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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34화 (134/269)

134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2)

‘이 당돌한 놈이 애초부터 작정을 하고 왔구나.’

브랜포드 후작은 내심 헛웃음을 지었다. 지셀의 뻔뻔함에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평소 같았으면 누가 그런 의중을 내비치기만 해도 당장 불호령을 내렸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툭…… 툭…… 툭…….

브랜포드 후작이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대전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 말을 못 한 채 그의 대답만 기다리고 있었다.

브랜포드 후작은 지금까지 누구의 후견인을 자처한 적이 없었다.

자칫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명예와 권위가 순식간에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셀은 고민하는 후작을 보고 내심 혀를 찼다.

‘아니, 뭐든 다 들어주겠다면서. 왜 저렇게 고민을 해.’

입꼬리를 삐죽대며 투덜대는 지셀을 브랜포드 후작은 무심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욕심이 보통 큰 놈이 아니다. 후견인이 되면 골치 아픈 일이 많겠지.’

브랜포드 후작은 눈을 감고 조금 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근래 본 젊은 귀족 중에서는 개중 출중하기는 하군.’

전쟁 이후로 나름대로 활약했다는 보고는 들었지만, 망나니 시절과 대비되어 좋게 봐 준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지셀의 기행을 직접 확인하니 그 보고가 오히려 그를 과소평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슬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밀어줘도 괜찮을 것 같다.’

화장품 때문에라도, 지셀은 몇 년만 지나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성장할 게 분명했다.

거기다 지셀의 아버지인 페르디움 변경백은 디갈드의 영지까지 흡수한 상태.

적당히 지원을 추가해서 조금만 더 끌어올려도 친왕파에 꽤 도움이 될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숙고 끝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좋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대전 안에 있던 모두가 당황했다.

아무리 약속을 했다지만 저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정말 들어줄 줄이야!

사람들이 놀라건 말건, 브랜포드 후작은 자세를 바로 하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증인으로 선언한다. 나, 브랜포드 후작은 지셀 펜리스 남작의 후견인으로서 그의 뒤를 받쳐 줄 것이다. 남작의 적은 곧 나의 적이 될 것이며, 누구든 그를 대할 때 뒤에 내가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이 형형한 눈빛으로 마지막 질문을 건넸다.

“너 또한 모든 일을 처리할 때 나의 명예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동의하겠느냐?”

“네, 언제나 후작님의 명예에 해가 되지 않도록 행동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지셀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됐다!’

이제 브랜포드 후작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미뤄 두었던 중요한 일들을 처리할 차례였다.

‘저 사람 성격에 그저 약속했다는 이유만으로 승낙하진 않았을 거야. 나와 손을 잡으면 이득이 있다고 생각했겠지.’

브랜포드 후작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정치가다.

정말로 지셀을 받아들이기 싫었다면 얼마든지 핑계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도 굳이 그를 받아 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친왕파의 기수로 활용할 생각이려나.’

공작가 세력과 직접적으로 대치하게 되는 자리에 지셀을 세울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지셀은 이미 그들과 척지게 된 상황.

설령 후작이 그를 이용하려 하더라도 굳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앞으로 후작에게 노골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핑계가 생기는 셈이니 오히려 좋다.

브랜포드 후작이 대놓고 지셀의 뒤를 봐준다면, 델파인 공작도 페르디움 영지에 손을 쓰기가 상당히 곤란할 것이다.

‘이걸로 시간을 조금 더 번 셈이다. 그놈들 무척 당황하겠지? 크크큭.’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전생에 친왕파는 결국 델파인 공작가에 잡아 먹히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은 브랜포드 후작이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 터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가신들 또한, 앞으로 펜리스 남작을 대할 때는 그 뒤에 내가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집사는 왕실과 각 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예, 후작님.”

집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지셀이 주변에 있는 후작가의 가신들을 쓱 둘러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 불신, 불쾌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가신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보던 지셀이 씨익 웃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표정들이 어째,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거 같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신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아, 저하고는 눈도 마주치기 싫으시다는……?”

지셀이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가신들은 사색이 되어 얼른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셨구나! 전 또 다들 저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죠!”

“하, 하……. 설마요.”

가신들은 불만스러운 속내를 감추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후작가의 가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도의 귀족들 앞에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다니던 사람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지셀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그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참 신기한 놈이긴 하구나.’

세상 살면서 저렇게 노골적으로 뻔뻔한 놈은 정말 처음 봤다.

‘그래도 저 정도로 강단 있는 놈이면 밀어주는 맛은 있겠군.’

후견인을 요청할 정도라면 자신에게 바라는 게 많을 것이다.

그 부분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할 때, 문을 지키던 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브랜포드 후작이 의아해하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중에 따로 찾아오라는 말을 전하지 않았나?”

“분명 전해 드렸습니다만…….”

집사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뭐,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돌려보낼 필요는 없겠지. 들여라.”

끼이익.

병사가 조심스럽게 대전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로잘린이 단아한 드레스를 차려입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채 서 있었다.

