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5)
좋았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후작가의 가신들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
‘건방지긴! 돈 좀 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어째서 저런 인물의 후견인이 되어 주셨단 말인가.’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가신들과 다르게 의외로 불쾌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대신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너에게도 나쁜 제안이 아닐 텐데? 내 믿음도 살 수 있고, 너희 가문에도 좋은 일이 아니냐.”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용병왕 시절, 가문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한 것을 얼마나 한탄했던가.
회귀한 뒤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가문과 영지를, 내 사람들을 지키는 것.
그런데 당장 필요한 걸 얻겠다고 가족을 파는 건 모순된 짓이다.
“원하는 걸 얻겠다고 가족을 팔 생각은 없습니다.”
“허…….”
하지만 지셀의 생각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의 대답에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만 지었다.
정략결혼은 이 시대에 당연한 일이다. 가문의 힘을 더욱 키우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후작의 제의는 페르디움같이 빈곤한 가문은 꿈도 못 꿀 만큼 좋은 기회였다. 해 준다고 할 때 받아야 한다.
그런데 가문의 후계자라는 놈이 저런 철부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니. 아직 젊어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가?
브랜포드 후작은 재미있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다시 물었다.
“결혼은 가주가 결정하는 거지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니다. 내가 당장 페르디움 백작에게 서신을 보낸다면 어쩌겠느냐? 네 아버지가 거절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동생이 싫다고 하면 제가 막을 겁니다.”
“아버지가 허락해도?”
“네.”
“원하는 걸 얻지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냐?”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입니다.”
너무나도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대답이었다.
‘감히 가주의 명령을 거부하겠다고?’
후작가의 가신들은 모두 지셀을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았다.
단 한 사람, 로잘린을 제외하고 말이다.
‘저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귀족이라면 누구라도 유혹을 떨쳐 버리기가 힘든 제안이었다. 그런 것을 저리 쉽게 거절하다니.
‘……등신 같은데 멋있어.’
이런 좋은 기회를 쳐내는 건 분명 바보 같은 짓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는데도 저 당당함이 부럽고 멋져 보였다.
아무리 돈이 많고 능력이 있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로잘린마저도 넘지 못하는 벽.
하지만 지셀은 그딴 건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당당했다. 그 대답은 로잘린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브랜포드 후작은 가만히 지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넌 정말 귀족답지 않구나.”
“그런 얘기 자주 듣습니다.”
“그래, 네 신념은 잘 들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싫다면야 어쩔 수 없지.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말해라.”
“예, 뭐……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부탁드린 건은……?”
‘뻔뻔한 놈 같으니.’
후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하는 꼴이 괘씸하긴 하지만, 델파인 공작가의 사람들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다.
이 정도면 믿어 볼 만하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보이면 지원을 끊고 병력으로 밀어 버리면 된다.
“모두 들어주도록 하지.”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가신들은 깜짝 놀랐다. 정말 이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서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잊지 마라. 이제 네가 발을 들이는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한 번의 실수로도 영지가 쑥대밭이 되고 목이 날아갈 수 있다. 너뿐만 아니라 네 가문 사람들까지.”
서슬 퍼런 경고에 지셀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공식적으로는 페르디움에 지원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가주는 네 아버지니까.”
“알겠습니다.”
“왕실의 전력을 쏟아붓는 계획이다. 너 하나를 믿고 바꾸는 거니 실망시키지 말도록.”
레이폴드와 페르디움, 이 두 곳만 버텨 줘도 북부에서 공작가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소 방어에 치중한 전략이지만, 친왕파 세력이 점점 공작가에 밀리고 있기에 공격적으로 나가기는 어려웠다.
브랜포드 후작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브리반트 영지에 보내기로 계획된 지원을 페르디움 쪽으로 보내 주겠다. 일단은 군수 장비와 식량부터 처리하지. 왕실 직할령의 주민들은 시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이주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네놈 말하는 꼴을 보아하니 왕실 직할령에서 보내는 수만으로는 부족할 테지. 왕실뿐만 아니라 친왕파의 영주들에게도 주민들을 일부 지원해 달라고 얘기해 두마. 그리 알거라.”
지셀이 미소지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였다.
하지만 가장 기뻐한 사람은 지셀이 아니라 오히려 벨린다였다.
“정말 잘 됐어요!”
그녀에게 페르디움은 마음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셀의 어머니를 따라온 뒤 내내 페르디움에서 지내며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도련님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였을까? 안 말리길 잘했어.’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그전에는 쥐어패서라도 지셀을 말리고 싶었는데 일이 잘 풀리니 또 그냥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브랜포드 후작이 말을 이었다.
“인구 이전 계획은 5년 정도로 보고 있다. 규모에 비해 그 정도면 빠른 편이지만, 당장 네가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는 않을 텐데.”
최소한 몇만 단위의 인구를 옮겨야 한다.
이주할 사람들을 선별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셀도 그 정도는 예상했기에 준비해 두었던 말을 바로 꺼냈다.
“그러면 노예라도 대량으로 사고 싶습니다. 수도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파는 것까지 포함해서요.”
“흐음, 노예라…….”
브랜포드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 능력만 있다면,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는 데는 노예를 쓰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굳이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일일이 노예상들을 찾아다니기 힘들기 때문일 터.
