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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36화 (136/269)

136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4)

브랜포드 후작은 마치 진위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살폈다.

지셀 또한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브랜포드 후작을 마주 보았다.

‘엄한 놈 밀어줘서 털리지 말고 준비한 거 다 나한테 내놓으쇼.’

델파인 공작가가 여기저기 손을 뻗치고 있는 걸 알게 된 뒤로, 친왕파도 부랴부랴 북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늘리려고 고심했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 선정된 곳이 브리반트 영지였다.

‘거기는 다 좋은데, 이미 델파인 공작가의 손아귀 안에서 놀고 있어서 문제지.’

전생에도 왕실과 친왕파는 브리반트 영지에 엄청난 재원을 투입했다.

심지어 왕실 직할령의 인구까지 넘겨주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델파인 공작은 친왕파가 그런 결정을 내릴 거라고 예측한 지 오래였다.

그가 공을 들여 적염의 마탑을 약화시킨 것도 장기적으로 친왕파의 힘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마탑은 내가 룬스톤을 제공해서 그나마 숨을 붙여 놨지만……. 영지 전체가 넘어간 수준인데 마탑 하나 가지고 뭘 어쩌겠어.’

이미 브리반트 영지의 봉신들과 가신들 대부분은 공작가에 회유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브리반트 영지에 아무리 지원해 줘 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 친왕파가 지셀을 지원하게 된다면?

델파인 공작가에서 그동안 쓴 시간과 돈은 아무 의미 없게 된다. 그저 헛수고를 한 셈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시간 들여서 천천히 키울 생각하지 말고, 준비하고 있는 거 전부 다 나한테 줘. 대신 싸워 주는 건 내 특기라고.’

자신만만한 지셀을 보며 브랜포드 후작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굴렸다.

브리반트 백작은 착하지만 나태하고 소심한 자다. 후작이 보기에는 마탑의 세금과 기술에 기대어 사는 기생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놈이라면…….’

그저 권력을 등에 업고 일을 좀 편하게 하려고 후견인이 되어 달라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친왕파의 수장이라는 것까지 생각해서 들이댄 것이다.

다소 잡음이 있긴 하겠지만, 지금이라도 지원 대상을 지셀로 수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장이 후견인을 맡은 인재라는 명분이 있으니까.

어차피 친왕파도 브리반트 영지가 특별히 마음에 들어 선택한 건 아니었다. 북부의 다른 영지는 더 개판이기에 어쩔 수 없이 선정한 것뿐이다.

‘그래, 목숨까지 걸면서 덤벼든 이유가 있었구나.’

갈수록 마음에 드는 놈이다. 나태한 브리반트 백작보다는 훨씬 나았다. 밀어줄 거면 이런 놈을 밀어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것과 별개로, 파벌 전체를 움직이는 계획을 그 혼자 멋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 위험 요소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약 이놈이 공작가의 끄나풀이라면 위험하다.’

친왕파의 힘을 모조리 퍼부어 키운 자가 첩자라면 델파인 공작가의 힘만 더 강해지는 꼴이 된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너를 믿고 밀어주기에는 위험 요소가 크다.”

지셀이 뚱하게 받아쳤다.

“브리반트 백작은 믿을 만합니까?”

“백작에 대해서는 충분한 조사를 거쳤다.”

“저에 대해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간 알려진 평가와 많이 다르다는 건 알겠군.”

사실 지셀을 믿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대체 어째서 자신을 숨기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오, 확 그냥 내가 미래에서 왔소 하고 말해 버려?’

지셀은 답답한 마음을 누르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저를 믿을 수 없다면 제 아버지를 믿어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전 페르디움의 후계자이자 봉신입니다.”

“흠.”

후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페르디움 백작은 믿을 만했다.

오랜 세월 동안 묵묵하게 변경을 지키며 왕실에 충성해 온 자.

친왕파 귀족 중 일부는 브리반트 백작보다 차라리 그 책임감 강한 남자를 키우는 게 낫지 않겠냐고 제안했을 정도였다.

페르디움 영지가 워낙 가난한 탓에 지원해 주는 의미가 없다 싶어 후보 명단에서 지우긴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군. 겨우 한 놈 때문에 파벌 전체를 움직일까 고민하게 되다니.’

브랜포드 후작은 내심 헛웃음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데, 더 어이없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저놈이 제시한 황당한 선택지에 구미가 당긴다는 거다.

고민하는 그에게 지셀이 다시 말했다.

“페르디움과 디갈드 사이의 전쟁에 관해서도 보고를 들으셨겠지요.”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거냐?”

“영 불안하신 듯해서요. 그 전쟁, 누군가가 디갈드를 뒤에서 충동질한 거 같더군요. 보여 드릴 증거는 없습니다만…… 저는 데스몬드 백작이 병력을 지원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증거가 없진 않다. 당시 사로잡았던 데스몬드의 기사가 아직 지셀의 손 안에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그자를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건 나중에 써야 할 데가 따로 있었다.

하지만, 심증만으로도 후작을 설득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말은…….”

“데스몬드 백작은 의심스러운 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같은 자를 적으로 두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지셀이 친왕파에 붙었다는 건 금방 소문이 날 것이다. 그렇기에 델파인 공작과 척진 사이라는 걸 굳이 감출 필요는 없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집사에게 손짓했다.

“페르디움에서 있었던 전쟁에 관한 자료를 가져와라.”

