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돌아오니까 좋네. (3)
바네사는 지셀을 보자마자 다시 통곡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흐어엉. 제가 건물을 다 부수고 룬스톤을 잔뜩 날리고 영지에 큰 손해를 끼쳐서……. 으어엉.”
“괜찮아,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다친 사람도 없으니까 정말 괜찮아. 하하하하.”
지셀은 여전히 기분 좋게 웃었다. 지금 영지에 6서클 마법사가 생겼는데 그까짓 건물이 대수인가?
6서클 마법사를 영입하려면 이딴 건물 수백 채를 지어 줘도 부족하다.
그쯤 되는 실력자들은 돈만으로는 유혹할 수 없었다.
역시 적염의 마탑 역사상 최고의 재능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
“흐어엉, 아니에요. 영지도 가난하고 돈도 없어서 다들 힘들게 사는데……. 한 푼이라도 아껴서 영지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데……. 이제 저 밥도 하루에 한 끼만 먹을게요……. 흐어어엉.”
바네사의 말이 이어질수록 지셀의 웃음이 흐려졌다.
“아니, 이제 그 정도로 가난하진 않아.”
“제가 평생 빨래라도 열심히 해서 꼭 갚을게요. 흐어어엉…….”
“아니, 네가 빨래를 하면 그게 더 손해야.”
정론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네가 빨래를 하면 빨랫감도 망가진다’라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역시 그렇죠? 저 같은 건 죽어야 해요. 죽여 주세요. 으어어엉.”
지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네사는 다 좋은데 이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과 소심함이 문제였다.
워낙 무시당하고 힘들게 살아와서 그런지 작은 실수에도 무척 민감하다고나 할까?
벨린다 같은 성격이었으면 ‘내가 6서클인데 이까짓 건물이 무슨 대수예욧! 돈이나 더 내놔욧!’ 이러면서 도도하게 굴었을 텐데.
하기야……. 이번에 친 사고는 예전처럼 허드렛일이나 하는 신분이었다면 평생을 일해도 못 갚을 만한 큰일이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갔다.
눈물 콧물 쭉쭉 빼면서 계속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그녀를 지셀이 일으켜 세웠다.
“정말 괜찮다니까. 그보다 벌써 6서클에 오르다니 대단해. 그게 나한테 더 큰 도움이야. 연구실은 새로 지어 줄 테니 너는 돈 걱정하지 말고 계속 수련에만 집중해.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알았지?”
“흐어엉, 영주님!”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려온 칭찬에 바네사는 감격의 눈물을 떨구며 지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몇 번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던 지셀은 살짝 몸을 떼고 그녀를 훑어보았다.
햇빛을 언제 본 건지 창백한 얼굴에 묻은 시커먼 검댕이 유독 눈에 띄었다.
옷에도 여기저기 때가 진 것이, 그녀가 방구석에 틀어박혀 연구와 수련에만 매진했다는 티가 확 났다.
퀴퀴한 냄새가 눈에 보이는 것 같은 기분에 지셀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바네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련도 좋은데 이제 6서클도 되었으니 좀 씻고, 산책도 좀 하고.”
“네, 네, 넵!”
그제야 제 몰골을 깨닫고 바네사가 부끄러워하며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지셀은 로웰을 돌아보며 말했다.
“연구실은 더 튼튼하고 넓게 새로 짓도록 해. 큰 공터에 마법을 사용할 더미도 마련해 두고.”
“알겠습니다. 여기 터가 잘 잡혔으니 여기에 다시…….”
그러자 지셀이 로웰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속삭였다.
“멀리, 멀리 지어. 영주성에서 더 떨어트려서, 주변에 사람도 없고 안전한 곳으로.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로웰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지셀은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바네사가 6서클인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하도록 해. 소문나서 좋을 건 없으니까.”
모두가 넋이 나간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벌써 6서클의 경지에 오를 줄이야.
주변의 측근들은 놀라면서도 지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영지민들은 모두 멀찍이 떨어져서 제대로 대화를 듣지 못했으니 비밀 유지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건 정말 비밀로 해야 해.’
‘대영주들이나 거느리는 6서클 마법사가 생기다니.’
‘남들이 모르는 강력한 카드다!’
6서클 마법사는 극히 드물다. 평생 마법에 매진해도 6서클은커녕 5서클에도 이르지 못하고 죽는 자가 부지기수다.
일단 오르기만 하면 대영주들의 전속 마법사는 당연하고 마탑의 탑주 자리까지도 넘볼 수 있는 경지다.
비록 바네사는 마력이 부족한 반쪽짜리 6서클이지만, 그것도 활용하기 나름이다.
아마 멋모르고 시비를 거는 놈은 기습적으로 강력한 불맛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입을 단속시키고 정리를 하는 와중에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불났어? 불 어떻게 됐어? 무슨 다른 마법도 시전 됐던 거 같은데?”
