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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53화 (153/269)

153화 상황이 좀 불편하지? (2)

클로드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한번 파더니 다시 물었다.

“전쟁이요? 그 막 칼하고 방패 들고 떼지어서 싸우는 그거 말하는 거 맞아요?”

“그래, 그거. 슬슬 전쟁 준비를 시작할 때가 됐어. 아, 물론 영지 개발도 쉬지 않고 해야 하고. 최대한 빠르게. 알지? 우리한테는 시간이 별로 없거든.”

클로드는 어이가 없어 입만 뻐끔거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전쟁 준비가 무슨 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영지 개발과 전쟁 준비를 어떻게 동시에 한단 말인가?

그래도 갑자기 왜 이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지 물어는 봐야 했다.

“갑자기 뜬금없이 웬 전쟁 준비예요? 시간은 왜 없는데요?”

지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미래를 다 안다고 했다가는 진짜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그러니 하나씩 화두를 던지며 관심을 유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먼저 가장 가깝고 확실한 위험부터.

“다들 알다시피, 데스몬드 백작이 우리를 노리고 있다.”

그 말에 가신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곳에 있는 자들도 페르디움에서 일어났던 전쟁의 전후 사정은 대충 알고 있다.

대영주인 데스몬드 백작과 척진 상황이니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 이후에 영지에 합류한 클로드는 걱정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 생각을 했었습니다만,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무슨 사정?”

“우리는 이제 친왕파 소속입니다. 온전한 전력일 때도 치기가 부담스러울 텐데 반 토막이 난 전력으로 시비를 걸겠어요? 그건 진짜 말도 안 됩니다.”

클로드가 열변을 토해 낼수록 가신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친왕파를 믿고, 데스몬드 백작이 전력을 복구하는 동안 이쪽도 힘을 기르면 된다는 희망이 급격히 퍼져 나갔다.

하지만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만약에 데스몬드 백작이 친왕파를 무시하고 지금 당장 남은 전력을 모아서 쳐들어오면 우리가 막을 수 있나?”

클로드는 찝찝한 표정으로 답했다.

“못…… 막겠죠?”

전에도 지셀이 함정을 깔아 둔 덕에 이겼을 뿐이다. 똑같은 수가 두 번 통할 리가 없으니 다시 싸우면 필패다.

애초에 전력의 차이를 따지면 애와 어른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못 막지. 그런데 그쪽에서 미친 척 쳐들어오면 어떻게 할 거야?”

클로드는 당당하게 답했다.

“이쪽으로 쳐들어오려면 영지에 남은 병력을 모조리 긁어모아야 할 텐데, 그러면 다른 대영주인 레이폴드 백작이 그 뒤를 치겠죠. 데스몬드 백작은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도 전력을 키울 시간이 충분합니다.”

클로드의 판단은 논리적이긴 했다.

데스몬드 백작이 무리해서 전쟁을 일으키면 욕심 많은 레이폴드 백작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일 뿐이다. 아직 클로드는 진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지셀은 팔짱을 끼고 가신들을 쓱 둘러보았다.

“뭐, 거기 관해서는 또 내가 할 말이 있지. 로웰, 그거 가져와라.”

눈치를 보던 로웰은 부리나케 서류 뭉치를 하나 가지고 왔다.

지셀은 서류를 클로드에게 넘기며 말했다.

“수도로 떠나기 전에 로웰에게 데스몬드의 동향에 대해 알아보라고 시켜 놓고 갔지. 확인해 봐.”

클로드는 빠르게 서류를 확인했다.

아직 펜리스 영지의 정보 수집 능력으로는 상세한 상황을 알기 어려웠다.

로웰이 가져온 서류들도 데스몬드를 드나드는 상단과 일반 주민들의 소문을 위주로 수집한 정보들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데스몬드의 움직임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움직임이 너무나도 노골적이었으니까.

“대규모 징집과 훈련……. 약초를 대량 구매……. 활과 화살……. 자유 기사들 모집…….”

데스몬드의 자금 흐름은 이상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펜리스와 데스몬드 사이에 있는 카발디 백작령에서 철광석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는 정보였다.

“철광석을 이렇게나 많이?”

