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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64화 (164/269)

164화 체질 개선에 들어간다. (3)

지셀은 카오르에게만 비전을 내준 게 아니었다. 길리언도 따로 불러 여러 권의 책을 건네주었다.

카오르가 봤다면 왜 자기보다 더 많이 줬냐고 난리를 쳤을 것이다.

“이건 무엇입니까?”

길리언의 물음에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길리언에게 맞게 개량한 마나 연공법하고, 내가 아는 무기술에 관해 정리한 책이야.”

“영주님…….”

길리언은 감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셀은 종종 자신과 카오르에게 각자 익히고 있는 마나 연공법에 관해 묻고는 했었다.

영주가 가진 마나 연공법이 더 뛰어난 걸 알고 있으니 두 사람은 딱히 숨기지도 않았다.

간간이 그에 관해 조언을 얻기도 했고.

지셀이 밤늦게까지 항상 무언가를 적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그동안 자신에게 건네줄 비전서를 적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지셀은 그런 길리언을 보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이도 훨씬 어린 나한테 마나 연공법이나 무기술을 배우는 게 자존심 상하지는 않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주님이 특별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영지에서 지셀과 대련을 가장 많이 해 본 자가 바로 길리언이다.

그가 아니면 영주의 대련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 검을 맞대 본 뒤, 길리언은 지셀이 이른 깨달음의 경지가 까마득하게 높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도무지 나이와 맞지 않는 실력에 가끔은 의아하기도 했다.

지셀이 종종 농담으로 던지는, 죽었다 살아났다는 말도 믿음이 갈 정도였다.

지셀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길리언이 익힌 마나 연공법도 나쁘지 않더라. 그래서 그걸 기반으로 손만 조금 봤어. 무기술은 굳이 새로 익힐 필요는 없으니 쓰던 방식과 비교해서 괜찮은 것만 가져가고. 길리언은 이미 길리언만의 길을 완성해 가고 있으니까.”

지셀은 길리언에게 줄 책을 쓸 때는 특히 더 신경을 썼다.

오래도록 쌓아 온 경험 덕에 길리언은 몇 번이나 한계를 극복하며 강해졌다.

하지만 그 바탕이 된 기술이 몸과 정신에 완전히 각인되어 버린 탓에, 이제 와서 더 나은 방법을 찾아도 다시 익히기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지셀은 어떻게 해야 길리언의 장점을 극대화하며 한계를 더 넓힐 수 있을지 고민했다.

“……감사합니다.”

길리언은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욕심은 다 버린 줄 알았건만…….’

길리언은 한계를 마주하고 은퇴한 지 오래였다. 단장직을 내려놓으며 강함에 대한 미련도 놓은 줄 알았다.

하지만 버린 줄 알았던 욕망은 불씨를 만나자마자 다시 타올랐다.

그가 속해 있던 라타토스크 용병단은 나름대로 유서가 깊은 단체였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대대로 전해 내려온 마나 연공법도 존재했다. 단장과 주요 인물들은 모두 그 연공법을 익히고, 은퇴할 때는 다음 대에 마나 연공법을 전수해 왔다.

용병단이 구한 것치고는 꽤 수준 높은 마나 연공법이긴 했지만 지셀이 알고 있는 것에 비할 수는 없었다.

마나 연공법뿐만이 아니다. 지셀이 정리한 무기술은 대륙의 내로라하는 기사들도 군침을 흘릴 만한 것이었다.

‘이런 보물들을 주실 줄이야.’

성 하나를 주고도 얻지 못할 보물들이었다. 그 가치를 아는 자들이 본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차지하려고 애쓸 것이다.

혈육에게도 주기 아까울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주는 배포도 놀라웠다.

하지만 지셀이 그런 보물을 줄 정도로 자신을 믿어 준다는 것이 훨씬 더 감격스러웠다.

길리언은 조심스럽게 책들을 챙기며 고개를 숙였다.

“최대한 빠르게 익히도록 하겠습니다. 꼴통 놈들의 훈련도 더 강도를 높이겠습니다.”

“그놈들은 좀 더 굴리는 게 좋겠지만, 길리언은 지금 훈련도 충분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지셀이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길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이 코앞이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승리할 확률이 올라간다.

길리언은 비장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영주님의 적을 모조리 쳐부수는 게 제 역할이니까요. 아직은 부족합니다.”

역시 곁에 있기만 해도 든든한 사람이다.

