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체질 개선에 들어간다. (1)
알포이가 원래 이렇게 칭찬에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마탑에서 지낼 적 그는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였다.
배경과 재능, 그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않다고 자신하며 살아왔다.
‘그래, 나는 알포이.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
사실 지셀 옆에 온 뒤로 내내 고생만 하다 보니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요새는 왜 사는지도 모르겠고 종종 뜬금없이 울적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칭찬 세례를 들으니 왠지 마탑 시절의 자신감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당연히 할 수 있지! 그냥 뭐…… 피곤하긴 하니까 영주님 한번 떠본 거지, 사실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그런 것도 못 하면 마탑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겠어?”
알포이가 거만하게 말하자 옆에 있던 마법사들이 경악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알포이를 오래 겪어 온 만큼, 그의 단점도 잘 알고 있었다.
허세가 가득하고, 주변에서 띄워 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성격이라는 걸.
불길함을 느낀 마법사들이 말리기도 전에 다시 칭찬이 마구마구 쏟아졌다.
“역시, 역시 마탑의 후계자다운 기개입니다. 저런 기개는 아무나 보일 수 없지요.”
“이러니 적염의 마탑이 북부 최고라 불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런 분이 후계자라니. 마탑의 장래가 참으로 밝습니다.”
지셀도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분위기를 잔뜩 띄웠다.
“넌 정말 최고야, 알포이.”
이렇게까지 칭찬하면 말 다 한 거다. 그가 누군가에게 최고라 칭하는 건 절대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치…… 뭐 언제는 아니었나.”
알포이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슬슬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거기에 쐐기를 박듯, 알포이의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헤이, 브로! 마법을 사용하는 너의 그 손이 어떤 손인지 알아?”
“……오른손?”
“그런 뜻이 아니고 이 등신아……. 아니, 너의 손에서 시작되는 마법은 이 영지에 기적을 일으킬 거잖아! 그러니 네 손이야말로 바로 기적의 손이지! 오른손 왼손이 문제가 아니라고! 이 등신…….”
“와아아! 기적의 손, 알포이!”
사람들이 클로드의 말을 자르며 환호했다. 이왕 감정 노동을 시작했으니 마지막까지 확실히 하는 게 나았다.
짝짝짝짝.
박수까지 쏟아지자 알포이는 완전히 자신만만해졌다.
그 모습을 본 클로드는 짠한 눈빛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으며 웬디에게 속삭였다.
“쟤는 사회의 쓴맛을 더 봐야 해. 마탑에서만 곱게 대우받고 자라서 그런지 영 눈치가 없어. 도대체 마탑주가 어떻게 키운 걸까?”
‘니가 제일 나쁜 새끼야.’
웬디는 대답도 안 하고 그냥 속으로만 생각했다.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가 계속될수록 알포이의 콧대도 점점 높아졌다.
당황한 마법사들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아올랐을 때, 지셀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기간 안에 처리할 수 있겠어? 최대한 빨리해야 하는데……. 천재 마법사 알포이한테도 힘든 일인가?”
그 말에 모두가 숨죽이고 알포이를 바라보았다.
알포이는 기대감이 가득한 사람들의 눈빛을 훑어보더니, 한 손으로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고는 매우 건방지고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다 이 알포이 님이 처리할 테니 안심하라고!”
“와아아아! 역시 알포이다!”
다시 큰 환호와 박수갈채가 알포이에게 쏟아졌다.
알포이는 턱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고, 다른 마법사들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 * *
‘안 되는 걸 알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알포이는 룬스톤을 앞에 두고 후회 중이었다.
오랜만에 치사량에 가까운 칭찬을 받으니 도무지 못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일거리를 마주하니 할 게 너무 많아서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지금도 각 공사장에서 마법사들을 애타게 찾고 있고, 행정부에서는 빨리 개간지에 쓸 룬스톤을 달라고 독촉하고 있었다.
칭찬할 때는 언제고 막상 일하기 시작되니 다들 냉정할 정도로 압박만 준다.
특히 클로드는 악랄할 정도로 매시간 사람을 보내 일정을 확인했다.
― 어이, 기적의 손! 빨리 기적을 보여 달라고! 작업 언제 끝나냐고! 이 등신아!
