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결과로 보여 주면 돼. (3)
덥썩!
벨린다는 로잘린의 양어깨를 휙 밀어 침대에 강하게 내리눌렀다.
“이게 무슨 짓이야!”
로잘린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웬디가 그녀의 발을 붙잡아 강하게 내리눌렀다.
“놔! 놓으라고!”
로잘린은 침대 위에서 바둥거렸지만 두 사람의 힘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집사! 뭐해! 병사들을 불러! 이 새끼들 다 잡아가라고 해! 다들 뭐 하는 거야!”
로잘린은 저택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집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강제로 치료하는 건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치료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실패하면 피바람이 불겠구나.’
만약 치료가 실패하면 지셀 일행만 책임을 지고 끝나는 게 아니다.
명령을 외면한 병사들과 사용인들까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집사는 후작에게 지셀을 추천했던 걸 후회했다. 이렇게까지 일이 엉망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발버둥을 쳐도 안 되고 소리를 질러도 안 통하니 로잘린은 곧 힘이 빠져 버렸다.
그녀가 이를 갈며 숨만 헐떡거리고 있을 때, 지셀이 느긋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무슨 맹수를 잡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 순순히 치료를 받으시면 좋지 않았습니까.”
로잘린은 살기 어린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며 외쳤다.
“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내가 누구인지 알고!”
“뭐…… 치료하러 왔는데 설마 환자가 누군지도 모르겠습니까.”
“죽여 버릴 거야!”
“어차피 치료 못 하면 저 죽습니다.”
“이…… 이 미친 새끼…….”
로잘린은 기가 차서 욕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새끼는 처음 봤다.
“일단 상태를 좀 확인하겠습니다. 어이, 여기 방 좀 밝혀 봐.”
지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용인들이 우르르 방으로 들어와 커튼을 걷고 사방에 불을 밝혔다.
주변이 밝아질수록 가면에 가려진 눈동자의 떨림도 점차 커져 갔다.
“지, 지금 뭘 하려고…….”
“잠깐 얼굴 상태를 확인하겠습니다. 가면을 좀 벗어 볼까요?”
“하, 하지 마……!”
지셀이 다가오자 로잘린은 다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햇빛이 들어오잖아! 지금 가면을 벗을 수는 없어!’
하지만 지셀은 그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부끄러우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치료하려면 가면은 벗으셔야 합니다.”
“필요 없다고!”
“예예, 맞습니다. 가면 같은 건 필요 없죠. 앞으로 이런 흉물스러운 건 다시 쓰지 않으셔도 되게 고쳐 드리겠습니다.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가면을 벗긴 지셀은 드러난 얼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로잘린의 얼굴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시뻘겋게 익고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그간 치료를 받으면서 상태가 악화됐다더니, 설마 이렇게 심각할 줄이야.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며 입을 막았다.
“아악!”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은 로잘린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그 잠깐 사이에 로잘린의 피부는 아까보다 훨씬 상태가 나빠져 있었다.
지셀은 황급히 제 몸으로 로잘린을 가리고는 사용인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빨리 커튼 쳐!”
로잘린은 커튼을 닫고 나서도 한참 동안 진정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개, 개자식…….”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치료하러 왔다는 놈이 병을 더 키우는 게 말이나 되는가.
로잘린의 살기 가득한 눈빛을 보고 지셀은 살짝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데?’
사용인들이 커튼을 걷는 것을 미리 막지 못한 건 확실히 자신의 실수였다.
하지만 전생에 봤던 기록에는 이렇게까지 상태가 심각하다는 말은 없었다.
그래도 병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니 생각해 둔 치료법은 통할 것이다.
로잘린이 버틸 수만 있다면 말이다.
“으음, 확인은 끝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치료를 시작하도록 하죠.”
지셀이 손짓하자 대기하던 사용인들이 약을 가지고 왔다.
“이제부터 이 약을 아침, 저녁으로 마실 겁니다.”
로잘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약탕에서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도대체 무슨 약초를 섞었는지 색도 시커멨다.
“내가…… 그딴 걸 마실 거 같아?”
“마시게 될 겁니다.”
“……?”
지셀은 한 손으로 약 그릇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 근육을 몇 번 건드렸다.
그러자 로잘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이 벌어졌다.
그녀가 아무리 애를 써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로잘린의 입 안으로 약물을 쏟아 넣었다.
벌컥벌컥!
다소 흐르긴 했지만 약물은 그녀의 목구멍으로 잘 넘어갔다.
“우우욱!”
그녀는 약이 전부 넘어가자마자 헛구역질을 해 댔다.
혀가 마비될 정도로 충격적인 맛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약을 섞어야 이런 지옥에서 퍼 올린 것 같은 맛이 날 수가 있을까?
전부 토해 내고 싶었지만, 어디를 어떻게 건드렸는지 속에서 올라오지도 않았다.
“개자식…… 마셨으니까 이제 풀어! 이제 끝났잖아!”
“끝이라니, 그럴 리가요. 이건 치료를 도와주는 약일 뿐입니다. 본격적인 치료는 시작도 안 했습니다.”
“네가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아?”
“어차피 아가씨를 치료 못 하면 죽는다니까요. 아가씨가 성질을 부리는 건 문제도 아닙니다.”
말이 안 통하자 로잘린은 이를 갈았다.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치료가 끝나고 나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그녀는 반항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숨만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러나 두 눈에는 정말 지셀을 죽여 버릴 듯이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상황이 안정된 것을 느끼고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치료가 가능하겠습니까?”
