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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43화 (143/269)

143화 정말 좋은 기회라니까요? (1)

연회가 끝난 다음 날부터 일이 빠르게 처리되었다.

브랜포드 후작의 명령을 받고 각 지역의 노예상들이 지셀을 찾아왔다.

이종족 노예를 취급하는 만큼 거물로 꼽히는 자들이었지만, 지셀 앞에서는 하나같이 쩔쩔맸다.

“그런데…… 정말 이만한 물량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종족 노예에 관심이 많으신 건 알겠으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자금 회전이 막히기라도 하면 파산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종족 노예들은 자존심이 세서 관리하기도 힘드실 겁니다.”

사는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오히려 파는 사람이 걱정해 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답했다.

“장사꾼들이 손님 걱정하는 모습을 다 보는군. 돈은 문제없이 준비하고 관리도 알아서 할 테니 걱정 안 해도 된다.”

노예상들은 서로를 곁눈질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이런 애송이와 큰 거래를 하는 건 금기인데…….’

‘브랜포드 후작이 밀어주는 사람이야. 거부할 방법이 없어. 친왕파 귀족들 대부분이 지지한다잖나.’

지셀은 우물쭈물하는 노예상들을 흘겨보다 경고를 건넸다.

“한 명도 빠짐없이 잘 데리고 와야 할 것이다.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알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지요. 대신 대금은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금액이 워낙 크니 살짝 불안해서 말입니다.”

“잔금은 약속한 기한에 꼬박꼬박 줄 테니 사람이나 잘 보내라.”

지셀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아무리 화장품이 잘 팔리고 있어도 당장은 그 엄청난 금액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액이 금액이다 보니 노예상들도 담보 없이는 할부를 못 받아 주겠다고 버텼다.

“페르디움 영지가 담보로 잡힌 걸 잊지 마십시오.”

“알겠다니까. 일이나 확실히 처리하도록.”

“페르디움 백작님에게 허락은 받은 거 맞으시죠?”

지셀은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거기 후계자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만 가 봐라.”

“크흠,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영지에서 뵙지요.”

“아, 드워프들부터 최대한 빨리 보내는 거 절대 잊지 마. 특히 내가 말한 드워프는 무조건 안전하게 데리고 와야 해.”

“네, 네. 최우선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멀리 안 나간다.”

노예상들은 찝찝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젠장, 일이 잘못되면 브랜포드 후작가에 항의하고 책임을 지워야 할 텐데…… 받아 주긴 하려나?’

‘담보로 잡은 영지도 북부 끄트머리의 척박한 곳 아닌가? 쪼개서 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프군.’

‘죄다 팔았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노예상들이 물러가자 벨린다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페르디움 백작님이 알면 기절하실 거예요.”

“괜찮아. 아버지는 나 아니어도 항상 곤란한 상태니까.”

벨린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노예 사는 거야 그렇다 쳐도요. 이주민들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하냐니?”

“최소 수천이고 만 단위가 넘어갈 수도 있잖아요. 자리 잡을 때까지는 의식주를 전부 우리가 해결해 줘야 하는데, 거기도 천문학적인 돈이 들 거라고요.”

“괜찮아. 그때 밀 자라는 거 봤잖아. 다 감당할 수 있어.”

“아니, 사람이 빵만 먹고 살아요? 다른 것들은 어떻게 하려고요!”

“초반에 자리 잡는 동안은 돈이 들기야 하겠지. 그래도 사람이 많아지면 시장도 금방 활성화될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됐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갑자기 이주당한 사람들한테 돈이 어디 있어서 시장에 가겠어요.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데요? 일을 해야 돈을 벌고 소비를 하죠.”

“당장 돈이 급한 사람들은 지금처럼 영지 내 시설물 공사에 투입하면 돼. 그리고…….”

“그리고요?”

“건장한 남자들은 죄다 군인으로 만들 거야. 우리 영지는 상비군이 무척이나 부족하니까. 이러면 문제없지?”

“헐…….”

벨린다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었다.

남는 사람은 죄다 군인으로 만들겠다니, 스케일이 보통이 아니다.

벨린다는 클로드를 붙잡고 물었다.

“저거 말이 되는 거예요? 진짜 돼요?”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격하긴 하지만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이 시대에는 먹여 주고 재워만 줘도 군인을 할 사람이 널려 있으니까.

다들 그럴 돈이 없어서 시도를 못 하는 것뿐이었다.

