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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35화 (135/269)

135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3)

예상치 못한 대답에 로잘린이 살짝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대가도 치르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제가 체면이 서질 않아요. 부담 없이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정말 괜찮습니다. 아가씨께서 나으신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솔직히 이 무서운 여자랑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치료도 끝났으니 볼 일도 없다.

필요한 건 이제 후견인이 된 브랜포드 후작에게 받아 내도 충분하다.

하지만 로잘린은 지셀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좋은 게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버지께서 대가를 주셨더라도, 은혜를 입은 사람은 저인걸요. 아, 그러면 제가 앞으로 펜리스 남작님의 개인 후원자가 되어 드릴게요.”

그 말에 가신들은 깜짝 놀랐다.

로잘린은 그간 병 때문에 숨어 살면서도 기존에 후원하던 단체들을 계속 관리해 왔다.

그녀가 그 단체들과 엮인 인력과 재력을 휘두르면 수도 경제의 절반 정도는 순식간에 마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가씨가 움직이면 후작님뿐 아니라 아가씨의 외가에서도 뒤를 봐주게 된다.’

로잘린의 어머니인 브랜포드 후작 부인은 지금 후작과 별거 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왕국의 재상이고 오빠들은 왕실의 행정관과 수도의 대법관이다.

그런 대단한 집안에서 곱게 자란 탓에 브랜포드 후작 부인은 냉혈한 같은 남편의 성격을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결혼 자체가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루어진 결합이었으니 이혼도 불가능했다.

결국 후작 부인은 그대로 친정에서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딸인 로잘린에게는 때마다 좋은 약을 챙겨 주고, 편지도 수시로 주고받고 있었다.

로잘린의 외할아버지인 재상도 손녀를 끔찍이 아꼈다.

로잘린이 후원자가 된다는 건, 즉 그녀의 외가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엄청난 일이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은 보답이 될까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잘린에게 지셀은 다시 한번 깔끔하게 거절했다.

“말씀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지셀도 그녀의 뒷배경을 알고는 있지만, 굳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브랜포드 후작이 다 도와줄 텐데 로잘린이 후원해 줄 게 뭐가 있겠는가?

받아들이면 돈이야 얼마쯤 얻을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로잘린과 엮이면 피곤해질 게 뻔히 보였다. 이쯤에서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로잘린은 정말 보답을 하고 싶었는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계획해 두신 일이 많지 않으신가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정말 괜찮……?”

촤르륵!

거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부채가 펴진다.

“후우우…….”

끓어오르는 화를 참는 듯 잠시 심호흡을 한 그녀가 이번에도 두 눈만 내보이고 말했다.

“받아 주실 거죠?”

온몸이 찌릿할 정도의 살기가 전해져 온다.

지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엮이면 피곤해질까 봐 피한 건데, 계속 거절하면 더 피곤해질 거 같다. 아무래도 이미 엮인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기간 내에 치료를 마치겠다고 모욕을 주어 가며 강제로 끌고 온 건 사실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받아 주는 게 나을 거 같았다.

‘뭐 언젠가는 도움받을 일이 있겠지. 선택지가 많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후훗,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촤륵.

부채가 접히고 다시 상냥한 얼굴이 드러났다.

도대체 부채 뒤에서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가신들은 침만 꿀꺽 삼키고 아무런 말을 못 했다.

반대하고 싶지만, 로잘린은 브랜포드 후작과는 다른 의미로 무서우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때, 가신 하나가 옆 사람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아가씨 성격이 원래 저랬나? 병이 나아서 성격이 좋아졌다기엔 너무 갑자기 변하셨…….”

“쉿!”

옆 사람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황하며 고개를 확 돌려 버렸다.

눈치 없는 가신은 그제야 오싹한 예감을 받고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잘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허리춤에 맨 단검을 매만지고 있었다.

바로 지셀의 머리를 뚫어 버릴 뻔했던 그 단검이었다.

‘아, 망했다. 성격이 좋아진 게 아니라 펜리스 남작 앞이라 착한 척하는 거였구나.’

가신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식은땀을 흘렸다. 어쩌면 조만간 비자발적으로 은퇴하게 될지도 모른다.

살기가 풀풀 날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던 지셀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저기, 아가씨?”

“네, 남작님.”

로잘린은 천사 같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지셀은 고구마를 먹은 듯 속이 답답해졌다.

본래 성격이 아닌 걸 뻔히 아는데, 안 어울리게 자꾸 상냥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 준다.

‘안 보여, 진짜 표정이 아예 안 보여.’

“…….”

“왜 그러세요? 남작님.”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지셀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아니, 별거 아닙니다.”

로잘린은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생긋 웃었다.

대화를 지켜보던 브랜포드 후작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감사 인사는 대충 끝난 거 같군. 그래,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들이댔던 걸 보아하니 후견인으로서 내게 바라는 일이 있는 거겠지?”