카발디 백작령의 철광석은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일종의 전략 자원 취급을 받아 돈이 있어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귀한 자원이 데스몬드 쪽에 엄청나게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이…….”

클로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전쟁 준비에 가장 중요한 물자는 식량과 병기다. 그리고 철광석은 그중 병기를 만들고 보수하는 데 필요한 필수 자원이다.

부족해진 전력을 다시 채운다기에는 너무나 과한 양이었다.

다른 조치들도 과하긴 마찬가지였다. 자금과 인력을 이렇게 쏟아부으면 영지를 제대로 운영하기 어려울 터였다.

“진짜…… 전쟁을 하겠다고?”

전쟁을 준비하는 건 분명하다. 목표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방심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데스몬드와는 원한을 맺은 상태니, 목표가 이곳이 될 확률도 매우 높았다.

점차 굳어져 가는 클로드의 얼굴을 확인하고 지셀이 물었다.

“어때? 상황이 좀 불편하지?”

클로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셀이 친왕파에 합류했다고는 해도, 전쟁이 벌어지자마자 지원군이 오기는 어렵다.

그리고 친왕파의 지원만 믿고 있을 수도 없다. 일단 미친 척 여기를 쓸어 버리고 그 뒤에 협상에 나선다면 친왕파도 손쓰기가 어려우니까.

“그렇군요. 정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도대체 이 망할 놈의 영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긴다.

‘아이고, 차라리 망하는 게 속이 편하겠다. 망해야 이런 꼴을 안 당하지!’

우울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지셀은 내심 혀를 찼다. 이래서야 전쟁도 하기 전에 지고 들어가는 꼴이지 않은가.

그런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클로드만은 굴하지 않고 의견을 내었다.

“이주민들이 곧 들어올 텐데, 그 전에 최대한 영지를 안정시켜야 합니다. 한정된 자금과 인력으로 전쟁 준비를 병행하면 개발이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지셀에게 받은 은혜와 노예 계약으로 펜리스에 묶여 있기는 하지만, 그도 본래는 아카데미에서 학문을 쌓던 사람이다.

장래 학자가 되든 정치가가 되든, 명성과 업적을 세울 기회를 놓치는 건 아카데미 출신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런 클로드에게 펜리스 영지는 평생을 살아갈 터전인 동시에 스스로의 야망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없던 이 영지를 대영지로 만든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

그렇기에 클로드는 진심으로 펜리스 영지에 득이 될 방법을 고민했다.

“브랜포드 후작가의 병사들을 이곳에 주둔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수는 적어도 상관없습니다. 브랜포드 후작의 영역이라고 내보이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하면 데스몬드 백작도 쉽게 이곳을 칠 수 없을 겁니다.”

클로드가 내놓은 묘책에 가신들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포드 후작의 병사들이 이곳에 주둔한다면 전쟁을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의 병사가 주둔하고 있는 곳을 친다는 건 브랜포드 후작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클로드가 말을 이었다.

“타 영주의 군대를 영지에 주둔시키는 건 굴욕적인 일이지만, 브랜포드 후작님은 예외죠. 영주님의 후견인이시니 명분도 충분하고 명예에도 그다지 흠이 되지 않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어 보였다.

큰 손해 없이 안전도 보장되고 영지 개발에만 온전히 힘을 쓸 수 있을 테니까.

평소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던 벨린다와 카오르까지도 이번에는 동의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지셀은 모두를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다른 영주들이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클로드의 말을 따르겠지.’

가장 상식적이며 가장 부담도 적고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으니까.

문제는 데스몬드의 뒤에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델파인 공작가가 있다는 점이다.

‘언제까지 숨겨 둘 수는 없겠지.’

그간 쓸데없는 불안을 키우지 않으려고 숨겨 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더 큰 목표를 향해 하나가 되어 달려가야 한다. 설사 믿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위기의식과 의심 정도는 심어 줘야 했다.

생각을 정리한 지셀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데스몬드 백작은 혼자가 아니다.”

“아, 네. 그분 결혼하셨더라고요. 백작 부인이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역시 사람은 권력이 있고 봐야 한다니까요.”