호들갑을 떠는 알포이에게 지셀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여, 알포이 오랜만이다. 일 잘하고 있었지?”
“으……. 영주님 오셨습니까…….”
알포이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몸을 피하자 지셀이 로웰에게 물었다.
“마법사들한테 시킨 일은 잘되고 있었나?”
로웰은 마법사들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자질을 시작했다.
“크흠, 갈수록 속도가 늦어져서 일정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래?”
알포이는 허겁지겁 손을 저으며 외쳤다.
“아니야! 열심히 했어! 그냥 몸이 좀 안 좋았을 뿐입니다!”
“괜찮아. 사람이 힘들면 좀 쉴 수도 있지.”
“어……? 정말?”
지셀은 정말 괜찮다는 듯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쉬었던 만큼 더 열심히 하면 되지. 앞으로 할 일이 아주 많거든.”
알포이는 갑자기 밀려오는 불안한 예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영주가 그냥 이렇게 넘어갈 사람이 아닌데?
거기다 할 일이 아주 많다는 말도 매우 수상하다.
설마 지금 하고 있는 공사들 말고 또 뭐 시킬 게 있다는 건가?
지셀은 불안해하는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각오들 하라고.”
* * *
지셀은 영주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용병들의 주둔지부터 찾아갔다.
“대공자님, 돌아오셨군요!”
용병들을 교육하고 있던 란돌프는 무척이나 반색하며 지셀을 맞이했다.
그의 곁에는 퍼거스가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허허, 도련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지셀은 깜짝 놀라며 답했다.
“아니, 내가 펜리스 영지에서는 편하게 쉬고 있으라고 했잖아. 왜 주둔지까지 왔어?”
“기사단장님을 도와드리고 있었지요.”
건강 문제로 페르디움에서 요양하고 있던 퍼거스는, 란돌프가 펜리스 영지로 올 때 함께 왔다.
체력이 따라 주지 않아 직접 훈련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나이에 어울리는 지혜를 활용해 용병들의 훈련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지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당분간 쉬고 있어. 죽으면 부활하기 쉽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허허, 괜찮습니다. 도련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간 지셀이 자주 페르디움에 들러 약을 챙겨 준 덕분에, 퍼거스도 전생에 비해 건강이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지셀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더 쉬었으면 좋겠는데.’
지셀이 몇 번이고 설득했지만 늙은 기사는 고집을 쉬이 꺾지 않았다. 지셀은 한숨을 내쉬고는 란돌프에게 늦은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내긴요! 이 꼴통 놈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란돌프는 지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낯빛은 거무죽죽하게 죽어 있었다.
군기가 잡혀 있는 병사와 기사들만 상대하다가 용병들을 맡으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용병들은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건 기본이고 기본 상식 자체가 결여된 놈들이 많았다.
지셀이 휘어잡았기에 일단 따랐던 거지 태생이 그른 놈들이었다.
전술 훈련을 해 봐도 지셀이 훈련시킨 돌격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도대체 이런 놈들을 데리고 어떻게 전쟁을 치르신 겁니까?”
“왜요? 문제가 많습니까?”
“많은 정도가 아닙니다! 최소한의 군기도 안 잡힌 놈들입니다!”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상관의 명령에 잘 따르는 것이다.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군인의 미덕이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하나같이 제멋대로 굴며, 서로 자신들이 아는 게 옳다고 우기기 바빴다. 지금껏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옳다는 증거라고 여기는 것이다.
“꼭 필요한 기본 지식은 어떻게든 욱여넣었지만, 더는 무리입니다. 아, 진짜 죄다 죽이고 싶어.”
란돌프는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하소연이 끝나기도 전에 용병들이 우르르 나와 지셀을 반갑게 맞이했다.
“살았다! 영주님이 왔다!”
“아, 지겨웠단 말입니다!”
가만 보니 죄다 몸 곳곳에 멍이 들어 있었다.
너무 말을 안 들으니 란돌프가 쥐어박으면서 가르친 결과였다.
“아무튼 말씀하신 건 얼추 가르쳤으니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란돌프는 치를 떨며 빨리 돌아가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지셀은 조금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이왕 맡은 거 좀 더 맡아 달라고 하려고 했더니……. 이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해야겠네.’
그래도 확인해 보니 기본적인 제식과 최소한의 군사적 지식은 가르쳐 놓았다.
새로 모집한 병사들의 기초 훈련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제일 귀찮은 부분은 란돌프가 다 처리해 준 것이 맞았다.
“아무튼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대가는 섭섭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지셀의 말에 란돌프는 제법 자랑스러워하며 답했다.
“글을 모르는 놈들도 조금 가르쳐 놨습니다.”
글은 퍼거스가 가르치긴 했지만, 란돌프는 자기가 가르친 것처럼 말하면서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어쨌든 교육 시간 분배는 란돌프의 소관이니 아예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그거 잘됐군요. 최소한 글은 알아야 하니까요.”