‘나쁜 새끼! 그런 달콤한 말로 감히 날 조종하려고 해? 그 새끼는 주둥이로 마법을 쓰는 게 분명해.’
천재 마법사인 자신이 그런 놈의 말에 넘어갈 줄이야. 마치 그놈의 입에서 ‘매혹’ 마법이 시전된 것만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들었다면 실컷 비웃었을 생각이었지만 알포이는 알지 못했다.
그는 손톱만 계속 물어뜯으며 불안한 표정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안 돼. 도대체 이걸 언제 다 해? 마나 집속진을 일주일 안에 만들려면 다른 작업을 할 시간이 안 나. 그래도 일정이 안 맞아.”
마법사들이 죄다 달라붙어도 도무지 일정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못 한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의 자존심에 그런 건 허락되지 않는다.
마탑의 후계자인 알포이는 언제나 도도하고 완벽해야만 했다.
주저앉아 한탄만 하는 그에게 바네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저한테 방법이 있어요.”
“뭔데?”
“마법진은 제가 새길 수 있는데……. 마력이 문제거든요?”
어차피 지금도 마법진 작업은 바네사가 주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력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그녀의 지시에 따라 작업할 수밖에 없었고, 속도가 그다지 나지 않았다.
알포이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근데 그게 왜? 네가 마법진 주도한다고 자랑하는 거야? 와, 잘난 척 뭐야. 야, 나 마탑의 후계자야, 후계자. 마법진 빼고는 다 내가 더 잘하거든? 그런 건 비주류라서 내가 공부를 안 한 거고.”
“아뇨, 아뇨. 그, 그게 아니라……. 저한테 마력 전이를 해 주시면…… 제가 최대한 빨리해 볼게요.”
“뭐?! 싫어! 그걸 또 하라고? 미쳤어?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기겁하며 물러섰다.
전쟁 때야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던 탓에 어쩔 수 없이 끌려다녔지만,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 위험한 짓을 할 생각은 절대 없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평소와는 달리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안 그러면 우리 일정을 못 맞춰요! 우리가 못 맞추면 영지 개발에 전부 문제가 생길 거라고요! 알포이 님도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잖아요. 못하면 망신을 당할 거라고요!”
“마, 망신? 그건 안 되는데……. 아, 그러면 룬스톤으로 마력을 채우면서 하는 건 어때? 룬스톤은 많잖아.”
영지의 재산인 룬스톤을 쓰라는 말에 바네사의 말이 한층 더 빨라졌다.
“그 비싼 걸 어떻게 막 써요? 아무리 룬스톤이라고 해도 마법사님들 마력보다 많지는 않잖아요. 마력 전이만큼 마력을 채우려면 엄청나게 써야 한다고요. 앞으로도 여기저기 쓸 일이 많아서 영주님도 허락 안 하실 거예요.”
“와, 너 갑자기…… 왜 이렇게 말을 잘해.”
어쨌든 틀린 점 하나 없는 현실적인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알포이는 머리만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바네사는 그런 그를 달래듯 말했다.
“전쟁 때처럼 마력을 전부 빼 내지는 않을 거예요. 그때처럼 위험하지도 않고…… 일도 빨리 끝낼 수 있어요. 그리고 알포이님은 더 칭송받을 거예요.”
“…….”
“정말 빨리 끝내면 조금이라도 쉴 수 있다니까요?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빨리 끝내고 쉬는 게 낫지 않아요?”
바네사의 강력한 설득에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혹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가 마력을 주면 얼마나 빨리 끝낼 수 있는데?”
“이틀! 이틀이면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적어도 다시 이틀은 쉴 수 있어요. 남은 시간에 다 같이 하면…… 경작지용 룬스톤 작업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정말…… 이틀이면 끝낼 수 있다는 거지?”
“네!”
한참을 고민하던 알포이는 자존심과 휴식을 위해 죽음의 공포를 감수하기로 했다.
“살살…… 해야 해?”
“넵!”
마력을 전이 받은 바네사는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영지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집념은 결국 작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
정말 이틀 만에 백 개의 마나 집속진을 만들어 낸 것이다.
