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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25화 (125/269)

125화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1)

경비병은 무심한 얼굴로 업무 지침에 따라 말했다.

“후작 각하께서는 지금 왕성에…….”

“자택에 계신 거 다 알아보고 왔다. 어서 전해라.”

“아니, 그게…….”

경비병은 당황했다.

브랜포드 후작은 이렇게 무작정 찾아온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미리 사람을 보내 약속을 잡고, 몇 달은 기다려야 겨우 만날 수 있다.

지금도 후작을 만나겠다고 기다리고 있는 귀족들만 수십 명이었다.

“일단 방명록에 이름과 용건을 남기시면, 따로 사람이 찾아가 이후 일정을…….”

“정말 중요한 일로 왔으니까 안에 기별이라도 넣어 봐라. 그래도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가겠다.”

“아니, 좀……. 후우.”

경비병은 한숨을 내쉬며 화를 삭이고 용건을 물었다.

“찾아온 용건을 말씀해 주시면 안에 전달하겠습니다.”

“로잘린 아가씨 일 때문에 왔다고 전해. 며칠 전에 여기서 내 화장품을 사 갔는데, 경과도 좀 확인하고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도와줄 생각이다.”

로잘린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경비병은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한때 후작가에서는 로잘린의 피부병을 호전시키기 위해 미용 제품이든 약이든 가리지 않고 찾았다.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이 요행을 바라고 찾아와 검증되지 않은 약과 방법들을 추천하고, 아예 엉터리 약을 가져다 팔아먹기도 했다.

로잘린은 매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자들을 전부 받아 주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상태가 더 나빠지는 건 예사였고, 독 때문에 죽다 살아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브랜포드 후작은 딸의 주변에 꼬여 든 벌레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것을 뻔히 아는 경비병의 눈에 지셀은 알아서 죽을 자리로 기어들어 온 놈으로밖에 안 보였다.

경비병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그냥 포기하십시오. 자칫 잘못하면 목이 달아납니다.”

“나는 괜찮으니까 어서 전해라.”

“제가 안 괜찮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들였다가는 저도 죽습니다. 말만 전해도 죽을 겁니다.”

경비병은 살려 달라는 듯 애절한 표정으로 사정사정했다.

급기야 눈을 꼭 감고 버티는 경비병을 보고 지셀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면 집사라도 좀 불러 봐. 며칠 전에 화장품 팔았던 사람이 찾아왔다고. 후작님은 몰라도 집사는 만날 수 있을 거 아냐?”

“그게…….”

“쓰읍, 빨리!”

지셀은 마구잡이로 밀어붙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한번 자리를 비우면 며칠은 보기 힘들다. 마침 집에 있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결국 경비병은 지셀의 등쌀에 떠밀려 집사를 불러왔다.

집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지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화장품은 써 봤나? 어땠어?”

“소용없었습니다.”

지셀은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좀 알아봤는데, 후작 영애를 치료하려면 화장품 말고 다른 방법을 써야겠더라고.”

“다른 방법이라니요?”

“그건…… 지금 여기서 할 말은 아닌데. 후작님께 말씀드려야지.”

지셀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선 채 히죽 웃었다.

“지금 당장 후작님에게 전해. 내가 좀 보잔다고, 따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그래도 거절하면 뭐 별수 없지. 누구 손해가 더 클지 모르겠네.”

집사가 잠시 고민하다 경고했다.

“허언이면 위험할 겁니다. 후작님은 귀족이라고 봐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셀은 답답해하며 눈을 찌푸렸다.

“어차피 그쪽은 밑져야 본전 아니야? 빨리 전하기나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귀족답지 않게 경박했지만, 묘하게 자신감이 넘쳤다. 그 모습에 집사는 마음이 흔들렸다.

비록 로잘린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지만, 귀족들이 극찬하는 화장품을 직접 만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저리도 자신하니 마지막으로 맡겨 봐도 괜찮을 거 같았다.

“우리 쪽에서는 밑져야 본전이지만 남작님에게는 그게 아닐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정 원하신다면, 제가 후작님께 말씀을 드려 보지요.”

“그래, 그래.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집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브랜포드 후작을 찾아갔다.

집무실에서 잔뜩 쌓인 서류들을 보고 있던 브랜포드 후작이 집사의 보고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펜리스 남작? 그게 누구냐.”

“며칠 전에 사 왔던 화장품을 만든 자입니다. 에일즈버 백작 부인이 뒤를 봐주는 젊은 귀족 말입니다.”

“아, 그래. 기억이 났다. 그런데 다짜고짜 날 만나러 왔다고?”

“그렇습니다. 아가씨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브랜포드 후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건방진 놈이구나. 여기가 어디라고 멋대로 찾아와 만나자고 하는 건지.”

후작은 딸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말에 신경 쓰기보다, 예고도 없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말에 더 불쾌함을 표했다.

약속도 잡지 않고 만나 달라고 할 정도로 이곳이 쉬워 보였던가?

이건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돌려보내라. 앞으로도 찾아오지 말라고 확실히 경고해.”

후작의 단호한 태도에도 집사는 포기하지 않고 부드럽게 그를 설득했다.

“이제 막 시골에서 올라온 귀족이라 후작님에 대해 잘 모르는 거 같습니다. 그래도 저렇게 자신 있어 하는데 한번 맡겨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순간 눈썹을 찡그렸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자신을 모셔 온 집사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집사는 후작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눈치채고 조금 더 간곡하게 청했다.

“요즘 아가씨의 상태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펜리스 남작의 화장품이 효과가 좋다는 소문이 근방에 자자합니다. 그런 제품을 직접 만든 귀족이니 색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 그게 의미가 있는가?”