“룬스톤과 화장품 수익을 죄다 몰아넣으면 가능하긴 합니다. 초반에 어느 정도 경제가 활성화될 때까지만 버티면 알아서 잘 돌아가겠죠. 다만…….”

“다만?”

“돈을 버는 족족 다 쓰게 될 테니까 문제죠. 몇 년간은 재정이 빠듯할 거예요.”

“역시 그렇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늘어날 텐데 뭐가 그렇게 급해서.”

클로드는 턱을 좀 긁적이다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뭐……. 전쟁을 대비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전쟁이요?!”

벨린다가 크게 외쳤다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작게 다시 물었다.

“전쟁이라뇨? 누구랑? 누가 왜 오는데요?”

“음, 쳐들어올 만한 데는 많죠. 전에 얘기를 들은 데스몬드가 복수전을 걸어 올 수도 있고…… 다른 영지에서 우리 영지에 눈독을 들일 수도 있고요.”

벨린다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데스몬드야 그렇다 쳐도 다른 곳은 왜요?”

“식량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영지를 최대한 봉쇄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생산량이 확 늘었다는 소문이 퍼질 겁니다. 그러면 그걸 노리는 사람도 늘어나지 않겠습니까.”

“하긴, 룬스톤을 처음 얻었을 때도 비슷한 이유로 전쟁 준비를 했었죠.”

클로드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지셀을 슬쩍 훔쳐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마 제 생각이 맞을 겁니다. 영주님이 뜬금없이 누구를 먼저 공격하진 않을 거잖아요?”

“그럼요, 우리 도련님 그런 사람 아니에요.”

“에이, 이유도 없이 그러면 깡패죠. 어울리긴 하지만. 하하하하.”

“다 들린다, 노예야.”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벨린다와 웃고 떠들던 클로드는 그 눈빛에 화들짝 놀라 자리를 피했다.

지셀은 혀를 쯧쯧 차다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예산이 너무 빠듯하긴 해. 이 상태로는 다음 계획을 시작하기 어려워. 룬스톤도 따로 쓸 데가 있으니 다 팔아 버릴 수도 없고.’

다음 계획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필요한데 지금 상태로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조금 더 빠르게 목돈을 만들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노예상들도 만났겠다, 더 이상 수도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화장품 판매도 자리가 잡혔으니 영지로 돌아가서 다른 돈벌이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꼬이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야, 비켜 봐!”

“어허, 내가 먼저 왔다니까!”

“당장 안 비켜?”

까마귀 저택 입구는 화장품을 사러 온 손님들로 인산인해였다.

연회가 끝난 뒤부터 점점 찾아오는 자들이 많아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저택 안에 손님을 다 들이지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펜리스 남작이 브랜포드 후작 영애의 병을 치료했다면서요?”

“그게 다 그 화장품 효과라는 말이 있던데요.”

“어머, 그건 빨리 사야 해!”

소문을 듣고 수도에 사는 귀족뿐만 아니라 지방 영주들과 발 빠른 상단들까지 저택에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귀족 가문의 하인들만 찾아왔기에 그래도 어느 정도 통제가 되었지만, 성격 급한 귀족들이 직접 오고 난 뒤부터 문제가 커졌다.

그들은 살면서 줄을 선다든지, 순서를 매긴다든지 하는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족속들이었다.

줄? 그게 뭔데? 먹는 거야?

“어허, 지금 누구 앞을 막는 게야!”

귀족의 호통 소리 한 번에 줄을 서던 하인들이 겁을 먹고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자기 하인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귀족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렇게 찾아온 귀족이 하인을 내쫓고, 그 주인들이 또다시 찾아오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클로드가 앞에 나서서 사람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주, 줄을 서시오! 줄을!”

아무리 외쳐도 자존심 강한 귀족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차라리 계급이라도 차이가 나면 그 순서대로 줄을 세우련만, 계급도 영향력도 비슷한 귀족 사이에서는 그런 방식도 통하지 않았다.

왕국 전역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귀족들이 찾아온 탓에 위아래를 나누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몇몇 하급 귀족들은 서로 눈을 부라리며 말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거, 내가 먼저 왔소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먼저 왔는데? 눈은 집에 두고 온 거 아니요?”

“뭐라고?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고 떠들어! 날 건드리면 보이어 백작님께서 가만 있지 않으실 거다!”

“감히 누구 이름을 팔아? 너야말로 브롬슨 백작님께 혼쭐나기 싫으면 얌전히 꺼져!”

