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기다리고 있어라. (2)
어느새 지셀의 옆에 선 로잘린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후훗, 남작님께서 인기가 많으시네요.”
지셀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인기는 사양입니다. 시선들이 얼마나 뜨거운지 화상 입게 생겼어요.”
“오늘 제 병이 나은 것도 확인하고, 아버지가 남작님의 후견인이 됐다는 공표까지 들었으니 다들 가만히 있지 않겠죠. 지금 다들 몸이 들썩이는데 참고 있을걸요?”
“그래서 연회는 괜찮다고 했던 건데. 이제 더 유명해지겠군요.”
투덜거리는 지셀을 보고 로잘린은 조그맣게 웃었다.
이번 연회처럼 파벌과 위계를 막론하고 다양한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자리는 드물다.
그런데 이런 귀한 자리를 진심으로 귀찮아하다니,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긴 했다.
“그래도 남작님 보러 오신 분들에게 인사는 드리셔야죠.”
“예, 그래야죠.”
지셀은 불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지셀이다.
친왕파와 본격적으로 손을 잡은 상황이니, 같은 배를 탄 사이에 한 번쯤은 인사를 해야 한다.
나름대로 친왕파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이 이번 연회에 다 모여 있으니 하나하나 찾아갈 필요가 없는 건 좋지만…….
그 사람들 중에 누구한테 먼저 인사하느냐는 여전히 문제였다.
‘큰 계파는 셋이군.’
같은 친왕파라 해도 계파가 없을 수는 없다.
공작가에 맞선다는 목적이 같아 뭉쳤을 뿐, 서로의 이해득실이나 성향이 다 맞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셀은 각 계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슬쩍 훑어보았다.
‘에일즈버 백작 부부와는 안면이 있고.’
메리엘을 필두로 하는 계파는 수도의 상계를 틀어쥐고 있다.
돈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귀족들의 모임인 셈이다.
‘저쪽이 빌로어 노튼 백작…….’
왕국 재상의 장남이자 수도의 대법관으로 왕국의 관료들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법과 행정을 주무르는 만큼 이 계파의 정치적 힘은 막강할 수밖에 없었다.
‘모리스 맥쿼리 후작까지 왔군.’
왕국의 보안무관장이자 왕국군의 총사령관.
왕실의 실질적인 군사력을 책임지고 있는 계파로, 각 군의 지휘관들은 대부분이 맥쿼리 후작을 따르고 있었다.
‘이런 거물들이 연회에 참석할 정도로 브랜포드 후작의 힘이 세다는 거지.’
왕국의 행정, 군사, 자금을 움직이는 대부분의 고위 귀족이 여기에 모여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강대국 루타니아를 움직이는 실세 중의 실세라 할 수 있었다.
뒷배가 든든해진 건 좋은 일이지만, 지금만큼은 후작의 영향력이 큰 게 원망스러웠다.
“후우…….”
지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누구와 먼저 인사하든 다른 쪽은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하나하나 강대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라 미움을 사면 앞으로 귀찮아질 수도 있었다.
메리엘은 지셀과 눈이 마주치자 부채로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흥미로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쩝, 구경하는 사람은 재미있겠지.’
지셀은 고개를 저으며 옆으로 눈을 돌렸다.
카르데니아의 시장, 의전 장관과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던 빌로어 노튼 백작은 시선이 마주치자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조카인 로잘린을 귀애한다는 건 수도에 모르는 자가 없었다. 아마도 지셀이 로잘린의 병을 고쳐 주어서 호의를 품은 모양이었다.
빌로어의 반대쪽에는 수염이 덥수룩한 모리스 맥쿼리 후작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아, 저런 인간이 삐지면 골치 아픈데.’
브랜포드 후작도 지셀의 선택을 보려는지 아무런 중재도 해 주지 않고 있었다.
‘아흐, 진짜 별걸 다 하네. 그래, 한다, 해.’