누군가를 ‘기적의 손’이라 불러야 한다면 그 주인공은 알포이가 아니라 바네사였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알포이뿐이었다.
어쨌든, 강제로 일정을 당긴 만큼 다들 대가를 치르긴 했다.
마지막 공정을 끝내고 비틀거리는 바네사의 주변에는 이미 스물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으으……. 진짜 가능하다니…….”
“미친……. 죽을 거 같아. 살살 한다며…….”
“저거, 저것도 제정신이 아니야…….”
그들의 몸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처음에는 살살 하겠다던 바네사가 막상 마력 전이를 시작하자마자 미친 듯이 마력을 쪽쪽 빨아먹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개인적인 감정도 듬뿍 섞인 것 같았다.
거의 해골이 된 알포이가 바들거리며 말했다.
“이, 이거 다 했으니까…… 정말 이틀은 쉬어도 되는 거 맞지? 꼭 내가 주도해서 성공한 거라고 해. 그래야 망신을…… 안 당할 거 아니야.”
“네, 네…….”
바네사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대답을 들은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하나같이 안색은 초췌했지만 그들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력이 부족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영주라고 어쩔 도리가 있겠어?’
결과적으로 마법사들의 계획은 성공했다.
일주일 이상 걸리는 일을 이틀 만에 끝냈으니, 회복을 위해 최소 이틀은 누워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마법진이 완성됐다는 소식에 지셀마저 깜짝 놀라서 달려왔다.
“헐, 정말 이틀 만에 이걸 다 했다고? 그런데……. 다들 괜찮아? 죽은 거 아니야?”
주변을 둘러본 지셀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빨리 끝난 건 좋은데 다들 상태가 무척 안 좋아 보였다.
그러자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바네사가 웃으며 말했다.
“이틀 정도만 쉬면…… 다시 일하는 건 문제는 없을 거예요. 다음 일은 경작지용 룬스톤이라 단순한 작업이거든요.”
“그, 그래. 일단 너도 좀 쉬어야겠다.”
“아, 아니에요. 알포이 님이 다 해서 저는 괜찮아요. 대신 조금 더 확인을…….”
주르륵.
바네사는 말을 하다 말고 코를 한번 훔쳤다.
그러고는 손가락에 묻은 새빨간 액체를 보고 뭔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 그리고…… 이 마법진은 이전 것들보다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어요……. 적어도 이 주는 갈 거예요…….”
엄청난 소식이다. 지속 시간이 늘어나면 룬스톤을 그만큼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천재 마법사다운 실력이었다.
지셀은 알포이가 다 했다는 말은 눈곱만큼도 믿지 않았다.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마법진 공부는 소홀히 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소소한 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바네사의 코에서 흐르는 피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걸 본 지셀이 다급하게 말했다.
“확인은 내가 할 테니까 어서 쉬어. 너 지금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니까?”
“괜찮아요. 이건 갑작스럽게 많은 양의 마나에 노출되고, 과도한 의념을 발산한 영향으로 뇌에 부하가 걸려서 그런 건데, 해결 방법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던 바네사는 갑자기 정신을 잃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바네사!”
지셀이 바네사의 어깨를 잡아 넘어지지 않게 지탱했다.
아무리 6서클에 올랐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마력도 부족한 데다, 정신력도 엄청나게 소모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바네사는 영지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한계까지 힘을 끌어낸 것이다.
“하, 참…….”
지셀은 자신의 품 안에서 정신을 잃은 바네사의 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평소에는 존재감도 없으면서 중요할 때는 누구보다 큰일을 해낸다.
그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져 고마움이 앞섰다.
그리고 이유야 어쨌든 위험한 마력 전이를 사용하다 쓰러진 알포이와 마법사들도 대견스러웠다.
“그래도 마탑의 후계자답게 할 때는 하네. 나중에 뭐 좀 챙겨 줘야겠어.”
지셀은 사용인들을 시켜 마법사들을 옮기게 하고, 바로 길리언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길리언, 이제 훈련과 치안 업무는 오전 조와 오후 조로 나눠야겠어.”
“그 말씀은……?”
“그래, 이제 체질 개선에 들어간다.”
지셀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앞에는 은은하게 푸른 빛을 내는, 백 개의 마법진이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