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먼저 때리는 게 낫다니까? (3)
황당해하는 지셀에게 클로드가 다급하게 말했다.
“언제 출정하실 건데요? 조금 천천히 하면 안 될까요? 우리도 데스몬드 백작의 움직임을 보면서 계획을…….”
지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지금도 예상보다 일정이 늦어졌어. 무조건 지금 당장 준비를 시작해야 해. 다음 수확기가 끝나는 대로 출발할 거다.”
다음 수확기라고 해 봐야 몇 달 남지 않았다. 너무 급했다.
클로드가 빽 비명을 질렀다.
“왜 꼭 그때여야 하는데요!”
“내가 원하는 때에 싸워야 하니까.”
지셀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히 그곳을 빨리 차지하고 싶어서 서두르는 것이 아니다.
철광석을 빨리 얻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최적의 타이밍을 찾는 것이다.
급하다고 아무렇게나 일을 처리하면 실패 확률만 더 높아지는 법.
적어도 지셀에게는, 단 한 번뿐이더라도 실패는 곧 파멸을 의미했다.
‘피해가 최대한 적도록 압도적으로 승리해야 해. 위험을 줄이고 가장 빨리 철광산을 차지하는 방법은……. 그때 공격하는 것뿐이다.’
미래를 아는 지셀만이 세울 수 있는 계획이었다.
앞으로도 모든 상황을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야 한다. 지셀은 그러기 위해 브랜포드 후작을 끌어들이고 친왕파에 합류했다.
하지만 이건 지금 설명해 봐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도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결과가 나온 뒤에도 그저 운이 좋았다고 치부할 가능성이 컸다.
지셀의 단호한 태도에 발만 동동 구르던 클로드가 애처롭게 말했다.
“영주님, 저랑 이번에도 내기 하나 하시죠?”
“무슨 내기?”
“제 방식대로 영지를 지킬지, 영주님이 생각하신 대로 출정을 할지 내기로 정하는 겁니다.”
클로드의 얼굴에는 정말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목숨을 걸고 이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더 이상 영주의 미친 짓에 끌려다니면 안 된다.
현실을 살아가는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래야 했다.
울음까지 섞인 클로드의 목소리에 지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세히 말해 봐.”
클로드는 내심 안도하며 신이 나서 말했다.
“사실 영주님이 하라고 명령하시면 무조건 따르는 게 맞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상황이 너무 좋지 않으니까요. 다들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는 지셀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라오는 건 의미가 없었다.
앞으로 상대해야 할 적들은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열의를 심어 주기 위해서라면 내기 정도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 줄 수 있었다.
“그래, 그러면 어떻게 할까?”
“말씀하신 대로 출정 준비는 확실히 하겠습니다. 대신…….”
“대신?”
“두 달 안에 모두가 마나를 다루지 못한다면 출정을 취소해 주십시오.”
“출정을 취소하라고?”
“네, 그리고 수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겁니다. 준비만 확실히 되면 진짜 데스몬드가 쳐들어오더라도 제가 어떻게든 막아 낼 수 있습니다. 저 그 정도 능력은 있다니까요?”
지셀은 내심 혀를 찼다.
클로드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공작가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확실히 대비해 두지는 못할 게 확실했다.
왕실과 친왕파조차 공작가의 모든 저력과 계획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클로드가 어찌 알고 대비하겠는가.
공작가의 힘이 모두 드러났을 때는 늦는다.
하지만 이건 지셀이 어떻게 해도 가신들을 이해시킬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나마 지금도 데스몬드 백작이 진짜로 움직이고 있어서, 수성 준비를 할 정도로 위기감을 심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흐음…….”
지셀이 잠깐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클로드는 조마조마해하는 얼굴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적이 대놓고 영지에 쳐들어올 준비를 하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영지 전체의 운명을 걸고 도박을 하겠다는데, 아무리 상대가 영주라 해도 그러십시오 하고 따를 수는 없었다.
지셀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클로드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아, 그거론 좀 부족한가요? 그러면 저랑 알포이랑 노예살이 10년씩 더 걸게요.”
“야이! 미친! 나를 왜 걸어!”
알포이가 옆에서 기겁했지만, 클로드는 모르는 척했다.
혼자보단 둘이 더 마음이 편하니까.
알포이는 발악하며 방해하려다 주변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받고 입을 닫았다.
다들 알포이를 대신 걸고 영주의 출정을 말리려는 것이었다.
‘아, 이 망할 영지. 마탑으로 돌아가고 싶다. 총관 저 새끼가 이겨야 하는데.’