“뭐…… 대충 아는 병이니까.”
확신 어린 말에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놀랐다.
집사는 다급하게 재차 확인했다.
“정말 이 병을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 그렇다니까.”
다들 의아해했지만, 지셀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를 푸는 원리는 모르지만, 답은 알고 있으니까. 조사를 엄청 많이 했거든.’
브랜포드 후작은 유명한 만큼 정보도 많았다. 로잘린의 병과 치료법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내가 미래에서 다 보고 왔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셀은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눈빛을 피해 바로 치료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집사는 원인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원인이, 원인이 무엇입니까? 유명한 의사며 사제들도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지셀은 내심 당황했다.
‘몰라……. 뭐야, 그거…….’
사실 원인 따위는 그도 잘 모른다. 문제와 답은 아는데 풀이 과정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일이다.
‘그냥 휙 뒤로 넘겨서 답만 봤는데.’
그놈의 학자들은 기록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병이 난 원인과 치료법을 찾는 실험 과정을 문서로 수백 장씩 남겨 두었다.
‘그거 너무 글이 길었다고…….’
아무리 초인의 경지에 올라 기억력이 비약적으로 좋아졌어도 안 본 걸 알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법.
지셀은 일단 아는 대로 대충 포장해서 넘기기로 했다.
“아, 그게 그러니까…… 균형이 무너져서 그래.”
“균형이요?”
“그렇지, 아가씨 몸이 너무 차가워서 문제가 생긴 거야.”
로잘린의 증상은 차가운 기운으로 마나 로드가 막혀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니 치료법도 단순했다. 그 기운만 마나로 녹여서 뚫어 주면 끝난다.
‘그 기운이 왜 생긴 건지는 나도 모르는데.’
사람들이 모르는 부분을 꼬치꼬치 캐묻기 전에 지셀은 얼른 말을 끝맺으려 했다.
“그러니까 그 기운을 없애면…….”
그때, 로잘린이 키득거리며 지셀을 비웃었다.
“나는 지금도 몸에 열이 많아. 이 돌팔이야.”
집사도 끼어들어 한마디를 덧붙였다.
“맞습니다. 아가씨는 몸이 항상 뜨겁고 더위를 잘 타십니다.”
그 말에 다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지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게, 몸이 차가운데 왜 열이 날까?
“아하하, 아가씨 당황하셨어요? 몸이 차가운데 열이 나서 많이 놀라셨구나.”
“당황한 건 너겠지.”
지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몸 안쪽이 너무 차갑다 보니까 열이 밖으로 빠져나가서 그런 겁니다. 가뜩이나 열을 받은 피부에 햇빛까지 닿으니 견디질 못하는 거죠.”
지셀은 자기가 아는 이론과 지식을 모조리 때려 박아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다들 그럴듯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토…… 통했나?’
로잘린마저도 아무런 말이 없는 걸 보면 정말로 통한 모양이었다.
‘휴…… 의사 아무나 하는 거 아니네.’
지셀은 한시름 놓고 다시 치료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때 가만히 있던 클로드가 끼어들었다.
“그럼 이거 왜 걸리는 거예요?”
‘아니, 이 새끼가?’
아, 몰라. 모른다고. 왜 걸리는지까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치료해서 고치기만 하면 될 거 아냐!
……라고 쏘아 주고 싶은데 보는 눈이 너무나 많다.
지셀은 부드럽게 웃으며 클로드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 총관이 궁금한 게 참 많구나. 그러니까 이게 왜 걸리냐면…….”
“악! 영주님 아파요! 어깨 빠지겠네! 살살 잡아요!”
“……그냥 타고나는 거야.”
타고났다고 하니 다들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타고났다는데 뭐 어쩔 거야?’
지셀은 그 한마디로 모두의 입을 막았다.
“시간 없으니까 설명은 이쯤 해 두지. 더 묻지 말도록.”
그 말에 다들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후, 이제야 시작이군.’
어찌어찌 치료를 시작하게 됐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모를까, 지금처럼 악화된 상태에서 치료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하다.
거기다 로잘린이 그를 전혀 믿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이 치료는 마음의 대비를 해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고통. 버티지 못하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
‘전생에는 어떻게든 버텨 내긴 한 모양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때는 끊임없이 멸시당한 분노 덕분에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전생에 이 치료법을 발견한 사람은 로잘린 본인이었다.
그녀는 정략결혼을 한 뒤에도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숨어 살았다.
권세가의 딸이라 대놓고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겠지만, 사방에서 쏘아 보내는 경멸의 눈빛을 그녀가 모를 리는 없었다.
그런 수모를 계속 겪으면 갈수록 독해지는 건 당연한 일.
그녀는 총명한 머리와 강한 집념으로 기어코 치료 방법을 찾아내고 만다.
‘하지만 그때 가서 고쳐 봐야 너무 늦었지.’
다행히 병은 고쳤지만, 결국 그 당시의 치료는 반쪽짜리 성공으로 끝나고 만다.
마나 로드가 막혀 있었던 탓에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기껏 병을 고치고 나서도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뒤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러니 당장 고통스러워도 버티기를 바라는 수밖에.
‘제발 좀 버텨 주십쇼. 실패하면 아가씨만 죽는 게 아닙니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로잘린도 죽고 자신도 곤란한 상황에 빠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