 나서서 수성을 지휘하면 된다. 공성은 몰라도, 수성에 필요한 병력 정도는 페르디움에서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클로드는 혹여나 영주가 전쟁에서 죽고 페르디움이 망할 경우를 대비해서 도망갈 루트까지 빈틈없이 다 짜 놓은 상태였다.

그나마 유일하게 믿었던 클로드마저 설득에 실패하자 가신들은 우울한 얼굴로 한숨만 내쉬었다.

그들을 보며 지셀이 빙그레 웃었다.

‘좋아, 다들 아주 잘하고 있어.’

제삼자가 보면 불가능한 일을 해내라는, 무리한 명령만 내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지의 가신들, 마법사들, 드워프들, 영지민들, 기사들과 병사들까지, 다들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며 반대란 반대는 다 하면서도 막상 시키는 일은 잘들 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엉망진창처럼 보이지만 내실은 놀라울 정도로 잘 쌓이고 있었다.

그만큼 이들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증거였다.

지셀 혼자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구상들이 이들 덕분에 실현되어 가고 있었다.

‘고마운 일이지. 그렇지만 조금 더 바쁘게 움직여 보자고.’

지셀이 기다리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한다.

* * *

기사들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 휴식에 들어갔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영지를 개발하고, 전쟁 물자들을 끌어모으느라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들 쉴 새 없이 일하는 중에 기쁜 소식이 추가로 들려왔다.

“영주! 영주! 성공했소! 드디어 성공했다는 말이오!”

갈바릭과 드워프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지셀을 찾아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지셀이 흠칫 놀라 물었다.

“누구……세요?”

“나요! 나! 갈바릭! 일은 잔뜩 시켜 놓고 누군지도 못 알아본다니!”

가장 앞에 선 자가 성질을 부리며 외쳤다.

험한 일정을 보내느라 고생한 탓일까?

갈바릭과 드워프들의 얼굴은 누군지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비쩍 마르고 눈은 퀭한데 키까지 작으니 마치 수염 난 고블린 같았다.

지셀은 당황하며 웃었다.

“아하하, 갈바릭이었구나. 어휴, 며칠 사이에 확 삭아 버려서 못 알아봤지 뭐야? 드워프는 수명이 길다고 들었는데 그거 다 거짓말이었나 봐.”

능청을 떠는 지셀을 노려보며 갈바릭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젠장! 잠도 못 자고 일을 하고 있으니 당연하지 않소! 이러다가 다 죽게 생겼다고!”

돌격대에 들어가기 싫어 매일같이 이를 갈며 일을 하긴 했지만 진짜 도망가고 싶었다.

실제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 온 드워프들도 있었는데, 놀랍게도 가장 추노에 적극적이었던 건 알포이였다.

다른 노예만 도망가는 건 못 봐주는 고약한 심성 때문이다.

“특히 그 알포이란 놈은 사람 새끼도 아니야! 그런 놈이 제일 나쁜 새끼야! 영주 앞잡이 같으니라고!”

지셀은 그런 갈바릭의 분노를 한 귀로 흘리며 되물었다.

“그래, 그나저나 뭘 성공했다고?”

그러자 갈바릭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환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드디어 그 열기구란 것을 완성했소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