지셀은 결정을 내리고 한 걸음 내디뎠다. 모든 귀족이 긴장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지셀은 에일즈버 백작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실세는 메리엘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에일즈버 백작이 가주이니까.
“펜리스 남작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오오, 그래.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만 하게.”
“감사합니다.”
에일즈버 백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다른 계파의 수장들에 비해 한 끗발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그였다.
그런데 브랜포드 후작이 밀어주는 지셀이 가장 먼저 그에게 인사를 하다니.
이건 그의 체면을 아주 크게 살려 주는 일이었다.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말라비틀어진 만드라고라 뿌리 따위는 싹 잊을 만큼.
“후후훗, 동생이 참 의리가 있네.”
메리엘이 부채를 살살 부치며 웃자 지셀이 어깨를 으쓱였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뭐 어때? 어쨌든 우리 체면을 살려 줘서 고마워.”
지셀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그놈의 체면이 뭐라고……. 아, 정말 피곤하네요.”
“그래도 수도에 자리를 잡을 거면 익숙해져야지. 이번에도 그래. 우리야 고맙긴 하지만, 동생은 앞으로 꽤 귀찮아질걸.”
메리엘이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눈동자만 움직여 모리스 쪽을 가리켰다.
그는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지셀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흠!”
모리스는 지셀이 들으라는 듯 크게 헛기침을 했다.
‘감히 왕국의 군사력을 휘어잡고 있는 날 무시하다니!’
기껏해야 돈이나 조금 만지는 에일즈버 가와 같은 파벌로 엮인 것도 불쾌한데, 그들에게 우선순위에서 밀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장사나 하는 촌놈이라 그런가? 끼리끼리 잘 노는군.”
“그래도 머리가 있는 놈이면 두 번째는 후작님을 찾아오겠지요.”
곁에 있던 귀족들이 모리스를 달랬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지셀은 다음으로 빌로어에게 말을 건넸다.
빌로어는 자신이 두 번째라는 건 별로 개의치 않는지 연신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로잘린을 치료해 줘서 정말 고맙네. 애 엄마가 걱정하느라 속이 다 상했는데, 덕분에 우리도 큰 시름을 덜었어.”
“일이 잘 풀려 저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후작님에게 부탁한 얘기도 들었네. 노예상과 세금 문제는 최대한 빨리 처리되도록 내가 힘써 보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모리스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연신 콧김을 뿜어냈다.
자신이 뒷전으로 밀리다니, 수도의 유력 귀족들이 죄다 모여 있는데 이 무슨 큰 망신이란 말인가!
뒤늦게 지셀이 다가오자 모리스는 인상을 쓰며 가시 돋친 말을 던졌다.
“변경백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왕국의 총사령관인 나부터 찾아와야 하거늘. 북부 촌놈이라 뭐가 중요한지 모르나 보지?”
“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지셀이 여유롭게 넘기자 모리스는 더더욱 분통을 터트리며 이를 갈았다.
“너, 브랜포드 가에서 밀어준다고 기고만장해하지 마라. 내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너 따위는 쳐낼 수 있다.”
“그럴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켜보겠다.”
으르렁거리는 모리스를 뒤로 하고 지셀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크흠!”
모리스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연신 술잔을 들이켰다.
브랜포드 후작이 겨우 애송이 촌놈 따위를 밀어준다는 것도 못마땅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더 마음에 안 든다.
씩씩거리는 모리스의 옆에서 다른 귀족들이 그를 달래기 바빴다.
“아무래도 에일즈버 백작 부인과 친분이 있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노튼 백작과 브랜포드 후작은 사돈지간이 아닙니까? 펜리스 남작도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겁니다.”
사람들은 불쾌해 보이는 모리스의 눈치를 보면서도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지셀을 소개하려고 연 연회긴 하지만, 다른 귀족들에게도 인맥과 친분을 쌓는 기회였다.
