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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52화 (152/269)

152화 상황이 좀 불편하지? (1)

모두가 한동안 말없이 밀밭을 바라보았다.

싹이 자라는 건 수도로 가기 전에 이미 확인했다.

하지만 이렇게 너른 밭이 가득 찬 광경을 보자, 지셀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은 수확기도 아닌데 저리도 반짝이는 황금빛이라니. 기존의 밀과는 다른 엄청난 성장 속도였다.

지셀은 밀 상태를 꼼꼼히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곧 수확할 수 있겠군.”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아 살짝 푸른색을 띠고 있는 밀 이삭도 남아 있었지만, 대체로 당장 수확을 해도 문제없는 수준이었다.

로웰이 마주 웃으며 답했다.

“네, 곧 1차 수확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준비는 마쳤습니다.”

“좋아, 영지민들에게는 아낌없이 나눠 주도록. 할 일이 많으니 밥은 든든하게 먹여야지.”

“이 정도면 영지민들에게 다 나눠 주고도 남습니다. 내년까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게다가 몇 달 뒤에 다시 수확할 수 있으니 몇 년은 문제없을 겁니다.”

자신만만한 로웰의 말에 지셀이 피식 웃었다.

“비축할 생각 말고 배불리 먹일 생각만 해라. 경작지도 지금보다 몇 배로 늘려야 할 테니까.”

“네? 왜요?”

“그런 게 있다. 성으로 돌아가서 말해 주지.”

지셀이 말머리를 돌리며 클로드에게 말했다.

“클로드, 바로 가신들을 소집하도록. 전체적인 상황도 설명하고, 미흡한 부분과 앞으로 진행할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해야겠다.”

“알겠습니다.”

로웰이 총관 대리를 맡긴 했지만 미진한 일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직 영주와 총관만큼 권위가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클로드가 로웰에게 살짝 물었다.

“헤이, 브로. 형이 말한 건 챙겨 놨어?”

지셀과 클로드가 수도로 가 있는 동안 상단과의 거래도 로웰이 맡게 되었다.

클로드는 이참에 가격 좀 깎는 척하면서 몇 골드라도 좀 챙겨 놓으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었다.

하지만 로웰은 클로드의 질문에 곤란해하며 답했다.

“아, 그런 못된 짓을 어떻게 합니까?”

“아니, 너 나쁜 놈이잖아! 예전에 영지도 엄청나게 착취하고 그랬으면서 왜 이제 와서 착한 척이야? 갑자기 정의롭게 살고 싶어졌어?”

“저 이제 그런 짓 안 한다니까요? 예전에 그거도 다 전 영주가 시켜서 할 수 없이 했던 겁니다.”

“와, 내가 나쁜 놈이었네. 내가 나쁜 놈이야! 20년 무급인데 살짝 용돈 좀 챙기겠다는 게 그렇게 나쁜 짓인 줄은 몰랐네!”

“…….”

로웰은 그냥 무시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놈이랑은 말싸움해 봤자 손해다.

그러자 클로드는 한숨을 푹 쉬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뭐…… 그래도 그동안 열심히 일하고 수고한 거 같으니 상이라도 줘야지.”

대꾸하지 않고 버티던 로웰이 상이라는 말에 혹해서 돌아보고 말았다.

“무슨 상이요?”

클로드가 히죽 웃으며 주먹을 들었다.

“치명상.”

퍼억!

“아악! 왜 때려요!”

클로드가 어깨를 때리자 로웰이 깜짝 놀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교과서 같은 자세였다.

다만 그 자세를 취하다 클로드의 턱을 팔로 쳐 버린 것이 문제였다.

“악! 쳤어? 너 이거 하극상이야!”

“엇? 죄송합니다. 저도 상 하나 드린 셈 치면 안 될까요?”

“되겠냐! 너 이리 와. 죽었어.”

두 사람이 씩씩거리며 허공에 주먹을 휘둘렀다.

바람에 펄럭이는 종이 인형 같은 모양새에 구경하던 벨린다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둘 다 싸움도 못 하면서 저게 뭐 하는 짓이람?”

뒤에서 티격태격하는 목소리를 듣고 지셀은 웃고 말았다.

영지에서나 느낄 수 있는 이런 왁자지껄하고 편한 분위기가 좋았다.

* * *

가신들이 모두 모여, 오랜만에 돌아온 영주에게 각자가 맡았던 업무의 진척 사항을 보고했다.

가장 먼저 총관 대리를 맡았던 로웰이 말했다.

“밀이 다 자랐으니 앞으로 식량 수급은 문제없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예상되는 수확량이 엄청나서 상단에서 사 오고 있는 곡물은 양을 점점 줄여 나갈 예정입니다.”

로웰이 말을 마치자 가신들의 얼굴에도 뿌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 안 되는 영지민들조차 제대로 먹여 살리지 못했던 영지였다.