“좋다, 각 지역의 노예상들에게 공문을 보내 주마. 영지민을 늘리는 게 목적이니 가구 단위로 알아보면 되겠군.”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왕 도와주시는 거, 특별한 노예들도 좀 구해 주십시오.”
“특별한 노예?”
“네, 엘프와 드워프 노예들도 최대한 많이 사고 싶습니다.”
“…….”
지금껏 무슨 부탁이든 흔쾌히 수락했던 브랜포드 후작도 이 발언에는 선뜻 답을 주지 못했다.
엘프와 드워프 노예들은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특별 관리에 들어가는 대상이라 대귀족들이나 왕실이 아니면 구하기 어렵다.
그나마 구할 수 있다 해도, 수 자체가 무척이나 적으니 가격 또한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이종족 노예 한 명을 구할 값이면 평범한 인간 노예 백 명 이상을 살 수 있을 정도다.
“바라는 것도 많구나. 대귀족들도 구하기 어려운 이종족 노예들을 한둘도 아니고 대량으로 구하고 싶다고?”
“네, 파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네요.”
“차라리 고급 기술을 익힌 노예를 사는 게 더 싸게 먹힐 것이다.”
“그 방법도 쓰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종족 노예도 많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엘프와 드워프들은 그 종족 특성상 인간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지셀은 그들을 활용하는 방안도 다양하게 생각해 놓았다.
양을 당장 늘릴 수 없다면, 질을 높이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만.
브랜포드 후작은 바로 그 점을 짚었다.
“그만한 돈이 있느냐? 요즘 돈을 좀 번 모양이다만, 그 정도로는 원하는 만큼 구하지 못할 것이다.”
지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답했다.
“저도 당장 그만한 현금을 마련하는 건 사실 힘듭니다. 하지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지셀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브랜포드 후작을 향해 당당하게 말했다.
“저 보증 좀 서…….”
“거절한다.”
“…….”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칼에 거절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 로잘린은 이번에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스케일이 큰 일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벌이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걸 남의 신용으로 하려고 한다는 점이 특히나 범상치 않았다.
‘……역시 등신 같은데 멋있어.’
장내가 침묵으로 물들자 벨린다가 지셀의 소매를 다시 잡아당겼다.
‘아오, 미치겠네. 지금 다른 부탁도 엄청난데! 다 들어준다는데 도대체 왜 그래요?’
안 말리길 잘했다는 생각은 취소다.
1절만 하고 끝내야 하는데 도대체 몇 절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지셀은 벨린다의 손을 뿌리치며 다시 말했다.
“금액이 워낙 크니 우려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다 갚을 수 있습니다.”
“…….”
브랜포드 후작은 할 말을 잃었다.
보증 좀 서 달라는 놈들은 꼭 저렇게 말한다. 안 그런 놈을 본 적이 없다.
“안 되나요?”
지셀은 눈을 반짝이며 순진무구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리 후견인이 되어 주었어도 그렇지, 지옥 끝까지 같이 가자는 거 같았다.
하다 하다 이젠 보증까지 서 달라고? 이 새끼는 진짜 웃기는 새끼다.
“거절한다. 두 번 묻지 마라.”
“에이.”
칼날을 품은 듯 단호한 목소리에 지셀이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역시 이건 안 되네.’
워낙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 슬쩍 던져 봤는데 역시 씨알도 안 먹힌다.
실망하며 고개를 돌리던 지셀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멋지게 나타나 후원자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한 사람이 말이다.
촤르륵.
로잘린은 지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부채를 꺼내 얼굴을 가렸다.
지셀은 우수에 젖은 눈빛을 내비치며 로잘린을 불렀다.
“아가씨.”
그녀는 지셀의 부름에 흠칫 놀라 발을 헛디뎠다. 잠깐 비틀거리다 곧 중심을 잡은 로잘린이 옆에 있는 하녀에게 말했다.
“몸이 아직 다 안 나은 거 같아. 방으로 돌아가야겠어. 어서 가자. 빨리, 빨리.”
로잘린은 사용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전을 빠져나갔다.
계속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로.
지셀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저기, 아가씨? 후원자가 돼 주신다면서요.”
‘후원자가 되어 준다고 했지, 보증을 서 준다고는 안 했어!’
이종족 노예를 대량으로 구입하려면 왕국의 한 해 예산은 족히 들 것이다.
아무리 화장품이 잘 팔려도 그만한 돈을 갚을 수 있을 리가.
보증을 선다는 건 파산을 예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작님, 지금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나중에 다시 뵈어요.”
“아가씨! 아가씨!”
애타는 지셀의 부름을 못 들은 척하며 로잘린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음…….”
지셀은 아쉬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눈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죄다 고개를 돌리고 피한다.
‘진짜 갚을 수 있는데 다들 안 믿어 주네. 돈 들어갈 곳 많은데. 쩝.’
어쩔 수 없다. 버는 돈을 박박 긁어모으는 수밖에. 당분간은 빠듯하게 살아야 할 거 같았다.
마음을 정리한 지셀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돈은 제가 알아서 마련하겠습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브랜포드 후작은 여느 때처럼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더 부탁할 건 없는 거 같군. 네가 말한 일들을 정리하려면 며칠은 기다려야 할 거다.”
“알겠습니다. 연락을 주시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 외에 수도에서 볼 일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