“……그게 아니라. 데스몬드 뒤에는 델파인 공작이 있다. 데스몬드의 뜻이 곧 델파인 공작가의 뜻이라는 얘기지.”

헛소리를 지껄이던 클로드와 옆에서 듣고 있던 가신들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델파인 공작, 그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두려울 정도로 잔인무도한 왕국 최고의 권력자.

지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영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신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설마요! 북부의 대영주씩이나 되는 자가 뭐가 아쉬워서 남부 공작가에 굽히고 들어간단 말입니까?”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증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지셀이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클로드가 무언가 깨달은 듯 멍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그런데 영주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네요. 공작가 대신 자유롭게 움직일 말로서 데스몬드 백작이 중립 귀족인 척하고 있다면…….”

지셀은 화색을 띠고 얼른 맞장구쳤다.

“그래, 너 말이 좀 통한다? 그게 델파인 공작가가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노림수야. 이야, 이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역시 많이 배운 놈답다.”

클로드는 순간 소름이 끼쳐 다시 서류를 훑어보았다.

카발디 백작은 공작가의 파벌에 속한 귀족이다.

아무리 데스몬드가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지만, 같은 파벌도 아닌 영지에 철광석을 이렇게 대량으로 파는 건 말이 안 된다.

거기다 이 정도 양……. 정가로 샀다면 아무리 잘 사는 영지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정말 공작가가 뒤에서 데스몬드를 지원하고 있다는 말인가?’

만약 데스몬드 백작 뒤에 정말 공작가가 있다면, 브랜포드 후작의 병력을 주둔시켜도 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차후 공작가가 끼어들어 적당한 명분과 보상으로 중재를 한다면 친왕파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직 이곳은 친왕파에서 공작가와의 전쟁을 감수하고 지켜 줄 만큼 중요한 영지가 아니다.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라면 당장은 우리 스스로 몸을 지킬 수밖에 없겠군요.”

확실하지 않다. 믿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런 위험 또한 배제할 수는 없었다.

클로드의 말에 가신들의 낯빛은 더욱더 시커멓게 죽어 갔다.

지셀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부러 활기차게 말했다.

“자, 공작가가 어쩌고 하는 건 지금 당장은 중요하지 않고. 곧 데스몬드와 싸워야 하는 게 문제야.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건 다들 이해했지? 그럼 이제 막을 방법을 생각해 보자.”

다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기사는커녕 병사도 거의 없는 펜리스 영지가 어떻게 데스몬드를 막는단 말인가?

클로드가 모두를 대표해서 물었다.

“영주님이 예상하시는 시기는 언제입니까?”

“데스몬드 백작이 움직이는 건 최소 6개월 이상은 걸리겠지. 어쨌든 페르디움에서 나한테 된통 당한 건 사실이니까. 전력을 정비하려면 그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거야.”

병력을 잃은 것도 문제이지만, 페르디움 쪽 일이 꼬인 만큼 아멜리아의 반란에 더 신경 쓸 게 분명하다.

그리고 지셀이 알기로는 몇 달 뒤에 아주 골치 아픈 일이 생길 테니, 6개월 뒤에도 바로 움직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굳이 이런 걸 얘기해서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 줄 필요는 없었다.

6개월이라는 말을 들은 클로드가 갑자기 소심하게 지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고작 반년 준비해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신병 훈련도 안 끝날걸요?”

“그래서?”

“데스몬드 백작이 친왕파까지 무시하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도망가시죠.”

“뭐?”

지셀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잠자코 있던 벨린다가 나섰다.

“전쟁이 일어나면 도망가는 게 좋다는 말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다들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영주도 총관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도망갈 필요가 없다니?

시선이 집중되자 벨린다는 도도하게 콧대를 세운 채 말했다.

“그냥 데스몬드 백작인지 아몬드 백작인지 목만 따면 문제없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런 거 잘해요. 금방 끝내고 올게요.”

벨린다가 어떤 마음으로 말하는지 알기에 지셀은 마음이 조금 짠했다.

상대가 평범한 귀족이라면 별문제 없이 암살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실력도 매우 뛰어난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대영주인 데스몬드 백작은 다르다.