지셀은 배부른 사자 같은 미소를 지었다.

* * *

길리언과 카오르에게 비전을 전해 준 것과 달리, 지셀은 벨린다에게 따로 무언가를 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만나 한 가지를 물었다.

“수련 안 한 지 얼마나 됐어?”

“음, 제대로 안 한 지는 아마…… 한 십 년은 넘었죠?”

“왜?”

지셀이 궁금해하자 벨린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왜긴요. 도련님하고 엘레나 아가씨를 제가 키웠잖아요? 두 분 다 좀 크고 나서 살 만하다 싶어질 즈음에는 도련님이 사고만 치고 다녀서 그거 수습하느라 바빴고요.”

“……그래도 요즘은 사고 좀 덜 치잖아.”

“빈도가 줄어든 대신 규모가 커졌죠. 뭐, 도련님 뒷바라지가 아니더라도 집사장 일이 많기도 하고요. 제대로 수련할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요.”

수련하기는커녕 기존의 실력이라도 퇴보하지 않게 겨우겨우 유지하는 게 한계였다.

벨린다야말로 이곳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치이고 사는 장본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싸우는 게 업이었던 길리언이나 카오르와 상황이 달랐다.

육아, 교육, 영지 관리 등 그녀가 페르디움에서 맡아 했던 일은 무척이나 많았으니까.

그리고 펜리스 영지에 와서도 집사장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셀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역시 수련이 부업이었어.’

벨린다의 마나 연공법과 기술은 언뜻 보기만 해도 훌륭하다.

길리언과 카오르에게 했던 것처럼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간혹 그녀가 싸울 때 느껴지는 마나의 흐름만 봐도 대단하다는 게 피부에 와닿을 정도였다.

웬만큼 명성 높은 기사 가문의 연공법도 그녀가 익힌 것에는 비할 바가 못 될 것이다.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혼란만 줄 게 뻔했다.

‘아마도 어머니의 가문에서 익혀 왔겠지?’

몰락 귀족이었다는 어머니의 가문에 어떻게 저런 마나 연공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벨린다는 어머니의 가문에 관해서는 통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셀도 어머니에 관해 아는 게 많지 않았다. 회귀자라고 모르는 걸 저절로 알게 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생각해 보니까 진짜 이상하네. 십 년이나 넘게 수련을 안 했는데도 실력이 저렇게 대단하다는 거지.’

아마 벨린다가 쉬지 않고 수련에 전념했다면 카오르 정도는 따귀 한 대만 때려도 목을 돌려 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일을 그만두고 수련만 하라고 할 수도 없고…….’

총관인 클로드와 집사장인 벨린다가 영지의 내정을 책임지고 있다 보니, 두 사람 중 하나라도 일을 놔 버리면 영지가 엉망이 될 것이다.

‘역시 돈지랄밖에 방법이 없겠어.’

지셀은 결단을 내리고 바로 마법사들과 공예사들을 소집했다.

우선 벨린다의 침실에 마나 집속진을 깔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의 수련을 위해 준비한 것들과는 조금 달랐다. 효과를 높이고 유지 시간을 늘리기 위해, 기존 마법진에 쓰인 것의 몇 배나 되는 룬스톤을 들이부었기 때문이다.

마나 연공을 할 때 도움이 되는 팔찌도 잔뜩 만들었다.

집속진과 효과는 비슷하지만, 효율이 극히 떨어져 만들수록 손해인 그런 물건을 말이다.

당연히 룬스톤도 어마어마하게 들었다. 마법사들이 기겁하며 물을 정도였다.

“이걸 누가 쓰려고 이렇게 만드는 겁니까? 용병들한테 주시려고요?”

“아니, 집사장이 쓸 거야.”

“한 사람이 쓰기엔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영지의 일 년 치 예산을 훌쩍 넘기는데요.”

“집사장은 무척 바쁜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틈틈이 수련할 수 있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줘야지.”

지셀은 특히 공예사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팔찌에 ‘샤르넬’이라고 새겨 줘. 알지? 모양도 비슷하게 하고.”

“저…… 영주님……. 저희가 만들면 짝퉁이 되는 겁니다.”

“어디에 가져다 팔 거 아니니까 괜찮아.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 그냥 기분이라도 내자 이거지.”

“……알겠습니다.”

지셀이 준비한 선물을 받고 벨린다는 눈물까지 글썽거릴 정도로 기뻐했다.