그렇게 가난했던 영지가 지금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식량을 확보하게 되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벨린다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물었다.

“그럼 그게 어느 정도란 얘기예요?”

“이번 수확량만 해도 북부의 다른 영지 몇 개는 합쳐야 비슷한 수확량이 나올 정도입니다.”

“에이, 북부의 다른 영지는 다 가난하잖아요? 경작지도 별로 없어서 다들 식량을 수입하는 형편인데, 그런 영지들 더해 봐야 얼마나 된다고.”

펜리스뿐만 아니라 북부의 다른 영지도 형편이 그다지 좋지는 않다. 레이폴드 영지가 이례적으로 잘 사는 편이었다.

북부의 영지들은 농사보다는 산과 숲, 강의 자원들을 이용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벨린다가 그런 부분을 지적하자 로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금 더 피부에 와닿게 설명해 주었다.

“조금만 더 경작지를 늘리면 대영지인 레이폴드에 버금갈 겁니다. 아직 총 수확량 자체는 조금 부족하지만……. 단위 면적 생산량에 따른 인구 부양력은 아마 저희가 왕국에서 최고일 겁니다.”

“오…….”

그 말에 벨린다가 눈을 크게 뜨고 감탄했다.

아멜리아의 아버지가 다스리는 레이폴드 영지에는 북부에서 가장 큰 평원이 자리하고 있다.

레이폴드는 거기에서 생산되는 엄청난 식량 덕분에 대영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구는 10분의 1도 안 되는 펜리스 영지의 수확량이 레이폴드 영지의 식량 생산량과 비교될 정도라니!

아직 그쪽 생산량보다는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영토의 크기가 작으니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벨린다는 이제야 한시름을 놓고 어깨에서 힘을 뺐다.

‘아유, 우리 도련님이 정말 장한 일을 했어. 정말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었을까?’

그간 지셀을 지켜보며 내내 마음을 졸이고 살아왔다.

그가 벌인 일들이 전부 성공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뭐 하나 정상적인 게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식량 문제도 해결됐고 화장품으로 돈도 꾸준히 벌고 있으니 또 이상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터였다. 걱정은 끝이었다.

‘펜리스는 쭈욱 이대로 발전하기만 해도 될 거고. 페르디움까지 물려받으면 우리 도련님도 대영주가 될 수 있겠지? 아아, 돌아가신 우리 마님이 보시면 얼마나 좋아할까? 제가 이렇게 도련님을 잘 키웠어요. 호호호.’

벨린다뿐만 아니라 다른 가신들도 다들 조금씩 마음을 놓았다.

지금이야 아직 사업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관리하느라 바쁘지만, 시간이 지나면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안도하던 가신들은 이어진 지셀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뭔 소리야? 식량 수입을 왜 줄여? 내가 충분하다고 할 때까지 계속 사 두라고 했잖아?”

지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타박하자 로웰이 깜짝 놀라며 반박했다.

“네? 지금 충분한데요? 이번에 지원받은 것까지 치면 절대 부족할 리가 없습니다. 이번에 수확하면 오히려 엄청 많이 남을 겁니다.”

“아니야, 내가 안 충분해. 그러니까 쉬지 말고 계속 사 와.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아, 알겠습니다.”

단호한 명령에 로웰이 난처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을 미친 듯이 긁어모으는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든든하게 쌓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일단은 넘어갈 생각이었다.

썩을 정도로 과하게 쌓인다 싶으면 그때 말려도 늦지 않는다.

가신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서로 눈짓했다.

지셀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추가 거주지 건설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지?”

로웰은 알포이와 마법사들을 힐끗 바라보고는 답했다.

“일정이 약간 늦어지긴 했지만 앞으로 한 달 이내에 끝날 예정입니다. 기존 마을에 연결된 도로와 수로의 정비는 최우선으로 끝냈습니다.”

“사고는 없었고?”

“네, 용병들이 조를 나눠 순찰하고 있어서 치안 유지에도 문제는 없었습니다.”

영지민들의 수도 많지 않을뿐더러, 다들 이전의 생활고를 다시 겪고 싶지는 않은 터라 조심스럽게 주변 눈치를 보며 살고 있다.

사고를 칠 만한 놈은 이웃 주민들이 알아서 관리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사고를 치고 싶어도 못 친다.

“다른 문제는 없나?”

“영지민들의 생활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 정도일까요. 급한 대로 상단에서 생필품을 구매하려고 조율하는 중이었습니다. 병원과 도서관 등의 복지 시설도 전문 인력을 초빙해서 점차 수를 늘려갈 계획입니다.”

식량과 거주지만 마련해 줬다고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는 삶의 질을 올릴 수 있는 물건과 시설들이 필요했다.

로웰은 그래도 문제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영주님이 보급품을 많이 받아 오셨으니 당분간은 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이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부분이니까요.”