브랜포드 후작은 집사가 가져온 자료를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특별한 것 없이, 북부에서 흔히 벌어지는 고만고만한 규모의 영지전이었다.

단 하나 의심스러운 건.

‘디갈드에서 보낸 병력의 규모가 이쪽에서 예측했던 것보다 컸다…….’

징집을 과하게 하고 용병을 많이 고용한 탓이라고 알려졌지만, 보고서를 작성한 자는 데스몬드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견을 덧붙였다.

만약 데스몬드 백작이 디갈드를 도와준 것이라면 퍼즐이 맞아떨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친왕파는 데스몬드 백작이 공작가 쪽에 붙은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다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긴장한 채 침묵을 지켰다.

특히 클로드는 입술까지 깨물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가장 큰 문제가 인구 문제였는데. 브랜포드 후작이 도와만 준다면 수십 년 걸릴 일을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 어마어마한 기회야.’

산에서 화전민을 끌고 와도 여전히 일할 사람이 부족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인구 문제는 쉽사리 해결할 수가 없었다.

‘농노들이 대부분이라, 도망치는 게 아니고서야 우리 영지에 못 오지.’

펜리스 영지가 살기 좋다고 소문이 나도 허락받은 자유민이 아니라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예전에 펜리스 영지에서 도망갔던 영지민들을 돌려받기도 쉽지 않았다. 주변 영주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내어 주지 않고 있었다.

‘아니, 분명히 영지 안에서만 돌아다니던 사람이 대체 이런 정보는 또 어디서 얻어 온 거야?’

그는 생경한 것을 보듯이 지셀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브랜포드 후작이 눈을 뜨더니 물었다.

“혹시 다른 부탁이 또 있느냐?”

“그렇습니다. 페르디움은 전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영지를 안정시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 같습니다.”

“그래서?”

“3년간 페르디움과 그 봉신들의 세금 납부를 유예해 주시기 바랍니다.”

“…….”

가신들은 표정을 구기며 저들끼리 웅성거렸다.

돈을 아귀처럼 쓸어 모으고 있으면서 세금 납부를 유예해 달라니!

아무리 세력이 큰 대영주라도 세금을 못 내겠다고 하지는 않는다. 만약 내지 않는다면 수많은 귀족과 관료들에게 비난당할 것이다.

체면이 깎이는 것 이전에, 왕실에서부터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했다.

고작 돈 몇 푼 아끼려다 적을 만드는 셈이 되는 것이다.

‘단순한 욕심 때문에 그럴 놈 같지는 않고…….’

후작은 지셀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까지 본 지셀은 그 정도로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뭘 노리는 건지 짐작하기에는 그를 겪은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지셀에게 여러 번 당해 봤던 클로드는 본능적으로 일이 더 많아질 미래를 깨닫고 죽상을 지었다.

‘세금을 안 내겠다고?’

지셀은 그런 식으로 돈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다.

이건 분명히 엄청난 금액이 필요한 계획을 세워 두었다는 뜻이다. 세금 낼 돈까지 아껴야 할 정도로!

‘아휴, 또 죽어나겠네. 이제 화장품도 팔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부족해서 자꾸 일을 벌이는 거람.’

왜 나 클로드는 행복할 수가 없어!

브랜포드 후작은 얼굴색이 시커멓게 죽어 가는 클로드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부하가 저렇게까지 질색하는 걸 보면 그다지 변변한 이유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쯤 되니 지셀이라는 놈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해졌다.

“또 필요한 게 있느냐?”

“일단은 이 정도면 될 거 같습니다. 이전 부탁을 후작님께서 허락하시면…… 나머지 문제는 알아서 해결될 테니까요.”

굳이 필요한 걸 꼽자면, 귀족들의 비난을 막아 주는 것 정도였다.

직할령의 영지민들을 받아 오는 것도, 세금을 내지 않는 것도 다른 귀족들이 시비를 걸어오는 빌미가 된다.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이 그를 밀어준다면 아무도 감히 불만을 내뱉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굳이 지셀이 막아 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없었다.

지셀의 말뜻을 알아들은 브랜포드 후작이 피식 웃었다.

‘나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겠군.’

왕실과 친왕파 귀족들을 설득해서 지원할 영지를 변경하고, 세금 납부를 유예해 주고, 다른 귀족들의 공격에 대한 방패 역할까지 해야 한다.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꼴을 보아하니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기 위해 후견인이란 핑계를 내세운 것 같았다.

‘배포 하나는 정말 보통이 아닌 놈이구나.’

그게 대영주의 자리든 아니면 그보다 더 큰 권력이든 간에, 자신을 이용해 무언가를 노리는 게 분명했다.

만약 로잘린의 일이 아니었더라도, 어떻게든 기상천외한 방법을 들고 찾아왔으리라.

눈앞의 놈이라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후작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관계를 조금 더 확실히 묶어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네.”

“친왕파의 유력 귀족 중 하나와 사돈을 맺는 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 집안과 연을 맺어도 괜찮겠지. 네가 좋다 하면 방계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 주겠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저 고고하고 냉철한 브랜포드 후작이 중매를 서 주겠다고 자처하다니!

페르디움 같은 영세한 가문이 거절하기에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제안이다.

다들 지셀이 단숨에 수락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셀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제안을 해 올 줄이야. 이건 완전히 동생을 인질로 잡겠다는 뜻이 아닌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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