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기다리고 있어라. (3)
라울 요제프 자작의 뒤에는 체격이 건장한 남성이 뒤따르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고, 품이 넓은 로브로 머리카락과 체형도 전부 가렸다.
딱…… 딱…….
라울은 한쪽 다리를 절며 천천히 브랜포드 후작에게 다가와, 그를 잠시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브랜포드 후작님.”
“여기는 무슨 일인가? 요제프 자작.”
브랜포드 후작이 무심하게 답했다. 라울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린 사자를 하나 거둬들이셨다고 들어서 말입니다. 얼굴이나 한번 보려고 왔습니다.”
“공작가에서 관심을 둘 정도는 아니네.”
“젊은 나이에 뛰어난 제품을 개발하고 브랜포드 후작 각하의 지지까지 받는 인재인데, 어찌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찼다.
“그냥 관심으로 끝나기를 빌지. 뒤에 가면을 쓰고 있는 자는 누구지?”
“제 호위 기사입니다.”
기사단장인 톨레오가 가면을 쓴 남자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자작님의 호위 기사라 해도, 연회장에 정체 모르는 자를 들일 수는 없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가면을 벗어라.”
톨레오의 말에도 남자는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이놈! 당장 벗으라 하지 않았느냐!”
버럭 외치는 톨레오를 브랜포드 후작이 만류했다.
“됐다. 자작이 설마 여기서 사고라도 치려고 데리고 왔겠느냐. 그냥 넘어가라.”
연회의 주인이 괜찮다는데 더 나설 수는 없었다. 톨레오는 입술을 깨물고 뒤로 물러났다.
브랜포드 후작은 그것으로 용건은 끝났다는 듯,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내쫓지는 않겠지만 환영하지도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내쫓고 싶지만, 아무리 정적이라 해도 연회에 찾아온 귀족을 정당한 이유도 없이 내칠 수는 없었다.
라울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뻔뻔하게 중얼거렸다.
“흐음……. 혹시 제가 자리를 잘못 찾아온 겁니까?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군요.”
그가 지셀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딱…… 딱…… 딱…….
지팡이 소리가 울릴 때마다 귀족들이 더러운 것을 피하는 것처럼 엉거주춤하며 자리를 피했다.
‘괜히 엮여서 좋을 거 없어. 눈도 마주치지 말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지. 사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어.’
어느새 인파가 자연스럽게 흩어지고 자작과 지셀 사이에 길이 생겼다.
브랜포드 후작은 라울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남부에 있었던 걸로 아는데. 대체 어떻게 시간을 맞춰 온 거지?’
연회를 열겠다고 공표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남부에서 소식을 듣자마자 출발했어도 이 시간에 도착할 수는 없었다.
‘미리 와 있었단 뜻인데.’
공작가의 주요 인사 중 하나인 그가 수도에 와 있었는데도, 자신에게는 전혀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라울이 지금 이곳에 나타난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이놈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눈과 귀까지 가렸다. 델파인 공작가의 손길이 수도에까지 뻗쳤다는 뜻이다.
브랜포드 후작이 고심에 빠진 사이, 라울은 느긋하게 지셀의 앞에 바로 섰다.
지셀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영애들은 기겁하며 자리를 피한 지 오래였다.
“반갑군. 라울 요제프 자작이라고 하네.”
지셀은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였다.
“펜리스 남작입니다.”
“자네에 대해 알아보니 흥미로운 얘기가 제법 많더군. 북부에서 꽤 활약했다지?”
데스몬드 뒤에서 디갈드를 충동질하게 시킨 주제에 소문을 들은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지셀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연기하기는. 알아보기는 뭘 알아봐? 네놈들이 저지른 일이니까 당연히 잘 알겠지.’
라울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자리를 좀 옮기지 않겠나?”
“자리를 말입니까?”
“긴밀하게 할 얘기가 있어서 말일세.”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할지 솔직히 궁금했다.
두 사람은 연회장의 가까운 곳에 마련된 별실로 자리를 옮겼다.
라울은 지셀을 보며 웃었다.
나름대로 친절하게 대하려고 하는 듯하지만, 강퍅한 인상 때문에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네.”
“긴장한 것처럼 보이십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라울을 바라보던 지셀이 입꼬리만 살짝 끌어 올렸다.
묘하게 으스스한 미소를 마주하고 라울이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날 알고 있나? 표정이 꼭……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도 자작님에 관해 전해 들은 말이 꽤 있어서요.”
전생에는 공작가를 쳐부수는 게 목표였던 만큼, 그의 참모인 라울에 관해서도 깊이 조사했다.
그는 신체적 장애가 있음에도 공작의 측근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머리가 좋고, 잔혹했다.
‘페르디움을 공격한 것도 이놈 작품이겠지.’
지셀은 끓어오르는 살기를 내리누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라울은 그 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는 자네가 만든 화장품에 관심이 있어.”
“화장품 말이십니까?”
“사실 우리도 비슷한 걸 개발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효과가 확실한 제품이 나왔다는 소문이 돌기에,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수도에 올라왔지. 그런데 설마 병까지 치료할 정도로 효과가 좋을 줄이야.”
라울이 감탄하는 듯, 짜증 내는 듯 애매한 어조로 내뱉었다.
전생에는 델파인 공작가가 내놓았던 제품이니, 아깝고 애가 탈 만했다.
“그래서요?”