지셀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화장을 한 건지, 로잘린의 얼굴은 붉은 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차가운 눈빛과 굳게 다문 입매에서 강단 있는 성격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 분위기만큼은 브랜포드 후작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저벅.

로잘린이 우아하게 대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사가 반가워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아이고, 아가씨! 벌써 움직이시다니,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오랜만에 이렇게 차려입고 화장까지 하시니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창피하게 왜 그……. 아니야, 고마워. 그간 고생 많았어.”

로잘린은 희미하게 웃으며 짧게 답하고는 브랜포드 후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펜리스 남작과는 얘기가 다 끝나셨나요?”

“그래, 너를 치료해 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내가 저놈의 후견인이 되어 주기로 했다.”

그 말에 로잘린이 눈을 크게 뜨고 지셀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서 그런 보상을 얻어 낸 사람은 지셀이 처음이었다.

‘역시 범상치 않은 인간이긴 하네.’

미묘한 웃음을 지은 그녀는 곧 지셀에게 다가갔다.

로잘린이 다가올수록 지셀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

‘평소처럼 짜증을 안 내니 뭔가 수상하네. 감사 인사를 할 사람처럼은 안 보이는데 무슨 생각인 거지?’

지셀은 문득 치료 중에 그녀가 이를 갈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이 돌팔이 새끼!

― 당신,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 절대 곱게 못 죽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으음, 그거 진심이었던 거 같은데. 설마 진짜 죽이겠다고 덤벼들지는 않겠지?’

아버지인 브랜포드 후작의 힘 없이도 그녀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런 사람이 독기까지 갖추었으니, 만약 그녀가 아직도 지셀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다면 상당히 피곤해진다.

은혜를 입은 사이에도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죽이는 미친 자들이 많은 세상이다.

심지어 지셀은 그녀가 화끈하게 욕하는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화끈하게 행동했다.

‘뭐…… 따귀 한 대 정도는 맞아 줄게.’

생각해보니 그래도 귀족가의 영애인데 너무 심하게 대하긴 했다.

자신이야 본래도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라지만, 상대는 아닐 테니까.

‘아니 그래도, 난 다 치료를 위해서 그런 거라고. 그래도 마지막에 분위기 괜찮았잖아?’

로잘린이 움직이는 동안 모두가 긴장한 채 침묵을 지켰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로잘린이 지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남작님.”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곧 가슴에 손을 얹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천형처럼 저를 옭아매고 있던 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지켜보고 있던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아, 아가씨가 사과를 하시다니!’

지셀도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뒤로 뺐다.

‘이 여자가 안 어울리게 왜 이래?’

고개를 든 로잘린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머? 다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세요? 무슨 일 있나요? 아, 오랜만에 제 얼굴을 봐서 그런가 보네요. 아이참, 부끄럽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뻔뻔한 태도에 사람들은 눈만 껌뻑거렸다.

지셀이 참지 못하고 살짝 떠보듯이 물었다.

“저기…… 정말 괜찮으세요?”

“네? 뭐가요?”

“어제까지만 해도 저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제가 언제요? 저는 그런 험한 말 안 해요.”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어머, 치료하는 게 많이 힘드셨나 봐요. 환청을 들으신 거 같은데요.”

로잘린은 제 뒤를 따라온 하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그런 말 했었어?”

하녀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아닙니다. 하신 적 없습니다.”

“이것 보세요.”

지셀은 황당함에 입을 떡 벌렸다.

‘단검으로 내 대가리 찍으려고 한 게 아직도 눈앞에 생생한데 이렇게 시치미를 뗀다고? 이건 새로운 괴롭힘 방법인가?’

그는 한껏 억울해하는 어조로 말했다.

“아니, 저보고 돌팔이라고, 갈기갈기 찢어서 죽이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촤르륵!

지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잘린이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부채로 일그러지는 입매를 가린 채, 두 눈만 내보이며 말했다.

“아이참, 그런 적 없다니까요?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게 자꾸 왜 그러세요! 아무리 은인이셔도 그렇지, 레이디의 명예를 이렇게 깎아내리시면 곤란해요.”

말투는 상냥한데 눈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쏘아져 나온다.

이글거리는 그 눈을 본 지셀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그래요. 제가 잘못 들은 거 같네요.”

‘없었던 일로 치고 싶은 건 알겠는데…… 지금 그게 의미가 있나? 소용없을 거 같은데.’

촤륵!

로잘린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자 부채를 다시 접고 상냥하게 말했다.

“혹시 치료 중에 제가 무례를 범한 게 있다면 용서하시길.”

“……괜찮습니다. 고통이 심했을 텐데 끝까지 버티신 것 자체가 대단하신 겁니다.”

어지간한 장정도 버티지 못할 치료를 버텼으니 그 점만큼은 인정해 줘야 했다.

로잘린은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치료해 주신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제 능력을 전부 써서라도 말이에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없습니다.”

지셀은 칼같이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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