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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38화 (138/269)

138화 기다리고 있어라. (1)

“딱히 없습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바로 영지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애초에 화장품을 팔 겸, 후작과 연을 이으려고 수도에 왔다.

목적을 이뤘으니 더 있을 필요도 없다.

노예를 구하고, 영지민들을 이주시키는 일정까지 정해지면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브랜포드 후작은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잘됐군. 조만간 연회를 열어 주마. 귀족들과 서로 얼굴을 익히고 친분을 다지는 데는 모임에 참석하는 게 제일 빠르지. 로잘린과 함께 유력 귀족들의 모임에도 참석하는 게 좋겠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인맥이라면 브랜포드 후작과 메리엘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목적도 다 이뤘는데 다른 귀족을 만나서 뭐 하겠는가? 귀찮기만 하고 시간 낭비일 뿐이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의 거절을 무시하고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후견인이 되었으니 같은 파벌의 귀족에게 인사하는 게 예의다. 그래야 그들도 앞으로 너를 도와줄 게 아니냐. 다른 파벌의 귀족과도 얼굴을 익혀 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지셀은 내심 코웃음을 쳤다.

‘참나, 이 왕국에서 나보다 귀족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얼굴만 잘 모른다 뿐이지 좀 잘나간다는 귀족들의 정보는 대부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귀족들과 굳이 친분을 쌓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저택에서…….”

“참석해라.”

브랜포드 후작의 강압적인 명령에 지셀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댔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참석할 수밖에 없다.

‘아, 진짜 귀찮은데…….’

지셀은 속으로 투덜거리다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확실하게 밀어줄 생각이라는 뜻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차피 돌아다닐 거라면 이곳저곳 둘러보면서 뭔가 건질 게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카르데니아는 왕국의 수도인 만큼 다른 영지보다 발전되어 있다.

펜리스 영지에 적용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앞으로 들이기로 계획한 것 중에 단점은 없는지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뭐…… 당분간 좀 쉬다 가겠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사람을 보내겠다.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도록.”

이제 브랜포드 후작도 지셀이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깨달은 모양이었다.

사고 치지 말고 있으라는 것을 보면 말이다.

* * *

며칠 뒤 브랜포드 후작가에서 성대하게 연회가 열렸다.

누구나 참석할 수 있게 공개적으로 열린 연회다 보니 귀족들이 엄청나게 몰려들었다.

먼저 도착한 귀족들은 서로 대화하며 연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특히 로잘린과 친했던 귀부인들은 모두 그녀에 관해 얘기하기 바빴다.

“얘기 들으셨어요? 로잘린의 병이 다 나았다면서요.”

“저도 듣긴 했는데, 헛소문 아니에요? 다 나았으면 진작 모임에 참석했을 텐데 왜 아직도 안 나타났겠어요?”

로잘린의 병이 나았다는 소문은 벌써 수도에 쫙 퍼졌다.

하지만 막상 당사자가 공식 석상에 등장하지 않으니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귀부인들의 화제는 로잘린에서 지셀로 이어졌다.

“펜리스 남작의 화장품을 써서 피부병이 고쳐졌대요.”

“에이, 그게 말이 되나요? 사제나 의사들도 못 고친 걸 어떻게 화장품으로 고치겠어요.”

“그래도 그 화장품, 효과는 좋잖아요?”

로잘린의 치료가 끝나자마자 까마귀 저택의 포위가 풀리고, 화장품 판매도 재개되었다.

판매는 여전히 잘되고 있지만, 화장품을 사는 사람 중 누구도 그걸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화장품의 인기가 워낙 좋다 보니 그냥 흥밋거리로 소문이 퍼졌을 뿐이다.

“오늘 연회도 펜리스 남작 때문에 연 거 아닌가요?”

“맞아요, 브랜포드 후작님이 후견인이 되어 주기로 했대요.”

“그것도 헛소문 아니에요?”

귀족들은 하나같이 반신반의하며 소문에 관해 입방아를 찧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뭐가 아쉽다고 그런 촌놈의 후견인이 되어 준단 말인가?

하지만 후작과 가까운 친왕파 귀족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라 거짓으로 치부하기도 어려웠다.

연회에 참여한 자들은 대부분 지셀과 로잘린에 관한 소문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브랜포드 후작님 드십니다!”

연회장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크게 외쳤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브랜포드 후작이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들어와 연회장 상석에 앉았다.

곧 귀족 여럿이 인사를 위해 다가갔다.

브랜포드 후작은 연회나 모임에 참석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다 보니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귀족들이 수도 없었다.

“후작 각하, 이것은 제 성의입니다.”

“서부 지역에서 귀하다고 소문난…….”

귀족들은 가져온 선물들을 앞다투어 진상했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선물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을 주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고맙소.”

반응은 딱 이 한마디뿐이었다. 그래도 다들 얼굴도장을 찍었다는 생각에 기뻐했다.

한쪽에는 선물이 미친 듯이 쌓여 갔다. 선물들의 가치만 따져도 어지간한 영지의 몇 년 치 예산은 될 것이다.

지루할 정도로 긴 선물 공세가 서서히 잦아들 즈음, 입구에 선 시종이 지셀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펜리스 남작님 드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입구 쪽으로 모였다. 브랜포드 후작이 의도한 대로였다.