후작도 처음부터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후작가의 권세를 동원해도 로잘린의 병세엔 차도가 없었다.

아버지로서 안타깝긴 하지만, 후작은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딸은 귀족가의 안주인으로서 살게 될 터.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뿐이라면 사는 데 큰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집안이 편안해야 후작님께서도 바깥일을 하시는 데 마음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허언이라면 그때 가서 벌을 내리면 됩니다.”

집사가 재차 말하자, 후작은 피식 웃었다.

“목을 베면 메리엘이 슬퍼할 텐데.”

“부인께서도 이해하실 겁니다. 실패한다면 후작님께 허언을 한 셈이니까요.”

후작은 거짓을 고하거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자를 단 한 번도 용서한 적이 없었다.

메리엘이 뒤를 봐주는 자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의 위세가 크다고는 하지만, 브랜포드 후작에게는 미치지 못하니까.

“데리고 와라. 만나 보고 돌려보낼지 판단하겠다. 그리고 펜리스 남작에 관한 정보도 가져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브랜포드 저택의 문이 활짝 열렸다.

지셀을 감시하고 있던 경비병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무작정 찾아온 사람을 후작이 받아 주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지셀은 당연한 결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의기양양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 * *

브랜포드 후작은 상석에 앉아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그가 비꼬는 어조로 물었다.

“요새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 직접 찾아올 줄이야. 그래, 내 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지셀도 구구절절 예의를 따질 생각은 없기에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영애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자신감은 대단하다만,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딸을 맡기겠느냐?”

“집사에게 듣지 못하셨습니까? 저는 ‘영원의 형벌’도 고친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보셨던 어중이떠중이들하고는 다릅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천천히 옆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고 읽었다.

“그래, 레이폴드에서 사제 하나가 그런 소리를 지껄인다는 소문이 있긴 하구나. 하지만 그게 정말 네가 한 일이라는 증거는 없지.”

‘역시 브랜포드 후작가군. 변방의 영지들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니.’

브랜포드 후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북부의 망나니, 방구석 소드마스터, 허언증, 바보들의 친구, 열등감 덩어리, 미치광이……. 너 같으면 이런 별명이 붙은 사람을 믿을 수 있겠느냐?”

지셀은 표정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이며 혀를 찼다.

‘꼼꼼하게도 기록해 놨네.’

망나니이니 뭐니 해도 지셀은 영주의 직계다. 당연히 그에 관한 정보도 모아 두었을 것이다.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마저도 일종의 정보니까.

그는 혹시나 흠이 잡힐까 얼른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들어 후작을 마주 보았다.

“영애의 병은 사제들도 치료하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뭐, 신성력이 만능은 아니죠.”

“신전에서 들으면 기겁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나.”

브랜포드 후작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너는 내 딸을 본 적도 없다. 그런데 무슨 증상인 줄 어떻게 알고 도와주겠다는 것이냐?”

“이미 알게 모르게 소문이 퍼져 있지 않습니까.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헛웃음을 짓더니 한쪽 손으로 턱을 괴며 물었다.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제 막 수도에 올라와서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겠구나.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목숨을 걸 각오도 되어 있겠지?”

“사람을 돕는 데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까?”

“왜, 자신 없느냐?”

브랜포드 후작은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띠고 말했다.

“페르디움 백작이 변경에서 고생이 많은 걸 알고 있다. 네 아비를 봐서 한 번은 용서해 주겠다. 더 이상 선을 넘지 말고 물러가거라. 여기는 네 영지가 아니다.”

페르디움 백작은 비록 찢어지게 가난하기는 하지만, 왕실에 충성하고 명예를 아는 귀족이다.

친왕파 귀족들 사이에서는 페르디움에 지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말이 나온 적도 있었다.

델파인 공작가와 세력 다툼을 하느라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말이다.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브랜포드 후작은 페르디움 백작의 얼굴을 보아서 이번에는 지셀을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아들의 무례를 넘어가고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지원을 더 해 주지 않은 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은 그의 배려를 무시하고 역으로 물었다.

“따님을 치료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심드렁하게 답했다.

“치료하면 좋겠지만, 치료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당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확실히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지셀 곁에서 벨린다와 클로드만 안색이 핼쑥해졌다.

전전긍긍하는 지셀의 수하들을 흘깃 보고 브랜포드 후작은 피식 웃었다.

수하들이 불안해하는데도 지셀은 제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경고했는데도 굳이 하겠다는 걸 보면 최소한 용기 하나는 알아줄 만했다.

“그래, 그렇게까지 원한다면 한번 해 보거라. 성공하면 적당히 사례하지. 집사.”

“네, 후작님.”

“펜리스 남작의 치료에 지원을 아끼지 말도록. 일이 끝나면 남작의 처우는 내가 직접 결정하겠다.”

“알겠습니다.”

“이만 물러들 가라.”

브랜포드 후작이 손을 휘저었다. 얼굴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딸과 지셀에 대한 생각은 벌써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후작이 델파인 공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지셀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적당한 사례는 필요 없습니다.”

“뭐?”

자리를 떠나려던 브랜포드 후작이 지셀을 돌아보았다.

“사례가 필요 없다는 뜻이냐? 그건 네가 결정할 게 아니다. 일의 성패에 따라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브랜포드 후작은 속으로 혀를 차며 집사에게 손을 휘저었다. 병사들이라도 불러 내쫓으라는 뜻이었다.

그때, 기막힌 말이 들려왔다.

“적당한 거 말고, 제가 원하는 걸로 하나 들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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