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기다리고 있어라. (5)
라울은 살기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자리에 같이 있던 남자가 그렇게 말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상대는 왕국 최고의 실력자니까.
라울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실력은 어느 정도인 거 같나?”
“정확히는 모르겠다.”
“당신이 상대 실력을 가늠하지 못한다고?”
라울이 되묻자 남자가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었다.
“뭔가 어긋난 느낌이었다.”
“어긋난 느낌이라니?”
“움직임과 호흡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아. 그런데 그냥 보면 또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으니…….”
“그래서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남자는 기억을 되짚어 보고는 툭 내뱉었다.
“전쟁에서 직접 활약했다는 말은 진짜인 거 같다.”
“으음…….”
라울은 턱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한 놈 실력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당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아니, 확실해. 전쟁에서 활약하기에는 충분하다. 육체와 마나가 부족해도 기교가 뛰어나면 보완할 수 있으니까.”
그 말에 라울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지금 싹을 밟았어야 했나? 아직은 그렇게까지 명성이 높지도 않으니 수습할 수 있었을 거 같은데.’
죽이면 분명 친왕파 귀족들이 난리를 피웠겠지만, 명분 있는 결투라고 포장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자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고 하면 델파인 공작도 이해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그만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라울은 결국 참지 못하고 푸념을 내뱉었다.
“그냥 오늘 죽였어야 했나.”
가면의 남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나도 잠깐 고민했다. 나이에 비해 그간 이룬 일들이 너무 뛰어나.”
“그런데 왜 안 죽였지? 뒷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 주었을 텐데.”
“……일격에 죽일 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니지. 틈은 있는데 확신이 들지 않았다고 해야겠군. 지금 생각하면 일부러 틈을 내보인 거 같기도 하고.”
“뭐?”
라울이 당혹스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남자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일격에 죽이지 못한다면 브랜포드 후작의 병력들이 들이닥쳤을 거다. 그러면 얻는 것 없이 일만 커졌겠지. 그래서 마음을 거뒀다. 지금 소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으니까.”
“일격에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안 들었다고? 당신이?”
“그래.”
라울은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저 나이에 그런 실력을 지녔을 순 없어. 잘못 본 게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저 그놈이 보이는 기세와 배포 때문에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신도 없이 검을 휘두르는 건 멍청한 짓이지.”
라울은 미간을 좁혔다. 그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꼭 일격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죽일 순 없었나?”
가면의 남자는 잠깐 기억을 더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열 번.”
“열 번이라니?”
“내가 느낀 게 사실이라면, 최소 열 번은 휘둘러야 죽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이라면 첫 공격을 받자마자 나와 맞붙지 않고 바로 연회장으로 도망갔겠지.”
“그러면 확실히 곤란해졌겠지만…….”
“그래, 그러니 그만 잊어라. 나중에 다시 기회가 오겠지.”
라울이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암살은 가능하겠나?”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라울을 노려보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씹듯이 내뱉었다.
“나더러 직접 하라는 말은 아니겠지.”
“설마. 세상에 그런 인력 낭비가 어디 있겠나. 그냥 성공할 가능성이 있을지 물어보는 걸세.”
“……암살자 실력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굳이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 너도 잘 알 텐데.”
“나도 굳이 일을 망쳐 가면서까지 저놈을 죽일 생각은 없어. 그냥 아쉬워서 해 본 말이야.”
지셀은 후작의 딸까지 치료하면서 수도 귀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암살 시도를 했다가 자칫 흔적이 남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지금은 최대한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물밑에서 수도 귀족들을 포섭해야 했다.
“쯧, 친왕파에 합류하기 전에 죽였어야 했는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하필 가장 쉽다고 생각했던 북부 공략이 가장 늦어질 줄이야.”
“해럴드도 한 방 먹었으니 신중하게 움직이겠지. 그 정도 능력은 되는 인물이지 않은가.”
“당연히 그래야지.”
