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1)
브랜포드 후작은 어두운 방을 둘러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개판이군.’
퀴퀴한 냄새와 섞인 피 냄새가 그간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는지를 알려 주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로잘린은 보름 전에 비하면 무척 마르고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창문을 열어라.”
촤악!
후작을 뒤따라온 기사들이 창문을 열었다. 혹시 모르는 일을 대비해 커튼은 걷지 않았다.
불어 들어온 바람에 커튼이 휘날리자 사용인 몇 명이 로잘린에게 빛이 비치지 않게 창문 앞을 막아섰다.
지셀은 방 한쪽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도 눈 아래가 거무스름해져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영주님!”
지셀의 측근들도 급하게 들어와 그를 챙겼다.
“아가씨!”
쫓겨났던 집사도 불안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로잘린은 천천히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아…….”
그녀는 무심코 탄식을 내뱉었다.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과 고통의 후유증이 뒤섞인 복잡한 음성이었다.
로잘린은 바로 지셀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장…… 저놈 잡아…….”
이제 끝이 났으니 잡아 가둬도 된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간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모욕을 그대로 갚아 줄 생각만이 가득했다.
“뭐 해! 당장 붙잡으라니까!”
로잘린의 고함에 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기사단장을 돌아보았다.
톨레오가 말없이 손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은 바로 퇴로를 막고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지셀의 측근들은 표정 관리를 하며 슬금슬금 지셀을 둘러싸고 주위를 경계했다.
“도련님! 이제 뭐 어떻게 할 거예요!”
벨린다가 다그치듯 속삭여도 지셀은 피곤한 표정만 지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클로드는 내심 혀를 차며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확 수틀리면 저 둘 중 하나를 인질로 잡아야겠다.’
그러나 톨레오도 후작가의 기사단장 자리에 거저 오른 사람이 아니다.
이미 기사들은 지셀 일행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자마자 로잘린과 브랜포드 후작에게 바로 뛰어들 수 있게 대비하고 있었다.
양측의 대치로 긴장감이 고조되던 그때, 브랜포드 후작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면을 벗어라.”
로잘린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이런 엉터리 치료라도 결과를 봐야 명분이 생기겠죠. 결과야 뻔하겠지만.”
그녀는 거칠게 가면을 벗어 옆으로 집어 던졌다.
창문이 열려 있지만 지금은 얼굴을 숨겨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간 온갖 모진 꼴을 다 당했는데 이제 햇빛 조금 받는 게 대수겠는가.
“됐지! 다 봤지? 이제 잡아! 어서!”
로잘린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
당황해하는 듯, 감탄하는 듯 이상한 소리만 내뱉을 뿐이었다.
로잘린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다들 뭐 하는 거야! 아버지 명령이 아니면 안 움직이겠다는 거야?”
“아,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집사는 눈물을 흘리며 로잘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것이 신호가 된 양 방 안에 있던 사용인들과 기사들도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 왜 그러는데? 다들 왜…….”
로잘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문득 한 가지 깨달음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졌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창문 앞을 막고 있는 사용인들에게 손짓했다.
사용인들은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옆으로 움직였다.
커튼의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빛이 로잘린의 볼을 밝게 비췄다.
로잘린은 따뜻한 기운에 움찔했지만, 아무 고통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제 볼을 쓰다듬었다.
“서, 설마…….”
그녀는 불안감과 희망을 동시에 억누른 채, 목이 멘 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거, 거울을…….”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사용인들이 허겁지겁 거울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가까이 가져갔다.
“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울이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산발이 된 머리며 피에 엉망이 된 옷은 귀족 가문의 영애라기보다는 빈민가의 여자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로잘린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볼을 쓰다듬었다.
뚜렷한 이목구비, 깨끗하게 변한 피부가 보인다.
아직 몇 군데에 붉은 반점이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내, 내 얼굴…….”
햇빛을 받아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결과에 눈을 의심하며 한참 동안 거울만 바라보았다.
집사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다 나았습니다. 이제 다 나았습니다. 치료가 정말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쓱 닦아 내고 평소처럼 담담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바로 갈아입으실 옷을 가져와라.”
집사의 손짓을 받고 사용인 중 몇 명이 재빨리 방을 나섰다.
“아아…….”
로잘린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 고문 같던 치료가 정말 효과가 있었다니.
“꾸, 꿈이지……? 이거 지금…… 다들 장난을…….”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결과에 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이보다 더 잔인한 악몽은 없을 것이다.
로잘린은 지셀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거, 거짓말이지? 이거…… 지금 무슨 약 같은 걸로 환각을…….”
“그런 게 아닙니다.”
지셀은 로잘린에게 다가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치료는 끝났습니다. 힘드셨을 텐데 정말 잘 버티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에 로잘린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
로잘린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간 억눌러 왔던 아픔이 폭발하듯이 솟구쳐 올라왔다.
드디어 이 악마 같은 병에서 벗어났다.
드디어 어둠 속에서 나와 빛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울지 않으려 해도 그간의 설움이 몰려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끄으…….”