“솔직히 의외였어. 아무것도 없던 영지에서, 망나니로 유명하던 자네가 그런 걸 만들었다는 것이.”
“뭐, 따로 공부를 좀 했습니다. 세간의 평가가 전부는 아니죠.”
“그렇군, 맞는 말이야.”
라울의 눈빛에 순간 날이 섰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뜯어보았다.
‘이놈이 북부 쪽 계획을 전부 망쳐 놨다는 거지.’
아멜리아의 반란 준비도, 페르디움을 고립시키는 계획도, 적염의 마탑을 약화시키는 일도.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해럴드는 꼼꼼하고 신중한 성격이지. 웬만한 방해 요소도 다 파악해 뒀을 거다.’
그런 해럴드가 이놈 때문에 일을 계속 실패했다.
단순한 망나니, 관심조차 줄 필요가 없던 한심한 놈이 대계를 방해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라울 자신도 그랬으니까.
‘갑자기 이놈을 밀어줄 줄이야.’
라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친왕파는 분명 처음에는 브리반트 영지를 밀어주려고 했다.
그걸 알고 있기에 라울은 적염의 마탑을 약화시키고, 브리반트의 가신들을 하나둘씩 회유해 영지 전체를 장악해 갔다.
라울이 계획한 대로 돌아갔다면 친왕파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셈이 됐을 것이다.
계획은 완벽했다.
이 지셀이란 놈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셀은 어느 날 갑자기 각성이라도 한 듯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데스몬드의 전력은 반토막이 났고, 아멜리아의 반란 계획도 급하게 앞당겨야 했다.
그래서 그는 지셀이 화장품을 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직접 수도에 올라왔다.
지셀을 직접 보고 어떤 놈인지 판단하려고 말이다.
겸사겸사 이전에 일을 방해한 책임을 물어 적당히 손을 봐주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지셀이 친왕파에 붙어 버렸다,
‘설마 모든 걸 알고 친왕파에 붙었을 리는 없고……. 운도 좋은 놈이로군.’
쓸데없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왕실과 친왕파를 확실하게 고립시키고 칼을 뽑을 계획이었다.
공작가의 힘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아직 전쟁을 하기에는 일렀다.
그들의 계획을 완전히 망친 원흉인데도, 당장 건들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실패를 모르던 라울이 단 한 사람 때문에 몇 번이나 일을 망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진짜 망나니라면 저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정보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몰라서 당했을 뿐이다. 애초에 이런 인재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북부를 흡수하는 계획도 달리 세웠을 터.
이제는 지셀이라는 존재가 수면 위에 드러났으니 두 번은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판도가 짜인 뒤이니 수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차피 망친 일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인재라면 그냥 죽이기는 아까웠다.
“이런 뛰어난 젊은이가 북부에 숨어 있을 줄은 몰랐네. 이왕 이렇게 만난 것,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데.”
“화장품 독점 계약이나 기술 공유라면 안 합니다.”
“화장품이 탐이 나긴 하지만 지금 하는 제안은 그런 하찮은 게 아니야.”
“그럼 뭡니까?”
“델파인 공작가로 들어오게.”
갑작스러운 제안에 지셀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지금도 눈앞에 있는 라울을 당장 죽이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가까스로 살심을 억누르고 있는데 이런 개소리를 들으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라울은 지셀의 반응에 살짝 눈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불안한가? 남부에서 괜찮은 영지를 내줄 수 있네. 자네 아버지한테도.”
“아버지도 말입니까?”
“페르디움 백작이 척박한 곳에서 야만인들과 싸우느라 고생이 많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영지로 옮겨오는 건 어떤가. 자네와 자네 아버지가 공작가의 봉신이 된다면 얼마든지 지원해 주지.”
“무서운 분들이 많이 모여 계신 자리에서 너무 위험한 말을 하시는군요.”
라울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뭐 어떤가? 정치란 게 원래 그런 것이지. 다른 귀족들의 압박은 너무 걱정할 필요 없네. 내가 책임지고 해결해 주도록 하지.”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과연 델파인 공작가의 참모라고 해야 할까.
아예 좋은 땅으로 영지를 교체해 주겠다니, 실제로 델파인 공작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제안이기는 했다.
하지만 마수의 숲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뻔히 아는 지셀에게는 개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모든 걸 편하게 뺏고 개처럼 굴리겠다는 말을 참 우아하게도 지껄이네.’
믿을 수 없는 놈의 품에 들어가 안락을 꾀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지금도 암중에서 왕국 곳곳에 수작을 부리고 있는 놈들이다.
거기에 알 수 없는 배후 세력까지 끌어들인 놈들을 어떻게 믿고 몸을 의탁하겠는가.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북부도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거든요.”
완곡한 거절이지만 목소리는 단호하다.
라울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차가운 얼굴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감히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설마 친왕파가 델파인 공작가보다 세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여기는 우리 둘뿐이니 허심탄회하게 말하지. 친왕파의 세력은 우리 공작가에 미치지 못하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 제안을 거절한다는 말인가?”
“네. 관심 없습니다.”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네. 받아들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후회하게 될 걸세.”
“글쎄요……. 그러지 마시고 자작님이 이쪽으로 오시는 건 어떻습니까?”
능청스러운 대답에 라울은 헛웃음을 지으며 턱을 몇 번 쓰다듬었다.
무지한 것인가? 아니면 겁이 없는 것인가?
‘쯧, 기회를 줬음에도 죽을 자리를 고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