울먹이는 알포이를 힐끗 바라본 지셀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 10년을 또 건다고? 진짜 괜찮겠어?”
“상관없습니다.”
클로드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인생을 건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제는 얼마나 저당 잡혔는지 감도 안 온다.
그래도 올해 죽는 것보다는, 노예처럼 굴려지더라도 몇십 년 더 살고 죽는 게 낫다.
지셀은 다시 생각해 보라는 듯 말했다.
“차라리 성공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게 낫지 않아? 생각해 봐.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전력이 수백 명이라니. 그거 정말 대단하지 않아? 엄청날 거라고.”
그 말에는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백작령인 페르디움에도 기사는 서른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수백 명이 한 영지에 모여 있다면?
개개인의 무력이 기존의 기사들보다는 조금 약하다 해도, 그들이 한데 뭉치면 파괴력은 엄청날 것이다.
상상만 해도 흐뭇하지만, 그건 정말 상상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클로드는 헛된 기대 따위는 집어 던졌다. 그런 걸 믿기에는 너무 고달프고 험한 세상을 살아왔다.
“당연히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겁니다. 단지 영주님의 출정 의지가 확고하신 게 문제지요. 그러니 일단 시도는 해 보되, 기사단이 준비되지 않으면 포기하자는 겁니다.”
사실 영주가 전쟁까지 결심했는데 내기까지 걸어 가며 반대하는 건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가신들도 이번에는 클로드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격식 없는 분위기에도 상당히 익숙해졌을뿐더러, 이번만은 무례하더라도 영주를 말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예의도 살아서 차리는 거지.’
‘영주 앞에서 무기를 꺼내 들고 칼부림을 하는 데 비하면 저 정도야…….’
다른 가신들도 클로드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보이자, 지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총관의 말대로 하지. 어차피 다들 직접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테니까.”
그는 얘기하다 말고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런데 다들 이번 내기는 안 말려?”
평소에는 내기를 하겠다고 하면 누군가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말리곤 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심지어 영주의 명이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길리언마저도 애꿎은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이번에는 클로드가 이기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에잉, 다들 이렇게 믿음이 없을 줄이야.”
지셀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아무리 비상식적인 일이라도 그렇지, 이렇게 한 사람도 안 믿어 줄 줄이야.
“전 믿습니다.”
“어?”
의외로 앞에 나선 건 카오르였다.
사실 그도 딱히 지셀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출정에 찬성하는 쪽이었다.
왜냐하면…….
“요새 몸이 좀 근질거렸는데 이왕 싸울 거면 화끈하게 빨리 나가서 싸우자고! 내가 다 죽여 줄 테니까!”
최근에 싸울 일이 없었으니 심심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 뻔뻔한 카오르도 잠깐 당황했다.
“뭐?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야, 너희 영주님 말이 우습게 보여? 응? 가자고 하면 가는 거지 왜 이렇게 반대가 많아? 이 충성심도 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영주를 제일 우습게 보는 놈이 괜히 무안하니까 영주까지 팔아먹는다.
카오르의 망나니짓을 보다 못한 벨린다와 길리언이 그의 앞을 막았다.
“재미로 싸울 거면 그냥 나랑 데스몬드 백작인지 아몬드 백작인지 목이나 따러 가자고요.”
“낄 데 껴라. 좀.”
두 사람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압박을 하자 카오르가 건들거렸다.
“하, 참! 허? 한번 해보자는 건가? 오늘 술 대신 피 좀 마셔 볼까?”
말은 거칠게 하지만 눈은 내리깐 채였다.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정말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아무리 카오르라도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좀 힘들었다.
지셀은 묘한 눈빛으로 카오르를 바라보았다.
저놈이랑은 뭔가 통하는 부분이 있긴 한데, 그게 왠지 자존심이 상하고 분하다.
그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결론은 난 거지? 내가 이기면 무조건 출정할 테니까 그리 알아 둬. 그때까지 준비는 확실히 해야 할 거야.”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내기를 걸었는지는 뻔히 알지만, 출정을 늦출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지셀의 속내를 모르는 클로드는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수성이든 공성이든, 전쟁에 대비하려면 준비해야 하는 것들은 대체로 비슷하니까요.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마나 집속진을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룬스톤을 날리게 되겠지만, 적어도 엉터리 오합지졸들을 기사단이랍시고 데리고 나가는 건 막았다.
‘그 정도 룬스톤이라면 어마어마하게 좋은 장비로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을 텐데. 아오, 아까워 죽겠네!’