관례에는 조금 어긋나지만, 왕국의 최고 권력자라는 이름은 그런 작은 비난 따위에 흔들릴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쿠웅!

문이 열리고 지셀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의 얼굴을 보고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가 봐도 불편해하는 표정.

겁을 먹고 긴장해서 나오는 표정이 아니라, 지금 상황이 아주 귀찮고 마음에 안 든다는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귀족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는데도 태도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역시 재미있는 놈이로다.’

즐거워하는 브랜포드 후작과 달리 지셀은 귀찮음과 짜증을 참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아오, 이거 언제 끝나나.’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걸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가 원할 때나 그런 거다.

지금처럼 귀족들 사이에 억지로 끌려와서 예의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성미에 맞을 리가 없었다.

지셀이 브랜포드 후작 옆에 다가가 서자,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둘러보았다.

“미리 소식을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본 후작은 펜리스 남작의 후견인이 되어 주기로 했소이다. 앞으로도 그를 볼 때는 나를 대하듯이 해 주시오.”

말만 부탁조일 뿐, 사실상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연회장 여기저기서 귀족들이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정말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아무리 페르디움 변경백의 후계자라지만…… 그 영지는 별 쓸모없는 곳 아닌가?”

“나이도 너무 젊소이다. 저런 젊은이가 무얼 할 줄 안다고?”

펜리스 남작이 화장품으로 요새 조금 유명해지긴 했지만, 달리 말하면 고작 장사치에 불과하다.

브랜포드 후작과 어울리기에는 근본이 부족했다.

후작과 같은 파벌인 친왕파의 귀족들조차 몇몇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한시가 급한 때에 저런 자를 밀어주다니. 브리반트 백작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도 없지 않소?”

“브랜포드 후작께서 생각이 있겠지요.”

“아무래도 딸을 치료해 준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준 거 같네만…….”

그들은 지셀을 흰 눈으로 보며 혀를 찼다.

저놈 하나 때문에 왕실과 친왕파가 주도하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브리반트 영지를 내버려 두고 그보다 훨씬 못한 페르디움을 지원하자니.

결국 끝까지 밀어붙인 브랜포드 후작의 뜻대로 결정이 나긴 했지만, 아직도 물밑에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즉,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 때문에 정치적인 부담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후견인 일도 그렇소. 이왕 누군가를 밀어줄 거면, 좋은 집안의 자제들이 얼마나 많소이까?”

“도통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릇에 비해 총애가 너무 과해요.”

“어허, 그냥 지켜보자니까요?”

이번 일 때문에 친왕파 귀족들끼리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니 지셀을 싫어하는 쪽은 계속 속이 끓을 수밖에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내 딸 로잘린이 펜리스 남작 덕분에 병을 떨치고 일어났소. 이 자리는 내 딸 로잘린의 쾌유를 축하하는 연회이기도 하니 모두 즐겨 주면 좋겠소이다.”

그 말을 신호로 연회장 문이 열렸다. 시종이 뒤늦게 소리 높여 외쳤다.

“로잘린 브랜포드 영애 드십니다!”

로잘린이 천천히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녀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다들 정말로 로잘린의 병이 다 나았는지 궁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걸음을 옮김에 따라, 가까이에서 로잘린의 얼굴을 확인한 사람들의 입에서 차례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오오!”

“정말이다! 정말 다 나았어!”

“예전 모습 그대로예요! 아니, 피부는 더 좋아진 거 같은데요?”

사람들은 열광하기 바빴다.

사제들도, 의사들도 포기한 피부병을 고치다니, 도대체 얼마나 뛰어난 화장품이길래 이런 효과를 보인단 말인가!

“허어, 일개 화장품이 사제보다 낫다는 말이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구려.”

“다른 건 몰라도 펜리스 남작이 그 기술 하나는 뛰어난 게 확실합니다.”

“전설입니다! 그 화장품은 전설이 될 거예요!”

로잘린이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자 사람들은 더욱더 크게 환호했다.

귀부인들과 함께 있던 메리엘은 만면에 화색을 띠고 양손을 꼭 맞잡았다.

‘정말 나았구나. 브랜포드 후작도 정말 짓궂다니까. 미리 좀 보여 주면 어디 덧나나?’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다시 로잘린과 교류를 이어 갈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로잘린은 살짝 고개를 숙여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벅찬 마음에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날이 다시 올 줄이야…….’

모두의 앞에 이렇게 다시 서길 얼마나 꿈꿔왔던가.

로잘린은 고개를 돌려 아래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지셀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숨어 살 수밖에 없게 된 뒤로 포기했던 즐거움을 되찾아 준 사람.

그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지금 여기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다.

지셀은 로잘린과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로잘린이 인사를 끝내자 브랜포드 후작이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 모두 연회를 즐기시길.”

곧 악단의 연주가 시작됐지만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지셀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회장에 울려 퍼지는 것은 음악 소리뿐, 기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고위 귀족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탓이었다.

그들보다 급이 낮은 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뒤로 물러나 눈치만 보았다.

분명 즐거워야 할 연회인데도, 사방에 긴장감이 가득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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