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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28화 (128/269)

128화 결과로 보여 주면 돼. (2)

스산한 경고에 다들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지셀은 그녀의 경고를 무시하고 방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권세 높은 귀족 영애가 사는 공간이라기에는 너절한 공간이었다.

‘이런 데서 살고 있다고?’

지셀 일행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운지 집사는 살짝 표정을 굳혔다.

“아가씨, 후작님의 명입니다. 보름 동안 펜리스 남작님이 아가씨의 피부를 치료할 것입니다.”

“…….”

“의학과 약초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입니다. 수도에 유행하는 화장품도 이분이 직접 만드셨습니다.”

“…….”

집사가 설명을 이어 가도 로잘린은 아무런 말도 없이 숨만 몰아쉬었다.

가면을 썼기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표정이 어떤지 느껴질 정도였다.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이렇게 살았다는 기록은 없었는데……. 하긴 널리 알려질 만한 이야기는 아니군. 철저히 입단속을 했겠지.’

전생에 본 기록에는 로잘린이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관한 내용은 얼마 없었다. 주로 결혼한 뒤 조용히 숨어 살았다는 말 정도.

그나마 남은 기록도 집사가 말했던 과거의 성격 좋았던 행적뿐이었다.

‘뭐,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지. 병만 치료하면 다시 볼 일도 없는 사이에.’

지셀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부드럽게 말했다.

“지셀입니다. 앞으로 아가씨의 병을 치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잘린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필요 없으니 나가세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투였다. 그나마 귀족을 상대한다고 존댓말을 써 주는 게 감사할 정도였다.

지셀은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로잘린의 두 눈에는 원망과 증오가 가득 차 있었다.

‘역시 좋지 않아.’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과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섞여 그녀의 마음을 시커멓게 태우고 있었다.

지셀은 이런 눈빛을 보이는 사람들을 자주 보아 왔다.

이런 사람이 참고 참다 결국 폭발하면 여럿 골로 보내곤 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억누르고 있는 모양이네.’

전생에도 로잘린이 미쳐서 누군가를 함부로 죽였다는 기록은 없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고립시켜 가며 버티는 것 또한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부 반응이 너무 과한데?’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은 치료해 주겠다는 말을 들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리는 게 정상이다.

이렇게까지 거부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의아해하는 기색을 눈치챈 집사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그간 치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러시는 겁니다.”

“허…….”

지셀은 집사가 생략한 말을 알아듣고 혀를 찼다.

‘그놈들 때문에 처음 본 나까지 못 믿는 거네.’

로잘린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혹시나 부작용으로 어딘가 잘못되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울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믿음부터 사는 게 우선이다. 하여튼 어중이떠중이들이 문제라니까.’

지셀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그간 고생이 많으셨군요. 하지만 저는 그런 의사들과는 다릅니다.”

로잘린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어떻게 다르다는 거죠?”

“저는 이 치료에 제 목숨을 걸었습니다.”

“풋.”

지셀은 정말 진지하게 말했지만 돌아온 건 비웃음뿐이었다.

로잘린은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세요, 남작님. 저를 치료하던 다른 의사들 중에 목숨을 건 사람이 없었을 거 같나요?”

“…….”

“부와 명성을 얻어 가려고 찾아온 자들이 하는 말은 항상 뻔하죠. ‘목숨을 걸고 반드시 영애의 병을 치료하겠습니다!’”

“…….”

“그 사람들이 죄다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 드려야 하나요?”

로잘린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결국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지셀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화장품 장사가 잘되니까 본인이 아주 대단하고 특별한 사람 같아요?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당신 목숨은 제가 먹다 버린 음식물 쓰레기와 다를 게 없어요. 걸어 봤자 전혀 가치가 없다는 뜻이죠.”

“아,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무례한 언사에 집사마저 땀을 뻘뻘 흘리며 만류했다.

하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비아냥거렸다.

“아, 다른 점이 있긴 하네요. 귀족 의사는 없었죠. 남작님이 최초로 목이 날아가는 귀족이 되겠네요. 재미는 있겠어요.”

“…….”

“뭐, 귀족이라고 해 봐야 그냥 화장품이나 만들어 파는 형편없는 인간이죠. 죽어도 별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본인 생각은 어떠세요?”

자신의 신분도, 상황도, 주변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독설에 지셀은 끼어들 틈도 찾지 못하고 얼빠진 표정만 지었다.

‘혹시 지금 나한테 화풀이를 하는 건가?’

그동안 다들 그녀를 피해 다녔을 테니 그녀도 쌓인 짜증을 풀 곳이 없었을 터.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셀 옆에는 그가 욕먹는 걸 참지 못하는 벨린다가 있었다.

“아가씨! 말씀이 너무 심하시잖아요! 우리 도련님이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초면에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녀가 앞으로 나서며 크게 외쳤다.

로잘린은 벨린다 쪽을 돌아보더니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거칠어지는 숨소리.

왠지 증오에 가득 찬 로잘린의 눈빛을 보고 벨린다는 당황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 나 뭐 실수한 건가? 가만히 있을걸.’

지셀도 뒤늦게 문제를 깨닫고 로잘린의 기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지금 벨린다는 화장품을 열심히 발라서 피부에 반짝반짝 윤이 났다.

가뜩이나 피부 문제 때문에 신경질적으로 변한 로잘린이다. 피부가 유난히 좋은 벨린다를 보고 심경이 편할 리가 없었다.