라울은 싸늘한 어조로 내뱉으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지셀이 이름을 알리기 전에 해럴드가 북부를 손에 넣었다면 이렇게 골치 아픈 일도 없었을 텐데.
그 점이 다소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라울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혹시 모르니 해럴드에게 주의는 줘야겠어. 지셀 페르디움 본인의 무력도 강하니, 한 영지의 기사단장급으로 생각하고 계획을 짜라고.”
“북부제일검.”
“……갑자기 무슨 말인가? 북부제일검이라니.”
“지셀 페르디움의 무력 말이다. 북부제일검, 레이폴드 기사단장 수준으로 상정하라고 해라.”
그 말에 라울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평가가 너무 후한 거 아닌가? 저 나이에 기사단장급으로 잡는 것도 과한 편인데.”
“무인의 감이라고 해 두지. 너는 이런 말을 싫어하겠지만.”
“흠…….”
라울이 턱을 매만지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단단히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전해 두지.”
“어차피 우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큰 의미는 없겠지만 말이지.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일인 군단이라 불리는 당신 입에서 전쟁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 나오다니. 영 어울리지 않는데?”
라울의 비웃음 섞인 말에 가면의 남자는 조용히 답했다.
“왕실에 나 같은 놈이 하나 더 있지 않나. 그놈과 내가 서로를 견제하는 한 전쟁의 승패는 다른 사람들의 손에 달린 일이지.”
잠시 입을 다물었던 남자가 자조적으로 읊조렸다.
“지겨워 죽겠군.”
그 말을 끝으로 가면의 남자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 * *
라울이 돌아간 뒤, 한동안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연회가 이어졌다.
막 파벌에 합류한 애송이가 공작가의 제안을 쳐냈으니 친왕파 귀족들은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지셀의 기개를 칭찬하고 떠들며 술을 마셨다.
밤이 깊어지자 왕자와 고위 귀족들을 필두로 귀족들이 하나둘 돌아가며 연회는 자연스럽게 끝났다.
“휴우, 피곤하긴 하네.”
지셀은 목에 딱 붙는 옷깃을 잡아당겨 느슨하게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치고받고 싸우는 것보다 사람들 상대하는 게 더 힘들다.
억지로 웃을 때마다 등에 소름이 돋는 것이, 영 체질에 안 맞는다.
언제 빠져나갈지 때를 노리고 있던 그에게 로잘린이 다가왔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네, 뭐…….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래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후훗, 이렇게 한 사람이 주목받는 연회도 흔치 않지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제가 이렇게 인기가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라울의 제안을 거절한 뒤로 귀족들은 지셀을 놔주지 않았다.
여기서 쌓은 인맥이 언젠가는 도움이 될 테지만, 지금은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지셀이 적당히 대화를 끊고 돌아가려던 그때 로잘린이 물었다.
“남작님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네?”
“남작님이 무엇을 보고 계시는지 궁금해서요.”
“그냥…… 뭐, 남들하고 다를 거 없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게 목표죠.”
지셀은 대충 둘러댔다.
그의 진심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델파인 공작가를 쓸어 버리고 죄다 쑥대밭으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그 배후에 있는 놈들도 다 찾아서 박살 내 버리려고 미래에서 되돌아왔다고…….
앞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거라고.
‘얘기하면 지셀 페르디움이 미쳤다면서 난리가 나겠지.’
어쩌면 역사에 자신은 전쟁광이자 학살자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런 피비린내 나는 미래를 굳이 입 밖에 낼 필요가 있을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
그에게는 친왕파라는 권력자들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지셀이 생각에 잠기려던 찰나, 로잘린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평범한 목표네요. 그런 것치고는 하시는 일들이 모두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요.”
“뭐, 그냥 성격이 급해서 빨리빨리 처리하는 쪽을 선호할 뿐입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 해 봐야, 결국은 다 영지를 부강하게 만드는 일 아닙니까? 별거 없습니다.”
“흐음…….”