로잘린은 자리에 돌아와 물을 들이켜는 지셀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순서는 뭔가 의도하신 건가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간 것뿐입니다.”
“후훗, 그래 보이지 않던걸요.”
“정말인데.”
“그래요, 그것도 남작님한테 어울리긴 하네요.”
지셀과 로잘린의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분위기가 조금 풀리자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두 사람에게 몰려왔기 때문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펜리스 남작님.”
“이거 약소한 선물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귀족들이 앞다투어 다가와 지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물을 건네는 자도 있었다.
당연히 지셀은 거부하지 않고 모두 받아 주었다.
물론 그들이 진심으로 지셀을 존중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다.
그들의 눈빛에는 은은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
‘잘난 척하지 마라. 촌놈 새끼야. 나중에 제대로 한 방 먹여 주마.’
‘천박한 장사치 주제에.’
갑자기 튀어나온 지셀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자는 없었다.
지셀에게 다가오는 자들은 대부분 브랜포드 후작과 어떻게든 연을 잇고 싶어서 그를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이었다.
지셀도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자들에게 심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우, 귀찮아 죽겠네.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다.’
하지만 귀찮다고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귀족들에게 적당히 예의만 차리면서 시간을 죽여야 했다.
지셀이 체면 같은 데 신경을 안 쓴다고 해도, 그건 굳이 나서서 좋은 평판을 쌓지 않는다는 뜻이지 일부러 깎아내린다는 뜻은 아니었다.
귀족들의 인사가 한 차례 끝나자 이번에는 유력한 가문의 영애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그들에게 지셀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가주의 명에 따라 이상한 놈과 정략결혼하느니 눈앞에 있는 촌놈을 휘어잡고 사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집안도 별로고 시골 촌놈이지만 어쨌든 영주잖아? 나이도 젊고, 얼굴도 괜찮고.’
‘조건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가가 밀어주는데 함부로 무시당하지는 않겠지.’
그러니 다들 지셀을 에워싸고 말을 걸기 바빴다.
“남작님은 약혼자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없어요.”
“그럼 약혼하거나 누군가를 사귈 예정은 있으세요?”
“없어요.”
“에이, 그건 있어야죠! 농담도 잘하시긴.”
“없어요.”
지셀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대충대충 대답했다.
그런데 그게 또 다른 남자들과 달라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영애들은 꺄르륵 웃으며 계속 질문을 던져 댔다.
어느 순간 영애들한테 뒤로 밀려난 로잘린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이를 갈았다.
“참자, 참자.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아니 근데 이 예의 없는 것들이!”
누군가는 즐거워하고, 누군가는 질투하고, 누군가는 험담을 하고, 누군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른 사람을 훔쳐보는 모습은 흔한 귀족들의 연회와 크게 다를 게 없는 광경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문을 지키던 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누군가의 이름을 외쳤다.
“……자작님 드십니다!”
뚝.
그 이름이 연회장에 울려 퍼지자마자 제멋대로 떠들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입을 닫았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에이, 설마. 잘못 들은 거겠죠.”
사람들은 억지웃음을 지으면서 문 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딱…… 딱…….
바짝 마르고 강퍅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천천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쪽 다리가 잔뜩 굽어 있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신체적 결점을 무마하고도 남을 정도로 남자가 내뿜는 기세는 단단하고 강렬했다.
딱…… 딱…….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연회장에 지팡이 소리만이 가득 찼다.
들어오는 남자를 노려보며 브랜포드 후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셀 또한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지셀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살기를 내리눌렀다.
‘저놈…….’
실제로는 처음 보지만 그 이름은 전생에 지겹도록 들어왔다.
교활하고 악독한 계략으로 적들에게 ‘절름발이 악마’라고 불렸던 남자.
‘라울 요제프 자작!’
델파인 공작의 최측근이자 공작가의 참모인 그가, 정적인 친왕파의 연회장에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