지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펜리스 영지에 가장 부족했던 부분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후작님이 도와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나를 찾아온 걸 보면 쉬운 일은 아니겠군.”

“예, 하지만 후작님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왕국 최고 권력자 정도는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난리를 피우면서까지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그 입에서 또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하구나. 좋다, 원하는 걸 말해 보아라.”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화끈함은 참 마음에 든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없으니까.

“사람들이 듣는 게 곤란하다면 자리를 옮겨주겠다.”

“어차피 다들 알게 될 테니 상관없습니다.”

다들 조용히 숨을 죽이고 지셀을 바라보았다.

후견인을 요청한 목적은 뻔했다. 원하는 게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첫 번째 부탁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일 터.

아마도 그 일을 직접 처리하게 될 후작가의 가신으로서, 과연 지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

어젯밤 치료를 마친 뒤부터, 후작에게 무엇을 부탁해야 할지 충분히 오래 고민했다.

“사람이 좀 필요합니다.”

지금 펜리스 영지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력 부족이었다.

후작이 후견인 자리를 받아 주지 않았다면, 대신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사람이 필요하다고?”

“펜리스 영지는 제가 맡기 전에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이었습니다.”

“알고 있다.”

“영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시작한 일이 많은데, 정작 일할 사람이 부족합니다.”

“심정은 이해한다만, 인구를 늘리는 건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설령 일국의 왕이라도 사람을 새로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지셀은 방법이 있다는 듯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왕실 직할령의 사람들을 저희 영지에 나눠 주십시오.”

그 말에 브랜포드 후작은 눈썹을 찡그렸다. 후작가의 가신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영지도 아니고, 왕실의 백성들을 내놓으라고 하다니.

가신 중 하나가 불쾌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왕실에서 허락할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후견인이라고 해도 그렇지, 처음부터 저런 무리한 요구를 하다니.

가신들의 얼굴에는 비웃음과 조롱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옆에서 구경하던 로잘린도 흥미로운 눈빛을 보냈다.

‘부탁치고는 너무 큰 일인데?’

노동력과 세금, 병력까지 전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그렇기에 인구는 곧 그 영주의 힘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힘을 대가도 없이 나눠 주겠는가?

심지어 왕실은 델파인 공작가를 견제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자신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일을 허락할 리가 없다.

하지만 지셀은 사람들이 뭐라 떠들든 무시하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작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브랜포드 후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무리 내가 후견인이라지만 들어줄 수 있는 문제가 있고 없는 문제가 있다. 왕실의 재산을 나눠 달라니, 너는 그게 정말로 가능하리라 생각하느냐?”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째서?”

“어차피 밀어줄 거라면 확실하게 밀어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북부 대표로 저를 내세워 주십시오. 다른 사람 말고요. 지금 생각하시는 곳도…… 솔직히 마음에 안 드시지 않습니까?”

“하, 하하하하!”

브랜포드 후작이 난데없이 웃기 시작했다.

딸인 로잘린도, 평생을 함께한 가신들도 그 모습에 당황했다.

그들은 후작이 저렇게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무표정하고 냉혹한 저 후작이 저렇게 즐겁다는 듯 웃을 줄이야!

대체 왜 웃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더더욱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실컷 웃던 브랜포드 후작은 갑자기 날카로운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느냐? 첩자라도 박아 놓은 것이냐?”

“그저…… 혼자 고민하고 예측해 봤을 뿐입니다. 제 생각이 맞는다고 확신한 건 지금 후작님의 반응을 보고 난 다음입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최측근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을 물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멈칫했다.

비밀리에 진행해 온 일이지만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났다.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되면 어차피 곧 모두가 알게 될 일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변방에서 머물던 지셀마저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모양이니 이제 숨기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아니, 저놈도 감을 잡았는데 수도에 산다는 놈들이 이걸 몰라?’

브랜포드 후작은 못마땅한 눈으로 가신들을 훑어보다 혀를 찼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지셀에게 물었다.

“그래, 내가 생각하는 영지가 어디인 거 같으냐?”

“적염의 마탑이 있는 브리반트 영지 아닙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북부에는 대영주인 레이폴드와 데스몬드도 있다.”

“레이폴드는 독선적이고 데스몬드는 의심스러울 테니까요. 그 외에는 다 악덕 영주 아니면 거지들 아닙니까? 후작님의 눈에 차지는 않았을 겁니다.”

후작이 흥미 어린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브리반트는 밀어줄 가치가 있다는 뜻이냐?”

“브리반트 백작은 친왕파와 가깝게 지내고, 마탑이 있으니 영지를 방어하는 데에도 유리하니까요. 마탑 덕분에 돈도 꽤 벌어서 풍족한 편이고 말입니다.”

지셀이 덤덤하게 설명했다. 후작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되물었다.

“그걸 알면서도 네놈을 대신 밀어 달라는 거냐?”

“네, 후작님에게도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제 쪽에는 후견인으로서 힘을 쓰시기도 쉬울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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