영지 상황 전반에 관한 보고가 끝나자, 가신들도 앞다투어 자신이 맡고 있던 일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룬스톤이 조금 들기는 했지만……. 목초지를 유지하는 데도 별문제 없었습니다. 곧 말들을 사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방과 곡물 창고, 제빵소 등도 거의 완공되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각 마을에 공무를 볼 수 있는 관청도 지었습니다.”

가신들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회생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영지가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이제 겨우 다른 영지와 비슷한 수준으로 구색을 갖추게 되었을 뿐이지만 가신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모든 보고가 끝나고 나서도 지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그래, 최소한의 모양새는 갖춰진 것 같군.”

다른 이들에게는 지금까지의 변화만으로도 기적이었지만 지셀이 보기에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다들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말하고 있지만, 실상 그들이 손댄 건 영주성이 있는 도시와 그 인근의 마을 몇 개가 전부다.

기반 시설이라고 해도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시설만 최소한으로 갖춘 정도였다.

이제야 겨우 사람 사는 꼴 비슷해졌다는 뜻이다.

‘부족해. 한참 부족하다. 이래서는 얼마 버티지도 못할 거야.’

객관적으로 보면 펜리스 영지는 여전히 작고 가난하고 귀여운 영지일 뿐이다.

굳이 장점을 따지자면 마법을 이용해서 식량 수급률을 높였다는 것 정도?

다른 사람들은 이전 모습과 비교하며 만족하는 모양이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는 지셀 자신이 제시하는 목표에 맞춰 모두가 한마음으로 움직여야 했다.

“다들 수고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수도에서 얻은 성과를 공유하겠다.”

그렇지 않아도 지셀이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돌아온 걸 모두가 확인한 뒤였다.

사람들은 그간 고생한 데 대한 치하와 보상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브랜포드 후작님이 후견인이 되어 주시기로 했다. 나와 아버지 또한 친왕파의 일원이 됐으니 그리 알고 있도록.”

“오오오!”

예상치 못했던 희소식에 가신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이런 시골에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로 권세가 강력한 귀족이다.

그런 자가 영주의 후견인을 자처한다면 이제 북부에서 펜리스 영지를 함부로 건드릴 자는 없을 터였다.

페르디움처럼 주변 영지에서 공격해 올까 봐 영지가 발전할수록 걱정이 커졌던 가신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또한 브랜포드 후작 영애께서 30만 골드를 화장품 사업에 투자해 주셨다. 화장품 또한 수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으니 곧 왕국 전역으로 뻗어 나갈 거다.”

“오오오!”

그게 끝이 아니라는 듯 지셀이 말을 이었다.

“곧 인구가 대규모로 펜리스 영지에 이주할 것이다. 친왕파에서 우리 영지를 위해 지원해 준 사람들이다.”

“오오오!”

가신들은 연이은 희소식에 감탄하기 바빴다.

세수와 군사력의 기반이 되는 만큼,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인구는 중요한 만큼, 단기간에 쉬이 늘릴 수도 없는 자원이었다.

‘그런 자원을 대규모로 지원받았다니!’

가신 중 하나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이주민이 얼마나 들어오게 됩니까?”

“최소 5만 이상이다.”

“아하하하,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가신들은 지셀이 평소처럼 농담하는 줄 알고 웃으며 받아쳤다. 진담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많은 수였다.

하지만 지셀도, 클로드와 벨린다도 웃음기 없이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농담을 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가신 중 하나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리며 지셀에게 말했다.

“그, 그……. 5만 명이라는 말씀이 진짜입니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뭐가 말이 안 되는데?”

“지금 우리 영지는 그렇게 많은 인원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한 번에 다 들어오는 게 아니니 괜찮아. 몇천 단위로 나눠서 들어올 거다.”

“그, 그래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장 그들이 지낼 집도 없고 식량도 부족할 겁니다.”

지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는 말이네. 그러면 이제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알겠지?”

가신들이 영주를 말려 보라는 듯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클로드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모두 갑작스러운 소식에 많이 놀라셨죠? 그 마음 잘 압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저도 뭐 어떻게 막을 수가 없어요.”

남의 일처럼 말하는 클로드를 보며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영지의 총관이라는 놈이 왜 저렇게 태평하지?’

사람들이 눈총을 주거나 말거나 클로드는 어깨를 한번 으쓱인 뒤 말을 이었다.

“뭐, 지금과 다를 거 없습니다. 규모만 조금…… 많이 커졌을 뿐이죠. 지금처럼 집을 새로 짓고 경작지를 늘리고…… 복지 시설들도 더 짓고…… 이거 말고 뭐 더 있겠습니까? 그렇죠?”

클로드가 동의를 구하듯이 지셀을 돌아보았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거하고 같이 진행해야 할 일도 있다.”

“네? 그게 뭔데요? 이거 말고 뭐 또 할 게 있습니까?”

“그래, 전쟁을 준비해야 해.”

그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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