그래도 출정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했다.
클로드가 입을 닫자 지셀은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지금까지처럼 전쟁 준비와 영지 개발 업무에만 전념하면 돼. 용병들의 마나 수련은 내가 직접 진행할 거니까. 뭐, 지금보다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할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얘기를 듣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지셀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시선을 한몸에 받은 알포이와 마법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용병들에게 마나를 빨리 익히게 하려면 마나 집속진을 만들어야 한다.
그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들뿐이다.
문제는 지금 영지의 수로와 저수지 공사부터 개간지 룬스톤 작업까지, 마법사들이 해야 할 작업이 잔뜩 쌓여 있다는 점이었다. 다들 잠잘 시간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알포이가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거…… 꼭 해야 합니까?”
“당연하지.”
“일이…… 지금도 너무 많은데요……?”
“아니야, 넌 할 수 있어.”
“못 합니다!”
알포이가 이를 악물고 외쳤다.
“더 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습니다! 마탑과 펜리스 영지의 계약은 지부장의 권한으로 파기하겠습니다! 마탑으로 돌아갈 테니 막지 마세요! 진짜 갈 겁니다!”
알포이가 세게 나오자 마법사들도 같이 들고일어났다.
“그래요! 우리는 돌아갈 겁니다! 이제 그만합시다! 안 해요! 못 해!”
그러자 지셀은 부러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감당할 수 있겠어? 마탑으로 돌아가면 마탑주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습니다! 아무튼 파기할 겁니다!”
지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탑 지부장씩이나 되는 분이 계약을 파기하겠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우리, 개인적인 계약은 아직 남아 있잖아.”
“네?”
“우리 영지에서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좋아. 조만간 노예상들이 오기로 했으니까 걔들하고 같이 가면 되겠네.”
노예상과 같이 가면 목적지가 마탑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았다.
아니, 높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100%의 확률로 아주 먼 곳으로 갈 게 분명하다.
“싫어! 여기 정말 싫어 죽겠어!”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얼굴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마법사의 체면이고 뭐고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인생이 완전히 꼬여 버렸다.
일하다가는 과로로 죽을 거 같고, 버티다가는 전쟁으로 죽을 거 같고, 도망갔다가는 노예로 팔려 갈 거고, 마탑으로 돌아가면 마탑주에게 죽을 거다.
그때, 안절부절못하며 보고 있던 바네사가 나섰다.
“영주님, 몇 개나 만들면 되나요?”
“일단은 백 개. 두 달 동안 용병들이 매일 번갈아 가면서 수련을 할 거니까, 아마 몇 번 더 만들어야 할 거야.”
마법사들은 조금 안심했다. 사람 수에 맞춰 만들라고 할 줄 알고 걱정했는데, 백 개라면 그래도 지난번 밀알 개량 때보다는 반으로 줄어든 분량이었다.
하지만 지셀의 요구사항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일주일 안에 다 만들어야 해. 그래야 빨리 시작할 수 있거든.”
살인적인 일정에 마법사들의 안색이 다시 허옇게 질렸다.
다른 사람들은 안쓰러워하면서도 차마 그들을 편들어 주지 못했다.
영주의 결심이 확고하니, 마법사들을 편들어 주다가는 자칫 영지의 공사와 개간지 작업이 뒤로 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네사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마법사들을 달랬다.
“알포이 님,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알포이 님은 북부 제일 마탑의 후계자잖아요? 다른 마법사 분들도 유능하시고요.”
달래는 듯한 말투에 알포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마탑의 하녀였던 사람한테 위로를 받으니 자존심이 살짝 상한 것이다.
그때 클로드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헤이, 브로. 넌 최고의 지성인이자 마법사잖아! 이 정도야 쉽지 않겠어? 왜 갑자기 약한 모습을 보이고 그래? 요새 좀 피곤하긴 한가 보지?”
다른 사람들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일이 많긴 하지요. 하지만 적염의 마탑에서 오신 분들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그럼요, 누가 뭐라 해도 최고의 마탑에서 온, 최고의 재능을 타고난 분들 아니겠습니까?”
“미래의 대마법사님께서 엄살이 조금 심하신 거 같습니다. 허허허.”
어차피 하기로 결정이 난 일이다. 그런데 마법사들이 괜히 파업하면서 버티면 다른 사람들도 피곤해진다.
말 몇 마디로 그 꼴을 막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였다.
“흐, 흥! 다들 아부는…….”
사람들이 칭찬을 마구 쏟아내자 알포이가 은근히 허리를 세우고 코 밑을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