그렇지 않아도 항상 수련할 시간이 부족해서 걱정이었다. 그런데 전용 마나 집속진이 생겼고 마나 연공에 도움이 되는 팔찌까지 받았다.

틈날 때마다 수련을 하면 훨씬 빠르게 마나가 모일 것이다.

“마나 연공에는 이것들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야. 몸 움직이는 건 잠깐이라도 시간을 빼서 수련하고. 당장은 이거밖에 방법이 없네.”

지셀의 말에 벨린다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거밖에’라고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과하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지셀의 마음이 너무도 기꺼웠다.

“아깝게 뭐 하러 돈을 이렇게 많이 써요. 영지를 위해 써야죠.”

“벨린다는 항상 남들 뒷바라지만 하느라 본인 수련은 제대로 못 했잖아. 이것도 부족한 거지.”

말만 들어도 그간의 피로와 고생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사고뭉치였는데 이렇게 대견스럽게 자라다니.

돌아가신 백작 부인께서 이 모습을 봤으면 정말 좋으련만.

벨린다는 눈물을 살짝 닦으며 말했다.

“이 팔찌……. 짝퉁이죠?”

“……티 많이 나?”

지셀이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그 모습을 본 벨린다는 눈을 흘기다 밝게 웃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봤던 팔찌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어요.”

그녀에게는 세상 그 어떤 명품보다도 더 값진 선물이었다.

* * *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를 제외하면 따로 더 챙길 사람은 없었다.

마법사들은 원래도 지원을 많이 해 주고 있었고, 퍼거스는 나이 때문에 지셀이 예전부터 챙기고 있었으니까.

이제는 수습 기사가 된 용병들과 전생의 수하들을 가르칠 차례였다.

1차로 모인 수습 기사들을 보며 지셀이 진중하게 설명했다.

“이제부터 내가 가르칠 건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허접한 마나 연공법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페르디움 가문의 마나 연공법이지.”

듣고 있던 수습 기사들은 하나같이 경악했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정말 가문의 것을 가르치겠다니!’

지금 지셀이 하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충성을 맹세한 자에게도 가주의 허락 없이는 마나 연공법을 함부로 가르칠 수 없다. 그것을 어긴다면 혈육이라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이 시대의 법도였다.

지셀이 아무리 가문의 적장자라고는 하지만 아직 가주는 아니다.

그런데 한둘도 아니고 수백 명에게 그걸 가르쳐 주겠다니, 차라리 농담이라고 하는 게 더 믿을 만했다.

수습 기사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가문의 것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셔도 되겠습니까?”

가문마다 수하들에게 가르치는 마나 연공법도 따로 있다. 원본에 비해 현저히 수준이 떨어지지만, 이들은 그 정도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밑바닥 인생인 그들에게 허락된 최대치는 정말 그 정도였다. 그 이상은 감히 욕심도 내서는 안 되는 줄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지셀은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퉁명스럽게 답했다.

“못 가르칠 이유도 없지. 내가 가르치고 싶으면 가르치는 거다.”

“어, 어째서 그렇게까지……. 밖에 알려지면 위험해지시는 거 아닙니까?”

“위험은 무슨, 전쟁에서 지는 게 더 위험하지. 이기려면 일단 너희부터 강하게 키워야 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강해져야 하는 건 맞다. 그래도 너무 과한 처사였다.

유출도 문제지만, 혹여나 배신하고 영주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가 생기면 어찌할 생각인 건지.

지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입꼬리가 처진 이들을 돌아보며 그가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 전쟁에서 죽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고.”

마수의 숲에서부터 함께한 자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지셀이 그간 어떻게 싸워 왔는지 바로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저 말이 진심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지셀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너희와 함께하고 싶어서다.”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다.

영주가 자신들에게 먼저 믿음을 주고 있다는 것을.

목숨을 파는 천한 직업이라 괄시받던 이들이었다. 지셀이 새로 찾아온 자들도 별다를 게 없었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여건과 환경이 따라 주지 않았다.

그런데 영주가 지금, 자신들이 그토록 바라던 기회를 주고 있었다.

무언가를 받으면 무언가를 줘야 하는 법.

그것은 용병이나 기사나 다를 게 없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심장에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이제 막 기사가 된 이들이라 예법에 맞지 않는 어설픈 모양새였지만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진실했다.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은 이들은 마음을 다해 외쳤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들이 지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그리고 지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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