삼엄한 경비를 갖춘 영주성에서 그를 찾는 거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운 좋게 찾아 죽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성에서 빠져나오기는 더욱 어렵다.

벨린다 정도의 실력자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로는 암살이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이지만……. 너무 위험해서 안 돼.”

“참나, 저 혼자라면 힘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카오르와 용병들이 같이 가면 성공할 수 있어요.”

영지 개발이든 전쟁 준비든 남 일이라는 듯 하품이나 하며 듣고 있던 카오르가 화들짝 놀라 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뭐? 나? 내가 왜?”

“당신이 용병들 몇 명 데리고 영주성 앞에서 난리를 피우세요. 당신들한테 시선이 집중될 동안 제가 백작 목을 깔끔하게 따고 올 테니까요.”

“미쳤어? 우리보고 거기서 죽으라는 거잖아!”

“당신네 목숨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그건 값진 희생이라고요! 당신 싸움 좋아하잖아!”

“그런 개죽음 싸움은 하기 싫거든?”

“싸움이 다 똑같지! 뭘 따지는데!”

“아! 너나 가라고!”

둘이 투덕대고 싸우는 사이 이번에는 길리언이 비장한 얼굴로 나섰다.

“영주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저에게 용병들을 당분간 맡겨 주십시오. 제가 전쟁 시기를 최대한 늦춰 보겠습니다. 그사이 전력을 최대한 확충하고 친왕파에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어떻게 하려고?”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상단들을 습격할 겁니다. 일차적으로는 물자 공급이 막히니 준비도 늦어질 거고, 저를 잡기 위해 인력을 빼면 또 그만큼 준비가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 말에 지셀은 빙긋 웃었다.

저런 방법은 전생에 자신도 즐겨 쓰곤 했다. 누가 용병 출신 아니랄까 봐 이런 면은 참 비슷했다.

“그 방법도 나쁘진 않지만……. 그렇게 되면 길리언이 산적 취급을 당하게 될 거야. 나를 섬기는 사람에게 그런 악명이 붙게 할 생각은 없어.”

지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영지를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마음만 받아 두지.”

이유야 서로 다르지만, 어쨌든 벨린다와 길리언 둘 다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영지를 위해 움직이려 했다. 그 점은 치하할 만했다.

두 사람과 다르게 별생각이 없어 보이는 카오르에게 지셀이 물었다.

“카오르는 다른 의견 없어?”

“그냥 쳐들어오면 나가서 싸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제가 제일 앞장서죠. 대신 수당 더 주셔야 합니다.”

“어휴, 이 든든한 새끼.”

당당하고 단순한 태도에 지셀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싸움을 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네 사람을 보고 클로드가 다시 물었다.

“진짜 도망가실 생각 없으십니까?”

“없지.”

“에휴, 내 팔자가 그렇지. 그러면 지금부터 모든 자원을 총동원해서 축성을 준비하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축성이라……. 수성전으로 가자는 건가?”

“그렇습니다. 우리 영지의 가장 큰 이점은 식량 생산량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겁니다. 요새 수준으로 성을 쌓아 놓고 농성하면 친왕파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길리언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성을 쌓더라도 어느 정도 전투 인원은 있어야 할 텐데, 병력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부족한 병사와 기사는 페르디움에 요청하면 됩니다. 징집병들도 좀 더 굴려 보고요. 다들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해야죠.”

가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나온 의견 중에서 가장 안전하고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지셀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일단은 그렇게 하지. 언제든 적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게 지금부터 물자를 비축해 두도록.”

겉으로는 클로드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다들 어느 정도 긴장감은 생긴 거 같네. 당분간은 이 정도 분위기로 끌고 가야겠어.’

클로드의 의견은 현 상황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확실한 대응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공작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의 상상을 뛰어넘는, 적이 절대 예측할 수도 없는 방법을 찾아 움직여야 했다.

어차피 어떤 방법을 쓰든 실패하면 결국 죽는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성공할 가능성을 키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움직여 주지.’

지셀은 적을 가만히 기다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곧 좋은 기회가 온다. 그 틈을 타 데스몬드 백작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 주고 아주 큰 손해를 입힐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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