로잘린은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뜯어보았다.
지셀은 그런 그녀가 조금 불편했다. 자신의 본심을 가늠하고 깊이 파고드는 저 눈빛이 말이다.
“전 피곤해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 그에게 로잘린이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제가 남작님의 후원자라는 것 잊지 마세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귀찮으실 일은 많지 않을 겁니다.”
지셀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로잘린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 마음에 감사하고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목표를 이루려면 자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격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왕실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어 모두에게 견제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정도는 되어야 델파인 공작가랑 싸워 볼 만할 테지.’
그 사이에 브랜포드 후작이나 로잘린이 참견하고 간섭해 오는 건 원하지 않는다.
호의는 여기까지. 서로 필요한 것만 취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좋다.
괜히 그에게 휘말려서 죽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자리를 뜨는 지셀의 뒷모습을 보며 로잘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나름대로 노리는 게 있어서 도와준 거겠지만, 그 덕분에 자신은 새로운 인생을 얻었다.
어떤 보답을 해도 모자랐다. 오래오래 연을 이어 가며 도와주고 싶었는데 저렇게 칼같이 끊어 내다니.
로잘린은 언제 지셀을 지켜봤냐는 듯 휙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았다.
* * *
지셀은 돌아가는 마차에 타자마자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답답하군.’
가면을 쓴 남자가 예상했던 대로 지셀은 그 자리에서 라울을 죽일지 말지 고민했다.
뒷일은 그때 가서 수습하면 된다. 아니, 뒷일을 생각하지 말고 죽여야 한다.
‘무슨 손해를 보더라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는데.’
델파인 공작가가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라울의 계책 덕분이었다.
이미 수많은 이권이 공작가에 넘어갔고, 왕국 전역에서 공작가를 지지하는 영주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왕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란도 대부분 라울이 뒤에서 조종한 것이다.
‘그놈만 아니었다면…….’
지셀은 가면을 쓴 남자를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그는 대화하는 중에 몇 번이나 라울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가면의 남자가 호흡을 끊고 들어왔다.
놀랍게도 남자는 지셀의 미세한 움직임을 읽고 그에 맞춰 움직였다. 허튼짓을 하면 죽이겠다는 미약한 살기까지 담아서.
그래서 지셀은 차마 라울을 공격하지 못했다.
‘과연 소문대로 뛰어난 자다. 아니, 소문 이상이야.’
지셀의 마나 운용 능력과 통찰력은 용병왕 시절과 별 차이가 없다.
그의 호흡에 간섭할 수 있는 자는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적다.
7서클 이상 대마법사, 또는 소드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자.
‘루타니아에도 소드마스터는 둘뿐이지.’
한 사람은 왕실기사단장으로, 언제나 국왕의 곁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델파인 공작의 최측근이자 가장 충성스러운 검, 명실공히 왕국의 최강자라 불리는 남자.
‘왕국제일검, 소드마스터 발자크 백작.’
지셀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다. 타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한 웃음이었다.
죽여야 하는 놈들을 그냥 보내 줬으니 피가 끓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전생의 경지만 되찾았다면…….’
그랬다면 어떻게든 죄다 목을 베어 버렸을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워 속이 계속 뒤집혔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잊자. 지금은 더 빠르게 강해지고 세력을 키우는 것만 생각해야 해.’
과거로 돌아온 이후 한시도 게으름을 부린 적이 없다. 그로서는 지금 상태가 최선이었다.
단지 그 최선이 발자크 백작과 맞붙기에는 부족했을 뿐이다.
“후우…….”
지셀은 살기를 갈무리해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오늘 느낀 무력감과 분노를, 이 굴욕을 언젠가 마음껏 터뜨리리라 다짐하면서.
‘다음번에는……. 이렇게 조용히 끝나진 않을 거다.’
두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자신과 공작가가 모든 걸 걸고 맞붙었을 때.
그때야말로 누가 진정 왕국의 최강자인지 가려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