지셀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 아가씨. 잠시만 제 말을 들어…….”

“나가.”

“아니, 그러지 마시고요. 제가 치료를…….”

“나가! 나가라고!”

로잘린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방 안의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집사가 다급하게 지셀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이, 일단 나가시죠. 아가씨께서 화가 좀 풀리시면 그때 다시 찾아뵙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그래, 그래야겠다.”

지셀도 날아오는 물건들을 쳐내며 일단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힌 뒤에도 한참 동안 방 안에서 물건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셀은 턱을 긁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화를 가라앉히고 대화가 좀 통해야 치료를 시작할 텐데 말이지.”

“그냥 돌아가시죠. 저런 상태인데 무슨 치료를 합니까? 곁에 가지도 못하겠는데요. 치료받을 사람이 싫다는데 브랜포드 후작님도 뭐라고 하지는 못할 겁니다.”

클로드의 말에 다른 일행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그냥 놔준다는 보장도 없고 말이지.”

애초에 목적이 있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온 건데 겨우 한 번 거부당했다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클로드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저런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설득하려고요. 이미 당한 게 너무 많아서 불신만 남은 상태 같은데요? 말이 안 통해요, 말이.”

“으음, 그러니까 일단 화를 좀 가라앉히고…….”

“그게 되겠습니까? 이미 병 때문에 속이 썩어 문드러진 거 같은데요.”

“……대화를 시도해 봐야지.”

“지금도 해 봤는데 안 통하잖아요.”

지셀이 인상을 찡그리며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클로드는 움찔하며 시선을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좋은 해결책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강제로 치료하자.”

사람들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벨린다가 확인차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강제로 붙잡고 치료하자고.”

“……그래도 되나요?”

“어차피 허락도 받았는데 무슨 상관이야? 결과로 보여 주면 돼. 그렇지?”

지셀이 집사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집사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 그래도 강제로 하는 건 좀…… 시간을 두고 설득하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 독이 바짝 올라서 대화 자체가 안 되는데 언제 설득을 해? 보름밖에 시간이 없는데?”

“어, 저기…… 그게…….”

“보름 동안 손가락만 빨다가 죽을 수는 없잖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협조나 잘해. 당신이 우리 목숨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

“아, 알겠습니다.”

집사까지 동의했으니 이제 거칠 건 없었다. 지셀은 바로 지시를 내렸다.

“좋아, 일단 준비할 약재부터 알려 주지. 최상급 만드라고라 뿌리를 매일 두 번씩 먹을 수 있는 양으로 사 오도록 해.”

“만드라고라 뿌리 말입니까?”

집사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황당해했다.

만드라고라 뿌리는 자양강장제로 유명하지만, 주로 남자들이 먹는 약재였다.

열기가 워낙 강해 여자들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더 안 좋다는 게 정설이었다.

지셀은 사람들이 품은 의문을 짐작하면서도 굳이 설명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그래, 후작 영애를 치료하려면 그게 꼭 필요해. 거기에 몇 가지 약초도 더 구해 오고.”

집사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브랜포드 후작이 허락한 이상 자신이 반대해 봐야 소용없었다.

* * *

지셀이 요구한 약재들은 대부분 희귀하고 비싼 종류였다.

하지만 후작가에서는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약재를 구해 달여 왔다.

브랜포드 후작가의 재력과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감탄하며 지셀은 탕약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좋아, 이제 아가씨에게 가자.”

벨린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어떻게 들어가시려고요? 문을 안 열어 주면 손쓸 방법이 없잖아요.”

“정 안 되면 부수고 들어가야지. 그래도 모양새가 안 좋으니 그 전에 집사가 힘 좀 써 보지?”

“예? 제가요?”

집사가 당황해서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럼 누가 해? 아니면 후작님한테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할까? 책임질 수 있겠어?”

집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다시 우르르 로잘린의 방으로 몰려갔다.

똑똑.

집사가 문을 두드리자마자 방 안에서 로잘린이 짜증을 가득 담아 외쳤다.

“뭐야? 내가 오지 말라고 했지?”

집사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가씨를 모실 새로운 사용인들을 데려왔습니다.”

“뭐?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 해!”

“하지만…… 요새 사용인들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새로 뽑아 왔습니다. 앞으로 아가씨를 모시게 될 자들이니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여쭙는 겁니다.”

로잘린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무리 그녀가 사람을 피해 방 안에서만 지내도 전속 하녀들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식사와 목욕물을 준비하고, 입을 옷을 정리하고 방을 청소할 사람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녀들은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지만, 로잘린은 그 짧은 시간도 참지 못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생기면 격하게 신경질을 내곤 했다.

그녀에게 당한 사용인들이 겁을 먹거나 울분을 견디다 못해 나가는 일도 잦았다.

“들어오라고 해.”

한참 뒤, 로잘린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여자 두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브랜포드 후작가의 전속 사용인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로잘린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벨린다라고 합니다.”

“웬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던 로잘린이 인상을 썼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지?”

분명 아까 의사란 놈과 함께 있던 여자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로 온 사용인이랍시고 나타나다니, 뻔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랑 장난하는 거야? 둘 다 죽고 싶어?”

로잘린이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벨린다는 입가에 띤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오늘부터 아가씨를 지극정성으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이런 일에는 경험이 많답니다.”

“모시기는 대체 뭘 모신다는 거야?”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뭐? 누구 마음대로…….”

로잘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린다와 웬디가 번개같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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