이런 식으로 아는 사람 이름을 팔아 가며 말싸움을 벌이는 사람이 하루에도 몇 명이나 나타났다.

말싸움만 하는 놈들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귀족들은 저택 앞에서 상대를 보자마자 바로 칼싸움을 벌였다.

“너 오늘 잘 걸렸다. 이거 네가 먼저 시비 건 거야. 명분은 나한테 있다.”

“허어, 네놈이 드디어 죽을 날을 고른 모양이구나! 좋은 날이로다!”

차차창!

애꿎은 호위 기사들만 주인의 명령에 못 이겨 서로에게 검을 휘둘렀다.

“싸움이다! 싸움!”

이런 재미있는 구경을 사람들이 놓칠 리가 없다.

화장품을 살 생각이 없는 인근의 사람들까지 모조리 저택 앞에 몰려와 싸움 구경을 시작했다.

“크, 큰일 났습니다. 저택 앞이 난장판이 됐습니다. 도무지 사람들을 들일 수가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폭동이 날 겁니다.”

클로드가 다급하게 지셀을 찾아와 알렸다. 지셀도 당황해서 얼른 저택 앞으로 나가 보았다.

“어라……. 이건 계획에 없던 일인데?”

저택의 입구는 혼돈 그 자체였다.

싸우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사람들을 따라온 동네 똥개들까지 섞여서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전쟁터도 이 정도로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앞에 좀 비켜 보시오! 길 좀 막지 말라고!”

“내가 먼저 왔다니까! 아, 밀지 마!”

왈왈왈! 컹컹!

“야!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멍하니 그 광경을 구경하던 지셀은 헛웃음을 지으며 감탄했다.

“와우, 진짜 개판이네.”

클로드는 진이 쪽 빠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해서 일단 문은 닫아놨습니다. 지금 문을 열면 저택이 그대로 저놈들한테 점령당할 겁니다. 화장품도 그냥 들고 갈 거고요. 이제 어떻게 하죠?”

“음…….”

지셀도 해결하기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성질대로 죄다 쥐어팰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 영지로 돌아가야 하는데.”

지셀이 중얼거리자 클로드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상태로요? 지금 돌아갔다가는 아예 저택이 다 털려 버릴 겁니다. 사용인들로는 막을 수가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지?”

“남아서 어떻게든 관리해야죠.”

“아, 얼른 돌아가야 하는데.”

“말이 안 통하네. 지금 우리도 감당을 못하고 있다니까요. 사용인들이 버티겠어요?”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감당이 안 되면 감당이 되는 사람한테 맡겨야지.”

“네?”

“당분간 장사 접자.”

“그게 무슨…….”

클로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은 저택의 한쪽 벽에 훌쩍 뛰어 올라가 크게 외쳤다.

“당분간 판매를 중지합니다! 모두 돌아가세요! 며칠 뒤에 다시 열겠습니다!”

그 말에 몰려 있던 귀족들이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요!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오늘 꼭 사 가야 한다고!”

“펜리스 남작! 나요! 나! 연회에서 봤지 않소이까?”

“펜리스 남작! 이러시면 안 되는 거요! 우리 쪽만이라도 먼저 사게 해 주시오!”

지셀이 나타나자 오히려 더 소란이 커졌다.

물론 귀족들의 항의에도 지셀은 눈 하나 깜빡 않고 외쳤다.

“야! 정문 아예 막아! 오늘 장사 접는다!”

클로드를 비롯한 측근들이 당황스러워하며 서로 눈을 마주쳤다.

지금 한창 물이 올랐는데 손님들을 이렇게 다 내쫓으면 무슨 뒷말이 나올지 몰랐다.

“저, 영주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많은 손님을…….”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지셀이 짜증 섞인 어조로 말을 끊었다.

“뭐 해? 빨리 문 다 막아.”

‘아, 저거 또 뭐 때문에 저러는 거야?’

클로드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용병들을 부렸다.

혹시 소동이 일어나면 길을 막으려고 준비했던 나무판자와 수레로 저택의 입구를 단단히 막았다.

쿵! 쿵!

정문의 창살이 죄다 가려져 안이 보이지도 않게 되자, 귀족들은 빽빽대며 항의했다.

“이건 우리를 무시하는 처사외다!”

“왜 안 판다는 거요!”

“빨리 문을 여시오! 나랑 얘기 좀 합시다!”

하지만 막힌 문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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