“아가씨…….”
입을 막고 울음을 참는 로잘린을 집사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지켜보았다.
냉혈한 같던 브랜포드 후작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저기, 아가씨가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조금 주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우리 때문에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벨린다가 혀를 차며 운을 떼었다. 집사도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했다.
“그, 그럽시다. 잠시 자리를 좀 비켜 줍시다. 어서, 어서요.”
사람들이 브랜포드 후작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브랜포드 후작은 가만히 로잘린을 바라보다가 별다른 말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자, 자. 빨리 나갑시다.”
집사에게 떠밀려 사람들이 우르르 방에서 나섰다.
방문이 닫히자 그제야 로잘린의 울음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이것 보라니까요. 다들 센스가 없는 건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건지…….”
벨린다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다 후작의 눈길을 받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정말 치료에 성공했군. 놀라운 실력임은 인정하겠다.”
결과적으로 내기에 진 셈이 됐지만,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래도록 고통받은 딸이 치료가 됐으니 나쁠 리가 없었다.
지셀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집사가 제일 먼저 지셀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남작님의 의술은 정말 왕국 제일입니다! 그간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그건 아닌데.’
이거 잘못하면 천하의 명의로 소문나게 생겼다. 귀족들이 죄다 찾아오면 어떻게 하지?
‘에이, 설마.’
지셀은 내심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지셀의 측근들은 그제야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지었다.
벨린다는 후작의 얼굴을 힐끗 보면서 고소를 지었다.
‘저 뚱한 표정 좀 보라지. 불만 있으면 어디 얘기해 보시라고요.’
이런 분위기라면 저 무서운 후작도 자신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클로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위기를 넘겨 기쁘긴 했지만, 이번에도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안 갔다. 상식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와, 진짜 매번 봐도 매번 놀랍다. 이게 성공한다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반쪽짜리 지식인 거 같은데.’
지셀이 벌이는 기행은 마치 문제의 답만 어디서 쏙 빼 온 것 같았다.
정작 본인도 원인은 모르면서 결과만 내는 괴상한 현상.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몇 번이나 직접 당했는데도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껄렁대는 지셀 일행을 보고 브랜포드 후작은 눈썹을 한번 찡그렸다.
“로잘린에게는 나중에 따로 나를 찾아오라고 해라. 일단 가신들을 소집하도록. 펜리스 남작과의 거래를 마무리할 것이다.”
“오!”
브랜포드 후작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일을 마무리한다는 말은 펜리스 남작의 공을 인정하고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뜻이었다.
지셀이 과연 무엇을 요구할지, 다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훔쳐보았다.
* * *
잠시 후, 대전에 후작가의 주요 가신들이 모였다.
집사가 지셀과 그의 측근들을 직접 정중하게 안내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가장 상석에 앉아 턱을 괴고 일행을 내려다보았다.
“제법 놀라운 결과였다. 허세인 줄 알았는데, 그저 말뿐인 애송이는 아니었군.”
듣고 있던 가신들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브랜포드 후작이 한 것치고는 굉장히 후한 칭찬이었다.
“방법이 괴이하긴 했지만 어쨌든 약속은 약속. 이제 원하는 걸 말해 보거라.”
사람들은 다들 궁금해하는 얼굴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브래포드 후작과도 같은 권세가에게 원하는 것이 작은 일일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큰 걸 얻으려고 그렇게 막 나갔던 걸까?
대전이 긴장과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지셀은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 큰 걸 원하는 게 아닙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개의치 말고 말해 보거라. 네가 무엇을 원하든 대부분은 가능할 것이다.”
지셀은 다행이라는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 후견인이 되어 주십시오.”
“……뭣?”
브랜포드 후작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놀라 입을 쩍 벌렸다.
브랜포드 후작이 확인차 다시 물었다.
“지금 후견인이라 했느냐?”
“그렇습니다.”
“후원 좀 해 달라는 걸 잘못 말한 게 아니고?”
“아닌데요?”
“허…….”
언제나 무표정하던 브랜포드 후작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 모두 주인과 비슷한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오직 벨린다만이 대견스러워하는 눈길을 보냈다.
‘와, 역시 우리 도련님!’
지셀이 어릴 적에, 하나를 줬으면 둘을 뺏어 와야 한다고 가르치기는 했다.
하지만, 둘 정도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빨아먹겠다고 선언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저런 무서운 후작에게 말이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정말 잘 배웠네.’
누가 들어도 기겁할 요구를 해 놓고도 당당하게 서 있는 지셀을 보고 브랜포드 후작이 침음성을 흘렸다.
“으음…….”
단순히 후원을 해 주는 것과 후견인을 자처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다.
후견인이 되면 앞으로 지셀이 무슨 사고를 쳐도 브랜포드 후작이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큰 걸 원하지는 않는다더니, 앞으로도 두고두고 필요할 때마다 뽑아 먹겠다는 뜻이 아닌가.
이놈 참, 보통 뻔뻔한 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