지셀은 용병들에게 글도 꼭 가르쳐 놓으라고 란돌프를 붙잡고 당부했었다.
아무리 명령대로 움직이는 군인이라도 최소한 읽고 쓸 줄은 알아야 더 폭넓은 작전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글을 모르는 용병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던 것도 있었고.
몰려나온 용병 중에서 ‘오줌싸개 고든’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도 이제 글도 잘 쓰고 다 읽을 수 있습니다!”
언제나 글을 몰라 계약에 손해를 봤던 고든으로서는 자랑스러워할 만했다.
“오, 그래? 축하한다. 이제 계약서도 혼자 읽을 수 있나?”
지셀이 웃으며 묻자 고든은 바지춤에서 작은 책을 하나 꺼내며 흔들었다.
“그럼요! 지금은 여기에 저만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 소설이라도 쓰는 건가. 내용이 궁금한데, 좀 보여 줄 수 있어?”
글을 얼마나 잘 익혔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자 고든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건 아무도 보여 주지 않을 거예요.”
“뭐, 그래라.”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고든 옆에 있던 용병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거 도대체 뭔데. 영주님도 궁금하시다는데 한번 보자. 매일 몰래 뭘 쓰고 있는 건데?”
“아, 됐다고. 안 보여 줄 거라고.”
“좀 보자니까.”
옆에 있던 용병이 고든의 팔을 잡고 책을 뺏으려 했다.
물론 근육으로 가득한 고든이 쉽게 뺏길 리가 없었다.
둘이 다투기 시작하자 그게 재미있어 보였는지 몇몇 용병들이 끼어들었다.
“아씨! 놓으라니까! 너희 다 죽는다!”
힘이 센 고든도 대여섯 명이 달라붙자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못 보게 하려 발버둥을 쳤지만 뺏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으아아!”
고든은 괴성을 지르며 팔을 마구 휘젓다가 책을 놓치고 말았다.
툭.
책이 떨어진 곳은 공교롭게도 지셀의 코앞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지셀은 책을 들어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았다.
[4월 2일 날씨 말금]
오늘도 기사단장 란돌푸가 나한테 일해라 절해라 잔소리를 한다. 정말 사생활 치매가 심각하다.
내 실력도 일치얼짱하고 있는데 계속 잔소리를 하니 진짜 더 이상은 한개다.
곱셈 추위가 와서 추운데 자꾸 눈을 부랄이고 훌련을 하라고 화낸다.
어디서 수박 겁탈기로 배워 와서 자꾸 뭘 가르치려고 한다. 역시 스승 삶기 좋은 인물은 아니다.
내 장례 희망은 훌륭한 기사가 되는 거시지만 저런 골이 따분한 성격의 사람은 되지 않을 거시다…….
오늘의 일기 끗.
탁.
지셀은 바로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남의 일기장을 계속 읽을 수는 없었다.
사생활 침해인지 사생활 치매인지 어쨌든 거기에 해당하는 행동이다.
‘그래도 글공부를 하긴 했네.’
맞춤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였지만 이 정도라도 읽고 쓰게 된 게 어디인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예전 상태와 비교하면 이 정도도 대단한 거다.
묘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 어느새 용병들을 무지막지하게 때려눕힌 고든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돌려주세요!”
“어, 그래……. 여기.”
지셀은 순순히 일기장을 건네주었다.
“읽으셨죠?”
“……아니.”
“읽으셨잖아요! 남의 일기장을 읽는 게 어디 있어요!”
“……미안하다.”
고든은 여전히 울상을 지으며 일기장을 급히 바지춤에 다시 넣었다.
란돌프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는 게 욕을 잔뜩 적어서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지셀은 모른 척 말머리를 돌렸다.
고든이 저 정도로 익혔으면 나머지는 확인할 필요 없겠지.
“다른 곳도 확인하도록 하지.”
임시 책임자였던 로웰이 앞장서서 영지 곳곳을 안내했다.
영지민들이 거주할 집들과 기반 시설 등이 확연하게 늘어나 있었다.
여전히 공사가 끝나지 않은 건물도 많았지만, 영지 개발은 단기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니 익숙해져야만 했다.
“좋아, 일단 이후 공사 계획은 성에 가서 다시 회의하도록 하지. 이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가 보자.”
지셀의 말에 일행들은 다시 외성을 빠져나왔다.
가장 앞장서 달리던 로웰은 목적지에 도착하자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말씀하신 대로 됐습니다.”
그간 자리를 비우고 있던 지셀의 측근들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 우와…… 장난 아니네?”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직접 봐도 믿을 수가 없네요.”
다들 눈을 비비며 보이는 게 진짜가 맞는지 재차 확인했다.
넘실거리는 황금빛 물결.
사람의 키보다 더 큰,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밀들이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